
모파상이 그의 어느 단편 서문에서 이런 말을 했다:
독자는 여러 가지 사람들이다. 따라서 가지가지로 요구한다.
나를 즐겁게 해 달라
나를 슬프게 해 달라
나를 감동시켜 달라
나에게 공상을 일으켜 달라
나를 포복절도케 하여 달라
나를 전율케 하여 달라
나를 사색하게 하여 달라
나를 위로해 달라
그리고 소수의 독자만이 당신 자신의 기질에 맞는 최선의 형식으로 무엇이든지 아름다운 것을 지어 달라할 것이다.
우리 예술가는 최후의 요구, 이 독자의 요구를 들어 시험하기에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비평가는 이 시험을 분석하고 그 결과를 평가해야 한다. 사상적 경향에 관해서는 용훼할 권리가 없다. 혹은 시적 작품을, 혹은 사실적 작품을 이렇게 자기의 기질에 맞는 대로 씀에 간섭을 못할 것이다. 간섭을 한다면 그것은 작가의 기질을 무리로 변조시키는 짓이요, 그의 독창을 막는 짓이요, 자연이 그에게만 준 그의 눈과 그의 재질의 사용을 금하는 짓이 된다.
희곡은 공연을 전제로 하는 장르인 만큼 소설이나 시처럼 독립된 문학 장르로 인식되기 어렵다. 특히 우리가 고전이라 일컫는 과거의 희곡들은 극장에서의 실현여부를 염두에 두고 썼기 때문에 극장조건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좋은 희곡은 읽기만 해도 그 정서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고 얘기했을 만큼 고전 희곡은 문학적 완성도가 높았다. 오히려 현대희곡의 경우에는 발달된 기계장치와 공연여건으로 무대에서의 실현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작가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체의 완성도보다는 시청각적 장비와 더불어 있을 때 희곡의 가치가 빛을 발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아마도 공연에서 차지하는 희곡의 위상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즉 과거에는 공연이 희곡에 거의 전적으로 의지했기에 희곡의 완성도가 공연의 완성도와 직결되었지만-희곡이 좋으면 공연도 좋다는 식?-, 연출자의 비중이 커지면서 희곡은 조명이나 무대 등 여러 공연 요소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그래서 어떤 희곡을 무대에 올리는가보다 어떤 연출을 만나는가가 공연의 완성도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렇다고 현대의 희곡이 과거의 희곡만 못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차라리 과거에 희곡이 혼자 져야 했던 짐을 이제는 다른 요소들에 나누어 주었고 희곡은 오히려 불필요한 것을 걷어내고 꼭 필요한 본질만 남기고 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희곡은 공연의 중요한 동기다. 현대의 극작가들도 두세 시간 안에 인간의 삶을 보여줄 수 있는 압축된 표현을 찾기 위해 고심한다. 작가들이 쓰기를 가장 두려워하는 장르가 희곡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만큼 희곡은 작가에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더욱이 자신의 손을 떠난 희곡이 새로운 주인을 만나서 전혀 다른 언어를 만나고 전혀 다른 모양새를 갖추는 모습까지도 참아낼 아량이 필요하다.
극작가는 이 어렵다는 희곡을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쓰는 걸까?
공연은 바로 희곡 찾기에서 시작한다. 무대에 올릴 만한,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만한, 우리 인간들의 삶을 밀도 있게 보여주는 희곡을 찾는 것이 제작자나 연출자의 첫 번째 임무요, 능력이다. 무대에서의 탄생, 관객과의 만남이 희곡의 존재이유다.

글 김지명(무대감독) jeem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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