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 이파리를 다 떨군 나무들을 보고 있을라치면 자연스럽게 저물어가는 한 해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면서 왜 태어났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앞으로 무슨 일이 닥쳐올 것인지 등 자연스럽게 존재론적 사색에 빠지게 된다. 인간의 삶이란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한 우연한 탄생 이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순간순간을 그저 죽음만이 확실한 미래를 향해 살아내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인생을 너무 어둡게만 보는 게 아니냐고, 그렇다면 왜 다들 살려고 아등바등하느냐고 반문할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삶이 그처럼 허무하기에 종교에 의지하고 이런저런 이유와 목적, 동기를 부여해서라도 존재의 정당성을 찾으려는 게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맘때가 되면 스산한 찬바람 속에서 다시금 삶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 시달리게 되는 건 인간이기에, 존재하는 인간이기에 감내해야 할 딜레마가 아닐지…….

지방에서 장기 공연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평소 어렵던 TV 시청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특히 영화 채널에서 해주는 영화들에 빠져 있다 보면 어느 새 극장에 갈 시간이 되어 있기가 일쑤다. 그런 속에서 만난 영화가 있다. <로맨틱 홀리데이>. 제목만 들어도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평범하면서 낭만적인 코미디다. 세상의 반은 남자요 반은 여자라는 지구 불변의 진리를 실천하기라도 하듯 이성문제 외에는 아무 고민도 없는 선남선녀들이 해피엔딩을 향해 돌진하는 가운데 귀에 꽂히는 대사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 얘기하는 작품을 생각나게 했다. 극중 할리우드에서 그야말로 잘나가는 시나리오 작가였던 노신사가 여주인공에게 하는 말, “당신은 분명 여자주인공 감인데 왜 스스로를 여자 주인공의 친구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지?”
누구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공연 오디션을 봐도 굳이 조역이나 앙상블을 꿈꾸며 준비하는 사람은 없다. 주인공이어야 더 큰 갈채와 주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자신의 삶에서 주인공이 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실상 삶을 찬찬히 살펴보면 자기 뜻대로 살고 있기보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의지와 욕망 또는 외부의 원칙에 휘둘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문득 “이게 아니었는데, 난 이런 걸 의도한 게 아니었는데…….”라고 내뱉는 자신을 보면 우리 인간이 결국 자동인형처럼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의지에 따라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톰 스토파드(Sir Tom Stoppard, 1937- : 우리가 이 사람을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로 만난 적이 있다. 그만큼 그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정통하다.)는 그런 인간의 모습을 <햄릿>에서 찾은 듯하다. <로젠크란츠와 길든스턴은 죽었다.> 제목에 나오는 두 명의 등장인물이 주인공이지만, 주인공(햄릿)의 친구라는 원작에서 보인 태생적 한계를 오히려 더욱 철저하게 보여주고 있다. 본인은 이 작품을 ‘부조리 <햄릿>’이라 부르고 싶다. 왜냐하면 죽음만이 확실한 우연한 존재로서의 인간 상황을 탐구한 작품이 부조리극이 때문이다. (부조리극에 대해서는 이후 논할 자리가 마련될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들은 결국 주인공의 친구일 뿐이니…….
<햄릿>의 등장인물을 나열해 보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우리는 햄릿, 아버지의 유령, 햄릿의 삼촌 클로디어스, 햄릿의 어머니 거투르드 왕비, 오필리어의 아버지 폴로니어스, 오필리어의 오빠 레어티스, 오필리어, 그리고 햄릿의 벗 호레이쇼 등을 꼽을 것이다. 그렇다면 로젠크란츠와 길든스턴은 누구인가? 그들 역시 <햄릿>에 등장한다. 다만 주인공이 아닐 뿐이다. 주인공이 아닐뿐더러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햄릿의 광증의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소환된 햄릿의 대학친구들로서 햄릿의 친구지만 햄릿을 제거하라는 클로디어스의 명령을 받드는 심복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들을 부른 클로디어스조차 그들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로젠크란츠에게 길든스턴이라고, 또 길든스턴에게는 로젠크란츠라고 부르는 장면, 그리고 그들 역시 본인들의 이름을 헷갈려 하는 장면이 원작에 나온다. 아마도 톰 스토파드는 이 장면의 우스꽝스러움과 부조리함에 착안해서 이 작품을 쓴 게 아닐까 한다.
원작 <햄릿>의 텍스트가 그대로 사용되는 부분은 운문으로, 이들이 원작의 주인공들의 부름을 기다리며 본 극의 주인공으로서 사유하고 행동하는 부분은 산문으로 된 흥미로운 구성을 취하고 있다. 무대는 <햄릿>의 공간과 이 둘의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고, <햄릿>이 진행되는 동안 이 둘은 누군가의 부름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낸다. 원작 <햄릿>이 이들의 존재이유다. 마침내 클로디어스가 이 둘을 불러 햄릿을 죽이라는 내용을 써서 왕의 소인으로 봉인한 서신을 준다. 서신을 들고 햄릿을 영국으로 데려가다가 이들이 잠든 사이에, 햄릿은 이 둘을 죽이는 것으로 편지의 내용을 몰래 바꿔치기 한다. 그 사실을 모른 채 영국에 도착한 이들은 서신을 바치고 서신 내용에 따라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그들은 각자에게 우연히 주어진 삶에서의 역할을 수행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영문도 모르는 채 죽는다.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채우다가 갑자기 죽는 우리네 인생처럼.
그렇다면 과연 어디서 어떻게 의미를 찾아야 할까? 주인공의 친구가 아닌, 주인공으로 살기 위해서는.

이 작품은 1966년 에든버러 프린지페스티벌에서 초연되었고 이듬해 영국 국립극단이 런던의 올드빅 극장에서 공연되었고 1967년 초판이 발행되었다. <햄릿>은 복수, 초자연적 요소, 광기, 근친상간, 사랑 등 다채로운 이야기 요소를 갖고 있기에 다각도로 재조명되어 왔다. 찰스 마로윗츠가 쓴 <마로윗츠 햄릿>은 햄릿과 클로디어스, 그리고 거투르드 왕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폭력성을 강조한 하이네 뮐러의 <햄릿 머신> 등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햄릿의 씻김굿으로 푼 연희단거리패의 <햄릿>, 김재엽이 쓴 <아홉 개의 모래시계>라든가 음악과 춤으로 풀어낸 극단 뛰다의 <노래하듯이 햄릿> 등이 있다.

글 김지명(SMG tech 무대감독) jeem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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