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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재의 힙합론 30] 무용의 신 니진스키 소개하기

 

이번 힙합론에서는 천재적 무용수로서 인정받았던 니진스키를 소개하겠다.
그는 여성의 주류로 인정받던 발레무용수를 남성무용수로서의 존재를 뚜렷하게 확인시켜준 장본인이며 무용의 천재, 신이라고 까지 칭송되었다.
또한 그의 춤과 작품도 매력적이지만 그의 광적인 삶이 예술가들에게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쉽게 말해 10년은 자라고 10년은 배우고 10년은 춤췄다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의 활동은 길게 잡아 1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그의 작품의 독창성이나 그의 도전정신은 현시대의 예술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그를 간단히 소개하며 그의 작품을 소개할까 한다.

니진스키의 생애를 얘기하자면 이러하다.
그는 1889년 우크라이나 키예브에서 무용가인 토마스 니진스키와 엘레노라 베레나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여 부모님으로부터 예술적이며 무용가적인 재능을 이어 받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불우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다.
형이 아파트에서 추락사고의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앓다가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의 외도로 니진스키와 절교하고 가족과도 절교하게 된다.
황실 발레학교의 무용교사 레가트의 권총자살 사건의 충격, 그의 천재성에 의한 주의 친구들의 시샘과 적으로 인한 괴롭힘, 이성적 첫사랑인 발레리나 마리아 골슈바가 자신을 이용하여 발레리나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사랑의 기만, 류보프 왕자와 디아길래프와의 동성애적 사랑, 로몰라와의 정식결혼, 그로인한 디아길래프와의 결별, 발레뤼스 해고, 세계1차 세계 대전 등은 그를 고통으로 휩싸이게 하였으며 그러한 고통은 내면의 광기로 짓누르게 되고 결국에는 1919년 그는 “오늘 나는 신과 결혼했다”는 광기어린 말을 부인 로몰라에게 말한 후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정신질환증세가 심화되어 정신요양원을 전전하다가 1950년 런던 사설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니진스키의 작품 활동은 이러하다.
1899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 발레학교 입학.
1907년 황실학교 졸업, 마린스키 극장에서 활동함
1909년 파리의 샤틀레 극장에서 초연함으로써 디아길래프 발레단인 발레뤼스에서 객원 이지만 전격적인 활동이 시작 된다. 작품출연으로는 <아르미드관>, <잔치>, <레 실피드>가있으며, 1910년에는 <세헤라자데>, <사육제>, <동방의 춤>, <지젤>등에 출연하면서 발레뤼스에서 객원 수석 무용수로서 활동하게 된다.
1911년 지젤공연에서 코스튬(코스튬이 음란하다는 이유) 사건으로 마린스키 극장(1907~1911년까지 활동)에서 해고되고, 바로 디아길래프의 좋은 조건하에 발레뤼스의 정식 단원으로 입단하게 된다. <장미의 정령>, <나르시스>, <페트류슈카>, <푸른 신>등에 출연하면서, 장미의 정령에서 높은 도약력을 선보여 파리의 관객에게 놀라움을 안겨주면서 무용의 신이라고 칭호를 얻게 된다.
1912년 니진스키의 안무작 <목신의 오후>를 발표하면서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면서, 찬사와 비난이 양립하였지만, 안무가로서의 자신을 구축해 간다.
1913년 니진스키는 두 편의 작품 <유희>, <봄의 제전>을 안무하게 된다. 유희 작품은 실패하였지만, 봄의 제전은 큰 소동과 스캔들을 일으키며 발레계의 화제가 되었다.
1916년 발레뤼스 미국순회공연 <틸 오일렌슈피겔>을 안무하였다.
1917년 몬테비데오에서 적십자 자선공연이 자신의 대중 앞의 마지막 공연이 되었다.

다음 힙합론에서 소개될 니진스키의 작품은 바로 1912년의 “목신의 오후”이다.



글_이우재 up_rockp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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