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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재의 힙합론 8] 예술로 다가가는 힙합!

 

힙합춤이 유행이나 인기로 그 시대의 지나가는 하나의 문화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면과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아야 그 생명력이 길어지며,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고 인간 문화의 영원한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힙합이 예술로 다가서기 위해 예술의 여러 가지 성향을 비교 분석하는 작업을 통해 권위적이며 보수주적인 예술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얘기를 펼쳐나가 보겠다. 따라서 이번 연재에서는 지난 연재에 이어 여러 예술 중에서도 힙합춤이 현재와 가장 가까운 과거 미술사의 팝 아트의 예술성향과 비슷한 면을 갖고 있으며, 팝 아트가 어떻게 예술로써 그 가치성을 인정받는 지를 분석하고 힙합춤이 필요로 하는 팝 아트의 특성을 살펴 볼 것이다.

보수주의적 예술비판 2부

언젠가 한 매체를 통해 이러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좋은 대학 나와 외국에서 공부도 많이 한 유학파 성악가가 한국의 대중가요를 부르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여러 매체에서는 그를 엄청 치켜세우며 ‘위대한 예술가가 인기에만 치중하는 예술성 없는 가요를 부르지만, 그 가요가 예술성 있는 노래가 된다’고 하는 것을 말이다.

뭐야~ 유학파 성악가가 가요를 부르면 예술적인 노래가 되나? 마치 소변기나 종이상자를 갤러리에 전시해서 예술로 인정받는 것처럼 일반인들은 그가 부르는 성악보다 우리에게 더 다가서있는 가요를 들으며 자라 왔다. 또한 가요는 우리시대의 격동, 슬픔, 기쁨, 사랑, 아픔 이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음악이며 모두가 함께하는 진정한 예술인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 보라! ‘자신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음악이 무엇이냐’고. 필자의 이름을 걸고 맹세 하건 데, 대부분 가요를 택할 것이다. 가요에는 진실한 삶의 추억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또한 ‘성악가수를 많이 아느냐, 대중가수를 많이 아느냐’ 하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대중가수를 많이 안다고 할 것이다. 대중가수들은 대중들과 함께하고, 매체를 통해 대중들의 삶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성악이 가요를 부르면 대단한 것인가? 아니다. 성악이 가요를 불러서 가요의 덕을 본 것이다. 대중에게 다가서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이런 말을 할 것이다. ‘성악이 고급예술이라 일반인들이 다가서기 힘든 것’이라고.

‘아~ 그러면 성악은 조만간 그들만의 세계 속으로만 사라질 것이다. 일반인을 계속 외면 한다면 말이다. 그들은 성악이란 오랜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고급예술이라는 시대에 뒤 떨어진 궤변으로 합리화 시키며 대학이라는 사회에서 인정받는 큰 조직에서만 그 가치와 입지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이다. 마치 순수 무용과 같이……. 그들이 지속적으로 대중가요를 무시하고 대중들의 선호를 무시한다면, 필자의 이러한 얘기들이 모두 옳은 것이고 그들도 대중의 노래를 그들의 노래와 같은 예술 선상에서 본다면, 필자의 얘기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으리라(필자는 성악이라는 예술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보다는 무용의 심벌로써 표현한 것이다. 이점에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또 한편으로는 대중가수가 콘서트에서 고전적인 성악(오페라)을 부른 다고 하면, 딱 잘라 말해 ‘뱁새가 황새 따라 간다’고 할 것이다. 그것이 소변기나 종이상자를 만드는 장인이 자신이 만든 소변기와 상자를, 공장에 갤러리를 만들어 설치하고 예술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비교성이 될 것이리라. ‘오랫동안 내려온 전통은 대학에서 힘들게 배운 것인데, 어중이떠중이로 익힌 발성으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고급화 된 성악을 부르느냐고, 어디 얼마나 잘하나’하고 비아냥거리는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성악가가 가요를 부르면 대중가수 보다 가요를 잘 부르지는 못 할 것이다. 다만 성악식으로 변환하여 부르는 것인데, 그 맛도 가요보다 못하리라. 대중가수도 당연시 성악을 부르려면 가요 스타일로 변환하여 부를 것이며, 성악가 보다 성악을 더 잘 부르지는 못 할 것이리라. 만약 두 노래가 같은 예술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연시 성악이 가요를 부르면 새로운 스타일의 가요를 부를 것이며, 가요가 성악을 부르면 새로운 스타일의 성악을 부를 것 이라는 차별성 없는 차이성의 노래라고 생각이 들 것이다. 이것이 인식의 차이이다.

인식의 차이에 대해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말을 상기해보자. ‘우리는 사물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사물에 부착되어 있는 분류 표시를 읽는 것에 그친다.’ 좀 과격한 표현을 쓰기도 하였지만, 다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다만 보수주의적 예술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현대에는 진보적인 성악가가 대중가수와 합동 공연을 열어 그러한 보수적인 가치관을 깨트리고 있다. 이러한 보수주의적 입장에서 예술의 가치를 평가하면서 그들만이 인정하고 바라보는 예술계 인사들에게 ‘톨스토이’가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참다운 예술의 정의를 내린 다음에 작품이 그 정의에 들어맞느냐에 따라 예술이냐 아니냐를 결정하지 않고, 이유는 어떻든지 일부 패거리들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예술로 인정하고 나서야 이러한 작품을 두루 포괄 할 수 있을 만한 예술이 정의가 고안되고 있는 것이다.’

캬~ 얼마나 명쾌한 대답인가? 예술의 가치는 일부 패거리들의 마음에 있다. 이 말은 현 보수주의 권력 속에 있는 사람들을 꼬집는 듯하다. 그러한 사람들이 예술계의 주도권을 손에 쥐고 있으니, 환경이 좋지 않은 재능 있는 젊은 예술가들의 패기는 어디로 갈 것인가? 그들의 예술적 지위가 위태로우면 자신들 만의 비합리적이지만 합법적인 방법을 방안 하여 그 자리를 유지하는 경우가 허다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재능 있는 젊은 인재를 고통 받게 하면서 까지 억압하고 질식 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필자는 이러한 자들에게 프랑스의 희곡작가였던 ‘알프레드 자리’의 작품 ‘위뷔 왕’의 첫 대사를 권해주고 싶다. “에잇, 똥이나 처먹어라!”

“당신들은 예술계의 주도권을 차지한 구습(舊習) 신봉자들로 자신들이 하는 것만을 합법적이고 진정한 거라 여기며, 나머지는 억압하고 질식시키고 있죠! 난 당신들을 인정하지 않아요!” 이 말은 필자가 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의 희곡작가 ‘체홉’의 ‘갈매기’ 중, 작가 지망생 ‘뜨레쁠레프’의 대사이다. 이 대사는 예술계의 보수주의들이 주도권을 잡고 예술계 현실에 가하는 구습적 판단과 이해 억압으로 인해 오는 창조적이며 열정적인 젊은 예술가들의 상처를 얘기한 듯하다.

힙합이 예술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구습적 판단에 좌지우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위 내용 중 성악과 가요를 비교 분석한 것은 필자의 극단적 비교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도 들은 이야기며 비슷한 경험을 한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보수주의 판단기준으로 인한 선입견에서 오는 인식의 오류이며, 예술의 판단 기준에는 절대성이 절대로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필자의 생각이 틀린 것일 수도 있고, 보수주의들이 맞는 말일 수도 있다. 필자가 보수주의일 수도 있고, 그들이 진보주의일 수도 있다. 확실한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 시대의 예술은 권력이 곧 기준이다. 그러나 보수, 진보를 넘어 선 것은 시대를 초월한 강력한 창조라 생각된다.

다시 힙합춤으로 넘어가서 얘기하자면, 성악은 무용이 될 수 있고, 힙합이 가요가 될 수 있다. 필자가 경험한 것은 춤의 양면성에 있어, 무용공연에서 힙합춤을 쓰는 것은 대단한 예술인데, 왜 힙합 공연에서 무용을 쓰면 그래 어디 한번 잘하냐는 식으로 바라보니, 어처구니없는 현실이었다. 필자는 이렇게 바라보는 안무가나 무용수, 예술가들을 무지한 기술자라고 생각한다. 움직일 줄은 알지만, 생각할 줄은 모르는 그런 사람들… 그러나 현재에는 진보적인 안무가에 의해 이러한 차별성이 점차 사라져 서로 상호적이며 발전적인 예술로써 진보해 나가고 있다. 극히 소수이긴 하지만… 그것은 삶에 가까운 것이 예술에 더욱 쉽게 다가가고 삶의 유희나 즐거움을 찾는 공연예술에서는 특히 대중의 선호도에 따라 예술의 가치도 변화하기 때문이다.

누구든 의도하는 바가 뚜렷하다면 소변기나, 상자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힙합도 마찬가지로 확실한 목표성에 의도하는 사람들로 인해 극장이라는 공간에 자리 잡으면서 점차 체계적인 예술성을 갖춰가고 있는 현실이다. 힙합 예술인들도 개념은 갖고 있으나, 구체적인 용어로 형식화만 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것을 필자와 여러분들이 젊은 패기로 도전하며 이뤄내야 하는 것이다.

힙합이라는 21세기의 새로운 예술의 초행길로 접어들기 위해… 힙합이 팝 아트와 같이 대중에게 사랑 받으면서도 순수(고급)예술계에서도 인정받기 위해서는, 목표의식을 가지고 팝 아트 선구자의 성과나 예술성을 본받아 새로운 공연예술로써 만인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 우리는 목표의식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글_이우재 up_rockp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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