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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과 死가 공존하는 세계 ‘댄싱 섀도우’

 

이 이야기는 나무에 혼이 깃들어 있다는 전통적 샤머니즘에서 출발한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중요치 않다. 인간의 마음대로 나무에 영혼을 부여하고 대립하며, 착취하고자 하지만 숲은, 나무는 그저 그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나무는 인간을 위해 조금씩은 희생을 감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연이 원래부터 그런 존재였듯이. 문제는 그들을 가만두지 않는 인간에게 있다. 숲에게 주인행색을 하며, 이웃들과 싸우고 계략을 짜다가 결국에는 모든 것을 잃고서야 자연의 섭리와 진리를 깨닫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하지만 자연은 진정 그것을 바랬을까? 불타버린 나무는 다시 자라서 숲이 되고 숲은 처음처럼 그 자리를 그렇게 지키고 있을 것이라는 걸 인간들은 정말 몰랐던 것일까?
인간은 마치 폐허가 된 놀이터를 휘젓고 다니는 개미들과 같았다. 개미들을 마냥 지켜보다 보면 먹이를 나르는, 암수가 붙어 다니는, 한번 잡아 보려면 후다닥 도망가 버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인간들의 판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아등바등 살고 있는 콘스탄자 마을의 모습과도 같다.

뮤지컬 ‘댄싱 섀도우’는 세계의 거장들이 모여 8년이라는 시간동안 공을 들여 탄생했다는 점에서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수준에 있다. 또 故 차범석의 소설 ‘산불’을 어떻게 뮤지컬로 만들었을까에 대한 말초적인 궁금증을 자극한다. 때문에 작품을 접하고서는 감탄도 실망도 아닌,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마치 안개 속을 헤매듯.
아마도 태양군과 달군을 통해 남․북한의 대립상황을 우회적으로 묘사한 데에 이유를 찾을 수 있겠다. 극은 시작부터 전쟁으로 인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알듯 말듯 안개처럼 콘스탄자 마을사람들의 숨을 죄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들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도 즐거워 보이지 않으며, 영혼의 숲조차 안식처가 되기보다는 위태로운 존재로만 느껴진다. 그것은 우리의 현재 모습을 거울 보듯 비춰보게 한다. 우리 삶의 바닥에는 사실 전쟁이라는 불안감이 늘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웃고 떠들며 행복하다 외쳐도 그것은 콘스탄자의 여인들처럼 서글퍼 보인다는 것을 인지하게 만든다. 그리곤 이내 숙연한 마음으로 진지하게 그들을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그 진지함 속에서 몰입하기 어려운 나쉬탈라, 솔로몬, 신다의 사랑은 관객을 아연하게 만들어 버린다. 시대적 배경을 생각한다면 수용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미 감성적으로 동질감을 느낀 관객들에게는 그들의 얽힌 사랑이 어색하게만 보인다. 그러나 난해했던 이 셋의 사랑은 잿빛으로 변한 콘스탄자 마을에 희망을 잉태하게 하는, 나름 이유 있는 사건이다.

그 사건의 말미에 가보면 아둔한 인간들은 언제나 뒤늦은 후회를 한다. ‘나쉬탈라가 위급한 순간에 만큼은 한 번씩 장작을 구해 왔더라면...’ , ‘솔로몬이 진정한 사랑만을 추구했었더라면...’과 같은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하지만 사건은 터지고야 말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기우는 무심하게도 인간을 기로에 내몰고야 만다. 사건은 사건을 낳고, 마치 미로 속을 헤매듯 답이 없어 보이지만, 사건에는 다 이유가 있듯이 그곳엔 반드시 실낱 같은 희망이 존재한다. 그것은 생명이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이기심으로 인해 영혼의 숲은 불타버렸고 솔로몬과 나쉬탈라도 영원히 숲속으로 사라졌지만, 신다의 자궁 속에 자리 잡은 새 생명은 그녀를 살게 한다. 아마도 마을 사람들이 그토록 듣고자 했던 나무들의 소리는 반드시 살아야 한다는 자아의 의지를 깨닫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생명은 잿더미 속에서도 싹을 틔우듯 공허한 콘스탄자 마을에도 이제 따뜻한 온기가 피어오른다. 그리고 저 멀리 숲속에서 나쉬탈라와 솔로몬의 모습도 보인다.
生은, 그리고 삶은 결국 돌고 도는 것이다. 그림자와 함께 춤을 춘다는 ‘댄싱 섀도우’는 곧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평화롭게 공존하는 콘스탄자 마을을 의미함을 이제는 알 것 같다.

안개 속을 헤매는 듯 했던 뮤지컬 ‘댄싱 섀도우’는 하나의 작품으로서 의미가 있다. 돌아가는 길에, 잠들기 전에 이리저리 생각할 거리를 잔뜩 안겨 주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학에 좀 더 집중하여 뮤지컬적인 요소가 다소 부족함을 느낄 수 있다. 예술성이 짙은 작품이지만, 과연 관객은 소설을 보러 뮤지컬 극장에 올 것인가를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앞으로 뮤지컬 ‘댄싱 섀도우’가 모든 장단점의 요소를 딛고 뛰어 오를 수 있을 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세계인들이 함께 만든 뮤지컬이기에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꿈을 꿔 본다. 세계적인 뮤지컬이 탄생하는 꿈을 말이다. 살아 있는 곳은 곧 희망이듯이, 뮤지컬 ‘댄싱 섀도우’가 살아 숨 쉬는 무대 위는 항상 희망이 존재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한국 창작 뮤지컬의 실낱 같은 희망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 2007년 7월 12일 공연


편집부 / 김유리 기자 yuri400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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