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 모든 것은 덧없지요.
아름다움도, 힘도, 판단력도 인간을 버릴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친구와 친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행을 제외한 그 모든 것이 덧없을 뿐.
때는 중세 말. 이탈리아 어느 지방의 수도원에서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난다. 피살자들은 모두 성경의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의 형상으로 죽어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뭔가 경고하기 위해서 이런 사건이 일어난다고 여기며 종교생활에 더욱 매진한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기운을 입고 인간중심적 종교관을 가진 중앙 수도원의 수도사가 이 사건에 의심을 품고 사건 조사를 위해 제자를 데리고 사건의 진원지인 수도원으로 나온다. 피살자들은 모두 검지와 혀끝에 검은 반점이 있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 단서로 파헤치던 가운데 결국 사건이 수도원의 도서관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된다. 즉 살해된 사람들은 모두 번역을 했다든가 거기에 필요한 삽화를 그렸다든가 하는 식으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희극부분과 관계가 있었던 것. 도서관장이 희극부분에 독약을 묻혔고 이를 읽던 사람들이 검지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길 때 독약에 감염되어 죽은 것이다. 다만 사건을 신의 계시인 양 은폐시키기 위해 성경에 등장하는 형상으로 시신을 두었던 것. 도서관장은 말한다. 웃음은 모든 권위를 약화시킨다고. 권력자도 웃음 앞에서는 무력해진다고. 우리가 받드는 신도 그 웃음 앞에서는 조롱거리가 될 수 있다고. 웃음을 두려워한 도서관장은 결국 도서관에 불을 지르고 거기에 보관되어 있던 장서들-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희극편-과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
이탈리아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이자 중세철학자 움베르토 에코가 쓴, 영화로 더욱 유명한 <장미의 이름>의 내용이다. 이 작품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희곡작법에 관해 쓴 <시학>에 희극부분이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실제로 <시학>을 읽어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앞부분에서 비극을 다룬 후 희극을 다루겠다고 밝히고는 있지만 비극에 관한 내용만 담겨 있다. 그에 대해 우린 두 가지 추측을 할 수 있다. 하나는 쓰려고 했으나 못썼다. 일반적인 생각이다. 다른 하나는 썼다. 그런데 워낙 오래된 책이다 보니 중간에 유실되었다. 유실된 것이 어쩌다일 수도 있겠지만 고의적으로 없어졌을 수도 있다. 고의적으로 없어졌다면 누가 왜 그랬을까? 작가는 그 대답을 중세에서 찾았다. 왜냐하면 연극사를 통틀어 중세만큼 강력하게 웃음을 규제하고 그만큼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에 입각하여 모든 예술 원리를 종교에서 찾았던 시대는 없었기에. 예를 들어 중세는 오늘날 일반적인 원근법을 따르지 않고-원근법이라는 객관적인 시각이 등장한 건 르네상스시대부터다- 신의 시각에서 보기에 중요한 것을 크게 부각시키는 주관적인 관점을 따랐다. 또 중세의 작품들이 대부분 작가 미상인 이유도 작가의 개인적 천재성에 의해 작품이 만들어졌다는 우리네의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당시의 작가들은 본인이 잘나서가 아니라 신이 자신을 빌어 표현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로마의 타락을 목격한 중세는 연극을 비롯한 일체의 예술 오락 활동을 금지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연극을 금지한 교회에서 연극을 시작했다. 물론 기독교를 포교할 목적이었다. 아직 종교개혁 이전이라 자국어로 된 성경을 갖지 못해 신도들이 평소에 성경을 읽지 못하고 또 예배시간의 설교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성직자들이 예배에 극형식을 도입한 것이다. 교회 안에서 시작된 연극은, 그러나 계속 되는 십자군 원정의 패배로 교회세력이 약화되면서 교회가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결국 성직자들이 상인조합인 길드에게 넘기면서 교회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교회 밖으로 나오면서 그만큼 교회의 규제가 완화되었고 카니발 등의 기회를 통해서 심지어 성직자들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내용을 공연하기에 이르렀다.
중세의 연극은 그리스도의 행적이나 성서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의 활약상을 다룬 신비극(기적극이라고도 한다)과 평범한 기독교인들이 일상에서 부딪히는 도덕적 투쟁을 그리는 도덕극으로 나뉜다. 도덕극은 일반인들의 삶을 다루고 있기에 세속극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번에 우리가 만날 작품은 바로 ‘에브리맨(Everyman)’이라는 도덕극이다.
주인공 에브리맨은 어느 날 죽음의 사자의 방문을 받는다. 사자는 그에게 이제 죽을 때가 되었으니 함께 가자고 한다. 자신의 급작스런 죽음 소환에 놀란 에브리맨은 혼자 죽기는 무서우니 동행을 구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한다. 시간을 얻은 에브리맨은 친구, 친족, 사촌, 재물, 지식, 고백, 아름다움, 힘, 판단력, 오감 등을 만나서 자신의 죽음의 길을 동행해 달라고 요청하나 모두 변명을 하며 그의 동행이 되기를 거절한다. 그가 평소에 은혜를 베풀었기에 당연히 그의 동행이 되어줄 거라 여긴 사람들로부터 거절을 당하자 실의에 빠진다. 모두가 자신을 버렸다고 울부짖을 때 선행이 나타나 그와의 동행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에브리맨은 선행과 함께 무덤 속으로 들어가고 박사가 등장하여 극을 마무리한다.
이 매우 교훈적이고 단순한 내용의 대표적인 중세 도덕극인 ‘에브리맨’은 여느 중세 작품과 마찬가지로 작자미상이다. 그리고 그 제목에서처럼 평범한 인간이 주인공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는 중세극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익히 살폈던 오이디푸스나 페드라처럼 특정한 이름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 지식, 선행, 힘처럼 대표성을 띤 인물이 등장하는 점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나 만물이 신의 의지의 표현이며 신의 뜻을 비유한 것이라는 알레고리(allegory)가 중세를 이해하는 키워드가 될 수 있다는 사실과 연결하면 이러한 대표성을 지닌 인물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개성을 지닌 누구누구가 아니라 신 앞에서 인간은 모두 인간(everyman)일 뿐이다. 우리는 흔히 중세를 문화예술의 암흑기라고 부른다. 문화예술은 예술가의 강한 개성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중세는 바로 이 개성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중세에 암흑기라는 굴욕을 안겨준 주된 이유가 되었다. 그렇다고 중세에 문화예술이 꽃피우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모습과 달랐을 뿐이다. 개성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극형식에도 영향을 미쳐 중세 희곡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이름이 없고 대표성을 띤 고유명사로 존재한다.
또 다른 특징은 극이 삽화적 구성을 취한다는 것이다. 희곡의 구성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모든 사건이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기승전결의 구조를 띠는 건축적 구성과 독립적인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삽화식 또는 정거장식 구성이 그것이다. 연극사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시대는 뒤에 오는 사건은 앞선 사건의 필연적 결과라는 건축적 구성을 따랐다. 중세가 유독 정거장식 구성을 취하는 이유는 중세연극이 성서를 이야기의 근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성서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이나 예수는 기적과도 같은 일들을 상호 인과관계 속에서 벌이지 않았다. 그 모든 일들은 독립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다 보니 중세연극은 한 무대에 천국과 현재, 지옥을 한꺼번에 나타내는 동시무대기법을 취했다. 마찬가지로 ‘에브리맨’도 삽화적 구성을 띠었는데, 즉 에브리맨이 지식을 만났기 때문에 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두와의 만남은 모두 별개로 전개되는 것이다.
7줄로 줄거리가 요약될 만큼 매우 단순하고 명료한 줄거리, 친절하게 요약해주는 마무리, 이름으로 설명이 되는 인물들, 설교에 가까운 교훈. ‘에브리맨’은요즘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지루하고 뻔해 보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중세극은 만나기 어려운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죽음은 종교가 있건 없건 누구에게나 떨칠 수 없는 그림자와 같다. 그 그림자가 깊숙이 드리우는 걸 두려워하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런 관점에서 도덕극 ‘에브리맨’은 평범한 인간 에브리맨이 죽음 앞에서 위축되고 그 죽음을 어떻게든 가볍게 감당하려고 애쓰는 모습은 보편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강력한 주제의 드라마라 할 수 있겠다.
중세극이 지닌 여러 형식적 특징은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 이어지는 르네상스나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시대에도 찾아보기 어렵다. 1920년대 표현주의라는 사조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중세극의 대표성을 지닌 인물들, 삽화적 구성을 다시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중세연극을 가리켜 연극사의 섬이라고 한다. 다음 편에서는 섬을 떠나 다시 육지로 향할 것이다.

글 김지명(SMG tech 무대감독) jeem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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