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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명의 희곡 읽기 7] <시학> - 우리들의 그리스식 연극 (3)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하여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

<강> 황인숙 作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베르사이유 궁전에 변소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특히 여성들은 몰래 아무데서나 배설을 해야만 했기 때문에 변을 본다는 것은 크나큰 고통이었다. 될 수 있는 대로 배변의 횟수를 줄이려다 보니 지독한 변비증에 걸리게 되고, 거기서 파생되는 여러 가지 신체적 증상과 정신적 증상, 이를 테면 우울증, 히스테리 등은 그 시대의 모든 문화 형태를 도착적인 것으로 굴절시켜 버렸다.

명기(名妓) 황진이에 대한 전설을 보면, 황진이를 짝사랑하다 상사병으로 죽은 이웃집 청년의 관이 황진이의 집 앞에서 멈추어 움직이지 않자, 황진이는 자기의 옷을 관에 덮어 주어 관이 움직이도록 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대리배설을 통해서 쌓인 원한을 풀어준 셈이다.

비극을 관람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는 왜 비극을 보는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 것은 바로 연민과 공포라는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위해서란다. “연민은 주인공이 부당하게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생기고, 공포는 우리와 비슷한 주인공이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생긴다”라고 덧붙여 설명하였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대로라면, 연민과 공포는 극 중의 비극적 상황을 보면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의 두 가지 양태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서로가 접맥되어 있는 것이 된다. 즉, 연민은 내가 아닌 ‘남’이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고, 공포는 마치 ‘내’가 그 불행에 빠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때 느끼는 감정이다. 연민과 공포는 같은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리의 문제일 뿐 결국은 같은 감정인 셈이다. 즉 주인공의 불행이 나한테 닥칠 수도 있다고 생각되면 공포요, 그저 남의 일로서 동정심을 갖게 되면 연민인 것이다. 오이디푸스에게 일어난 일이 나에게도 일어난다고 생각해 보라. “안 됐네” 정도가 아니라 당연히 두렵고 무서워지리라.
문제가 되는 표현은 카타르시스(catharsis)다. 이 말은 원래 도덕적 의미로서의 순화라는 뜻과, 종교적 의미로서의 정화 또는 속죄, 그리고 의학적 의미로서 배설이라는 뜻을 가지며 때로 복합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카타르시스에 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에서 이 말을 사용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보아 카타르시스는 ‘감정의 정화’를 의미한다는 윤리적 의미와 카타르시스는 ‘감정의 배설’을 의미한다는 의학적 견해로 나눌 수 있다. 현재에도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있으나 카타르시스의 본질에 관한 연구는 비극 그 자체의 본질에 관한 연구에 밀리고 있는 형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무슨 의미를 염두에 두고 썼든 감정은 쌓아두면 병이 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플라톤은 평상심을 잃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비극을 보고나서 쓸데없이 감정의 동요를 느낀다고 보았고 일상생활을 이성적으로 영위하게 하기 위해서는 비극이 없어져야 한다며 비극무용론을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님의 생각과는 반대로 오히려 우리가 감정을 풀지 못하고 쌓아두면 이것이 잘못된 방향에서 폭발할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을 평화롭게 유지하기 힘들다고 보았다. 그래서 비극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쌓인 감정을 풀어줘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흉악범들을 보면 늘 그들의 어린 시절을 파헤친다. 삶의 어느 한 때 쌓인 응어리가 갇혀 있다가 범죄라는 끔찍한 형태로 표출된다고 보는 것이 범죄 심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물론 이런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며칠만 화장실을 가지 못했다든가 주변인들과 계속 불화와 갈등을 겪는 경우, 화장실에서 살고 싶거나 혼자서 목 놓아 울든가 아니면 배꼽이 빠지도록 웃고 싶을 때를 흔히 경험한다. 그래서 원하는 상태를 이루고 나면 가슴 속까지 시원해지는 그런 후련함이 비극이 제공해 줄 수 있는 효과이다. 그러면 우리의 일상은 더욱 활기찰 수밖에……. 이것이 감정의 정화요, 배설을 통한 순화이다. 카타르시스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여러분의 몫이다.
마광수씨가 쓴 <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에서 인간의 감정을 오장육부와 연결해서 설명한 대목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간은 용기와 연결된단다. “간이 콩알 만해졌다”라든가 “간덩이가 부었다”라는 표현이 적절한 이유다. 마찬가지로 공포는 신장과 연결된다. 공포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자꾸 화장실에 가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것이 그런 이유라고. 따라서 비극을 보고 공포와 연민을 경험하면 감정적인 배설뿐만 아니라 신체적 배설도 원활해진다고 볼 수 있겠다.
감정의 대리 경험은 예술의 주요 존재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각자 한 사람의 삶을 산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 각자에게 닥치는 문제들은 예측하기 어렵다. 만일 우리에게 닥칠 일을 상상으로라도 미리 경험할 수 있다면 실제로 어떤 일과 맞닥뜨렸을 때 보다 냉정하게 사태를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비극은 다양한 인간의 삶을 다룬다. 언제가 본 비극과 비슷한 일을 실제로 경험했을 때 우리는 그렇지 않았을 경우 100%의 충격을 받았을 것을 60% 정도의 충격만 받고 보다 부드럽게 일을 처리할 수 있다. 이것이 카타르시스의 교육적 효용이다. 후대의 많은 연극학자들이 대리경험을 통한 대리배설이 인간의 삶을 좀 더 윤택하게 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카타르시스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정신적인 원인으로 축적된 울화 또는 욕구는 대리배설을 시켜줘야 한다. 또 그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 미쳐버리지 않고 그럭저럭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글 김지명(SMG tech 무대감독) jeem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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