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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과 인간 12] 작은 배에 같이 타고... (4)

 

[아래는 김방옥의 연극론집 ‘21세기를 여는 연극 몸•퍼포먼스•해체’를 일부 연재한 것이다. 기획연재 ‘연극과 인간’은 김방옥의 연극론집을 통해서 한국 연극의 발전을 도모하고 나아가 전반적인 한국 공연문화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해보고자 함이다.]

좌담, “배고팠던 연극정신과 비평정신은 어디로”를 읽고-

◎ 비평의 무기력; 意識化된 孤島를 위하여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오늘의 비평가 역시 이런 연극 중독자들의 폐쇄회로에 갇혀있다는 점이다.
20년 가까이 늘 별 발전이 없는 고만고만한 연극들을 보면서 가장 두려운 것은 스스로 연극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고, 현수준에 타협하고, 이만하면 많이 좋아졌다고 자위해오면서, 우리의 이 연극계는 그 나름대로 지금까지 절대적으로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그런 중독증, 무감각증이다. 가끔 T.V.나 신문이나 잡지들에서 눈이 돌게 변모하는 세상과 눈부시게 변하는 감각들을 보다가 내가 빠져있는 그 연극계의 그 비현실성 때문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중독증을 가끔 깨우쳐 주는 것이 두 가지 있다. 그것은 어쩌다가 가끔 끌려와 연극을 보게 된 바깥세상 다른 전공 친구들의 숨길 수 없는 반응이요, 또 하나는 타의에 의해 연극담당이 된 문화부기자들의 시각이다. 그러나 그들도 1, 2년만 연극부서를 담당하면 곧 중독에 빠져들고 말지만 말이다.
2000년은 문화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한다. 천박한 자본주의의 소비 오락적 문화에 질린 사람들이 다시 뭔가 정신적인 가치를 찾게 되고 영상이미지에 멀미 난 사람들이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축제나 대형이벤트와 같은 집단적 행위예술에 몰려들지도 모른다. 혹은 좀더 가깝게 상상해보자면 갑자기 삼십여 개로 불어난 연극영화과에서 쏟아져 나온 졸업생들이 어떤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보 미디어산업이 계속 발달되고 영상 이미지나 시뮬레이션문화가 계속 맹위를 떨치는 한 당분간 연극은 현재의 소수예술의 위치를 면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한다. 예컨대 일반관객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되 갑자기 서른 개 이상으로 늘어난 연극과 재학생들의 숫자만으로 마치 무용계의 경우처럼 연극전공학생이 관객의 대부분을 이루는 자급자족적인 폐쇄된 수급구조로 변할지도 모른다.
대체로 연극이 소수예술일 수밖에 없다는 비관적 전망을 대세로서 받아들이면서 연극비평이 당장 할 일은 무엇이며 또한 오늘 연극비평의 현실은 어떤가?
지난 호 좌담에서 오늘의 비평은 대개 작품단위의 리뷰에 그칠 뿐 연극현상 전체에 대한 지적 구성력이 부족하며 연극의 사회적 사명감을 일깨우고 그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그 존재를 정당화시키지 못하는 등 방향감각이 없고 비평의 폭이 좁으며 전체적으로 무력증에 빠져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비평이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지적은 신극사이래 항상 지적되어온 바이지만 특히 70년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제2세대 비평가들에 의해 지적된 이런 점들에 대해 오늘의 비평이 귀 기울여야 함은 당연하다.
변명 같지만 오늘의 연극비평이 이런 방향상실과 무기력에 빠진 데에는 앞서 지적했듯이 70년대와 오늘은 그 상황자체에 있어 많은 변화가 있다는 점은 다시 강조해야 할 것 같다. 연극을 지탱해주었던 인문적 교양을 갖춘 지성적 그룹이 정보 소비시대의 다수대중으로 해체되고 영상소비문화가 순수/상업의 경계를 부수고 문화예술계를 점령한 오늘에 있어 연극이 설 자리는 엄청나게 좁아져 버렸다. 구조자체가 바뀌었고 연극에 대한 사회의 시선자체가 변질되어버렸는데 거기 대고 관심을 호소하는 데는 그 전제부터 한계가 있는 것이다.
해방 전 신극사 초기의 연극비평은 서구적 근대극의 소개와 근대의식의 고취라는 사회계몽적 사명감에 불탔었고 해방 후 60년대의 연극비평은 비록 그 양은 적었지만 당시 동인제로 출범하기 시작했던 극단들과 함께 극계 형성 초기의 열정과 기대 위에 있었다. 70년대의 연극비평은 전통극 부활에 대한 관심, 그리고 동랑 레퍼토리를 중심으로 소개된 실험적 연극들에 의해 고양된 활기를 함께 나눴고 80년대의 연극비평은 연극을 사회정치적 고발과 각성의 도구로 삼는 마당극운동과 활발한 토론과 열띤 공방전을 펼쳤다. 이런 과정에서 연극비평은 선배 비평가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서구 실험극이론의 소개, 무속이나 전통연희에 대한 관심, 연극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고찰 등 사회 인접분야를 망라하는 관심표명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그때는 연극과 연극비평의 이런 모든 활동들을 기대감과 경외감으로서 지켜봐 주는 지성 계층, 지성 집단의 보이지 않는 지원이 있었던 것이다.
실험극 중심의 모더니즘의 심미적 분위기도 마당극중심의 이데올로기 극의 열기도 증발된 90년대에 연극은 그 연극적 이슈와 함께 사회적 발판까지도 잃게 된다. 순수연극과 상업연극, 대상과 그 비판적 거리라는 연극비평의 기본적인 대립항까지 몽땅 빨아들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모호한 광기와 만연하는 상업주의 아래 오늘의 연극비평은 방향감각을 잃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의 연극비평이 반드시 무기력하며 퇴행적이라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에 비해 발전적 변모도 없지 않다. 긍정적 부정적을 따지기 이전에 최근 비평의 변모된 양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연극계도 팽창했지만 연극평론가들의 숫자도 늘었다. 연극비평가협회 회원으로 등록된 숫자가 40명 이상이고, 양자의 숫자가 상당부분 겹치기는 하지만 보다 젊은 연극비평가나 학자들로 이루어진 공연과 이론 모임의 회원도 정회원만 30명에 이른다고 들었다. 이중에는 주로 영문학이나 불문학 독문학 등 외국문학을 전공했던 과거의 연극비평가들과 달리 국내 및 해외에서 연극학으로 학위를 취득한 인재들도 많아 보다 본격적인 연극비평이 기대된다.
실은 이런 비평가들의 숫자는 문제작을 내놓을만한 연극현장의 연극인들에 비하면 너무 많다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때로는 예술가/비평가의 숫자 비례가 역전할까 하는 두려움(더구나 요즘처럼 현장예술가들이 모두 대학강단으로 가버리면)마저 생길 정도이다. 그러나 이점은 좋은 연극창조자들의 숫자가 적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뿐이다. 지난 호 좌담에서 김태원 선생은 이때까지 보지 못한 현상으로 최근에 여성 비평가군이 부상하고 있으며 이들이 ‘깊이 있는 글을 쓰고 좋은 책을 내려고 하는 욕구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연극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문제를 끄집어내는 것은 생각보다도 폭이 좁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든다’는 발언을 한 바 있다. 이런 견해는 사실여부가 객관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개인적 인상이지만 그 이전에 성 편견적 발언으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있다고 본다.
둘째로 비평의 방법론이 서고 다양해지면서 비평이 분석적이며 치밀해졌다. 나 개인적으로는 비평에서의 인상적 직관적 요소를 결코 경시할 수 없다고 믿는 편이다. 그러나 대체로 지금까지의 연극비평이 무 방법론의 인상비평이라는 불만을 사왔다면 근래의 연극비평은 구조주의, 기호학, 수용미학 해체론 등의 방법론을 부분적으로나마 활용함으로써 비평의 논리를 강화하고 있고 페미니즘, 연극인류학 심리학 사회학 등의 인접학문분야의 개념이 참조되어 내용상 치밀하면서도 풍성해졌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연극비평이 문학적 텍스트위주의 비평이었고 잘했다 못했다 옳고 그르다의 가치판단을 앞세운 권위적 성격이 강했다면 오늘의 비평은 일단 공연텍스트를 존중하고 그 자체를 충실히 읽어내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점은 현장 연극인들에 의해서도 긍정적 반응을 얻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근시안적이며 가치 배제적이며 지적 담론의 무수한 의미망 속에서 연극자체를 해체 증발시킨다는 점에서 비평적 글쓰기 자체에 탐닉하는 또 다른 차원의 중독이 될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 또한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연극비평이 방향감각과 대 사회적 영향력이라는 점에서 무력하다면 그것은 외적인 상황뿐 아니라 사실 연극비평 및 연극비평을 둘러싼 오늘의 학문적인 풍토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비평가간의 가치관의 개인 차이는 있으나 전반적으로 지적 회의론이나 상대주의가 득세하고 헤겔의 역사철학, 마르크시즘과 같은 거대담론들이 무너지며 예술의 사회적 영향력을 중시하는 좌파이론들이 별 인기를 얻지 못하는 상황에서 비평가들 역시 쉽게 비평의 영역을 확대하거나 가치판단의 잣대를 함부로 휘두르는 일을 조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비평활동이 거시적인 데서 미시적으로, 사회적 관심보다 텍스트 내에서, 판단보다는 비평을 통한 새로운 의미창출의 쾌락적 글쓰기를 추구하는 쪽으로 변모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셋째로 이와 함께 오늘의 젊은 연극비평가들이 현장 연극인들과 가까워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비평가가 예술가들과 어떤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 나름의 이론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오늘과 같이 연극이 소외된 소수예술이 된 경우 예술가나 비평가는 어차피 같이 한 작은 배에 탄 존재가 아닌가 싶다. 자기만의 글쓰기에 몰두하거나 비평적 거리만을 염두에 두기에는 너무 작은 섬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의 순수연극에서는 단순한 기량의 과시보다는 지적 담론, 형식에 대한 성찰까지를 포함한 컨셉의 제시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말하기 조심스러우나 우리사회의 지적 그룹이 희석되면서 오늘의 연극인들 역시 지성이라는 면에서 충분히 무장되어있는가는 확신이 없는데 마침 지적 용량에 넘쳐나는 평론가들이 있다.
이들 평론가들은 창작자들의 무대를 과거처럼 평가의 자로 재단한다기보다 충실히 읽어내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이미 서로 적대적 관계를 해소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발 더 나아가 창작활동에 있어서의 상호협업을 통해서도 어떤 바람직한 결과가 있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근래 공연과 이론 모임과 신춘문예공연을 하는 연출가그룹 사이에 형성된 드라마투르기적 분석 모임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가지 곁들여 말해보겠다. 김태원 선생은, 아마도 연극계에 대한 애정에서라고 생각되지만, 지난 호 좌담에서 연극평론의 무력과 무용평론의 막강한 영향력을 대비한 바 있다. ‘연극계와 같은 무반응과 달리’ ‘무용은 여성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탓인지 하나의 평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 따른다’는 것이며 ‘때로는 안무가나 춤 단체의 성향까지도 평론가의 말에 따라서 변화될 정도‘라는 것이다. 근래 무용비평계의 활력과 선전에 대해서는 축하를 아끼지 말아야겠지만 그러나 연극비평과 무용평론을 평행으로 비교하는 데는 문제가 있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예술활동은 창작자-관객, 수용자-비평가의 삼각구도로 이루어질 때 정상적이라고 본다. 물론 순수/대중예술이냐 공연/비 공연예술이냐에 따라 관객의 기능과 비중이 조금 달라지지만 말이다. 연극계에서 일부 연극인들이 비평에 냉담한 이유가 있다면 그 중의 하나는 최후의 최고의 비평가는 관객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물론 이 표현은 요즘 ‘돈만 벌면 된다’는 의미의 또 다른 표현으로 쓰이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 무용계는 순수예술이지만 또한 공연예술 임에도 불구하고 일반관객의 존재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고 알고 있으며 따라서 평론가-창작자만의 비정상적 폐쇄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평론가의 영향이 더 직접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평이 얼마만큼 예술가의 작업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으며 그것은 얼마나 바람직한가의 문제도 곰곰이 생각해볼 문제라고 본다.
이렇게 오늘의 연극비평의 입장을 여러 가지로 살펴보고 옹호해보았다. 그러나 지난 호 좌담의 지적들대로 원칙적으로 비평가가 할 일은 많다. 우선 공연의 기록이라는 면이다. 현재 연극비평가협회는 70년대이래 연극비평 모음집을 발행하고 있으나 지면상 각자 선별한 원고를 재 수록하는 정도다. 누군가 전체 공연 비평의 인덱스화 자료정리, 자료의 해석 등 보다 체계적으로 자료를 정리해나가는 일이 필요하다. 지난 호 좌담의 지적대로 비평의 힘을 모으는 일도 필요하겠다. 예컨대 연극영화과가 삼십여 개나 생겼는데 70년대 󰡔연극비평󰡕과 같은 전문잡지 하나도 못 내고 있는 형편이니 말이다. 또 연극비평의 전문성을 높이며 동시에 시야가 좁아지지 않도록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뮤지컬, 마당극, 아동극, 등의 심도 있는 비평이 나와야겠고 연극정책적 측면, 연극행정적 측면의 전문가나 로비스트도 필요하다. 음악, 무용, 민속 등 인접분야에 대한 관심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현실에서 직업비평가로 버티기는 쉽지 않고 그러자면 겸직으로 대학강단에 서는 수밖에 없는데 이 경우 의식과 전문성을 갖춘 미래의 연극인도 배출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장기적 거시적 안목에서 중요한 일은 연극비평이 변모하는 사회의 여러 분야, 영상, 방송, 정보분야 등과의 횡적인 연계 면에서 항상 눈뜨고 있어야 하며 미래의 사회 문화 종교 교육 등의 분야와 관련한 연극개념의 확장에 대해 사색해 보아야 한다. 등등…
그러나 오늘의 연극비평은 우선 무엇보다 연극중독자들끼리의 폐쇄된 서클이 가져오는 무감각과 자기도취로부터 스스로 깨어나야 하고 남들도 눈을 뜨도록 의식화시켜야 한다는 일이 급선무라는 것이 이 글의 입장이다. 지난 호 좌담에서 지적 받은 대로 연극이 사회적 사명감을 일깨우고 비전을 제시하는 등의 기능은 여러모로 어렵다고 해도 적어도 연극이라는 존재의 정당성이라도 치열하게 물고 늘어져야 할 것이다. 예컨대 현재 연극이 사회전체로부터 소외된 소수집단이 되었다는 전제는 쉽게 깨뜨릴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이런 전제를 드러내어 인식하는 것도 의식화의 첫 단계 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소수 집단화된 집단이 될수록 필요한 것은 우리가 무슨 작업을 하고 있는지 그 작업의 의미는 무엇인지 연극이라는 작은 섬에 갇힌 집단이 오늘 사회에서 위치한 자리는 어디이며 연극의 의미는 무엇이며 어디를 향할 수 있는지를 명징하게 밝혀내는 일일 것이다.
오늘과 같은 자기중독적 무의식적 연극을 하면서 과거의 비평가들이 그랬듯이 연극은 위대하고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니 존경하고 밀어달라고 사회를 향해 아무리 떠들어보았자 뒤로 비웃음이나 당하기 십상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들이 하고 있는 거의 밀교적 행위에 대한 신념과 의식화된 인식을 갖추고 그에 합당한 결과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차이의 群島’, ‘군도의 공동체’를 얘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인과 한국사회의 기질상, 그리고 연극계의 특성상 아직 孤島에, 고도를 향해 떠밀려가는 작은 배에 함께 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중독자들끼리의 폐쇄회로를 형성하면서?
어쨌든 고도는 고도일수록 의식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오늘의 우리 비평가는 무엇보다 이 내부의 의식화에 주력해야 할 때라고 본다. 그 의식화가 이루어질 때 우리 극계는 단지 소외되거나 자폐적 고도가 아닌 보다 생산적인 그 무엇이 될 수도 있을 것이며 그것은 자연스럽게 사회 속에서의 연극의 위상과 의미와 비전을 향한 질문과 발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료출처: 연극과 인간, 21세기를 여는 연극 몸•퍼포먼스•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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