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는 김방옥의 연극론집 ‘21세기를 여는 연극 몸·퍼포먼스·해체’를 일부 연재한 것이다. 기획연재 ‘연극과 인간’은 김방옥의 연극론집을 통해서 한국 연극의 발전을 도모하고 나아가 전반적인 한국 공연문화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해보고자 함이다.]
오늘의 연극에서 희곡과 연출의 함수관계를 고려할 때, 또 공연의 시대에서 희곡이 지켜야 할 영역의 문제는 우리 연극계의 또 하나의 문제인 작가-연출가의 겸업현상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현재 우리 연극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은 거의 모두 작가이자 연출가를 겸하고 있다. 7, 80년대부터 작가-연출가를 겸했던 오태석, 90년대의 대표적인 작가-연출가인 이윤택을 비롯해서 기국서, 김광림, 조광화, 김아라, 채승훈, 윤영선, 박상현, 장진, 박근형에 이르기까지 90년대 이후의 주요인물 대부분이 작가 겸 연출가이다. 근래에 활동중인 순수한 ‘전업 극작가’로는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이근삼과 이강백, 최근에 활동이 좀 뜸한 이만희와 정복근 그리고 최근 활동을 시작한 신인급 극작가들인 오은희, 장성희, 김윤미, 김명화, 정우숙, 차근호 등을 보탤 수 있는 정도다.
이런 현상의 이유로는 우선 연출가의 입장에서 좋은 희곡이 부족하다거나 작가의 입장에서 마음에 드는 연출가를 만날 수 없다는 수동적인, 그러나 현실적인 동기를 들 수 있다. 실제로 ‘이럴 바에야 내가 직접 써본다, 혹은 재구성해 본다’로 출발한 연출가나 ‘내가 쓴 연극을 내가 직접 만들어 보고싶다’는 작가들의 팽창된 욕망을 자주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욕망들의 배후에는 보다 원론적인 측면의 문제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희곡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경시나 ‘희곡(텍스트)과 공연 사이의 거리’라는 서구현대극의 전제에 대한 도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희곡의 위치가 극문화의 핵심을 차지했고 희곡을 통해 ‘작가가 설파하는 불변의 진리’를 전할 수 있다고 믿던 시절, 희랍극작가나 르네상스기의 극작가들은 희곡을 썼을 뿐 아니라 배우들을 지도하고 무대연습까지를 맡았다. 재현적 연극의 시대에서 연출의 임무는 극작가의 혼이 담긴 절대적 텍스트인 희곡을 충실히 재현하여 공연화하는 작업으로 나타나게된다. 그러나 20세기가 되자마자 고든 크레이그는 그의 연극예술론에서 희곡이란 공연될 때까지는 미완성의 것이라는 파격적인 선언을 하게된다. 스크립트화된 희곡과 공연의 관계를 ‘스크립트에 공연덧붙이기(script-plus- performance)’로부터 ‘스크립트의 공연화(script-into-performance)’로 변했다고 보며 희곡분석의 중요성을 강조한 리차드 혼비는 희곡을 ‘출발점(a starting point)’으로 파악했다. 현대연극의 예언자 아르토는 그의 새로운 연극론을 희곡 텍스트의 절대성을 거부하는 것으로 출발했다. 그는 텍스트를 신성화시키는 일은 “바보의 연극, 광인의 연극”일 뿐더러 “가짜 지적인 태도”이고 “텍스트를 정태화”시키며 “연극을 황폐화”시키는 태도라고 비난하기 시작한다. 로버트 윌스는 미국의 6, 70년대의 ‘새로운 연극’의 첫번째 특성이 텍스트의 해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진리의 불변성에 저항하는 오늘의 연극은 대체로 희곡에 담긴 원래의 내용보다는 그 공연적 전달의 해체적 방식과 새로운 의미생산에 흥미를 느낀다. 이런 현대연극에서자기완결적이며 정태적인 의미의 ‘희곡작품’은 해석을 기다리는 ‘텍스트’로 변하게 되는데 롤랑 바르트는 희곡(work)과 텍스트(text)를 구분하면서 희곡작품이란 책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한 대상물이라면텍스트란 공연에 의해서만 체험될 수 있는 방법론적 분야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텍스트의 영역과 상연의 영역을 명백히 구분하는 일은 필수적’이 된다. 베르나르 도르트에 의하면 “연극 공연은 텍스트와 무대 사이에서 발생하는 초긴장의 현장”이며 ‘공연은 어떤 합의가 아니라 일종의 투쟁’인 것이다.
그러나 희곡 텍스트와 공연텍스트의 분리라는 현대 서구 연극의 기본적 전제의 다른 한 켠에서 서구의 실험적 연극을 중심으로 소위 작가 겸 연출가(author-director)의 존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즉 연출가가 공연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희곡 텍스트를 부분적으로, 혹은 전면적으로 재창작하거나 무대를 통해서 보다 강력한 ‘글쓰기’를 시도하는 작가적 성격을 띄게 되는 것이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연출자의 위치와 기능이 확대되면서 이들은 자연히 희곡의 영역에도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한다. 막스 라인하르트 같은 20세기 초기의 연출가들이 기존의 희곡에 내재된 요소들을 표출시키면서 자신의 연출적 해석과 형상화를 부가하기 시작했다면 메이어홀드는 원전에 대한 적극적인 번안과 개작을 시도했다. 그로토프스키는 자신의 연출작업을 텍스트와의 만남으로 간주하면서 텍스트를 과격하게 변형시키는 텍스트의 몽타주화 작업을 꾀했으며 퍼포먼스 그룹의 리차드 셰크너나 리빙 디어터의 쥴리앙 베크 부부도 비슷한 방법론을 더 극단적으로 사용했다. 피터 브룩이나 아리안느 므누쉬킨은 텍스트 자체를 개작한다기 보다 자신들의 연출적 해석으로 강력한 무대적 글쓰기를 시도한 경우이고 6, 70년대 미국의 신형식주의 연극인 로버트 윌슨 등은 대본작업에서부터 강하게 공연창작에 개입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처럼 연출가로서 작가적 기능이 강화된 작가겸 연출가의 ‘무대적 글쓰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막스 라인하르트나 피터 브룩이나 아리안느 므누쉬킨 처럼 창조적인 공연 텍스트를 만들되 비교적 종래의 연출적 범주에 머무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퍼포먼스성 짙은 실험극이나 초기의 로버트 윌슨처럼 연출가가 작가로서 공연 대본 자체를 구성하거나 혹은 집단창작의 형식을 빌어 공연대본이 매우 약화된 경우이다.
므누쉬킨의 연출 작업은 배우들과의 공동창작을 중시하지만 대본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녀가 사용하는 대본은 각색자에게 소설의 각색을 부탁하는 경우도 있고 셰익스피어 등 고전희곡을 각색하기도 하며 엘렌 식수와 같은 극작가의 신작 등을 토대로 이루어지는데 므누쉬킨 자신이 대본작업 자체에 깊이 개입하는 경우는 드물다. 피터 브룩 역시-70년대의 인류학적 연극작업을 제외하면-기존의 고전 희곡에 의거해 절충적 스타일의 독특한 무대적 글쓰기를 해왔다. 그는《리어왕》,《한여름밤의 꿈》,《템페스트》 등 셰익스피어의 기존의 희곡을 무대화했는데 원작희곡을 여러 방향에서의 해석이 가능한 다면체로 파악하면서 존중했다. 한편 신형식주의나 이미지 연극 계열인 리 브루어나 리차드 포먼, 혹은 로버트 윌슨 들은 ‘오뛔르(auteur)’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그림이나 부호, 사진, 만화 등의 비언어적 방법을 사용해 아예 대본작업부터 작가-연출자로서의 작업을 수행한다.
지금 살펴보았듯이 서구의 경우 희곡 텍스트와 공연 텍스트간의 구별은 원칙적으로 엄격하다. 웬만한 진보적인 연출가들의 무대적 글쓰기도 타인의 희곡텍스트로부터 출발한다. 연출가가 구체적으로 대본 작업을 통한 작가적 기능을 수행하는 경우는 일부 실험극에서 보듯이 예외적인데 그럴 경우 연기자의 즉흥연기나 관객과의 교류 등을 염두에 두거나, 혹은 아예 언어가 아닌 비희곡적인 시청각적 발상에서부터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근래 한국 연극계의 경우는 또 다르다. 우리의 경우는 상당한 문학성을 지닌 희곡과 공연이 일체화된다는 데 그 특성이 있다. 작가가 희곡으로서의 독자성을 염두에 두면서 전통적 희곡에 가까운 형태의 희곡을 완성시키고 또 작가 스스로 그 희곡의 연출을 겸한다는 뜻이다. 오태석, 이윤택, 김광림, 조광화 이 대부분의 작가-연출가가 이에 속한다. 이 경우 연출가가 자신을 쓴 희곡을 독자적 가치를 지닌 희곡작품으로생각하느냐, 하나의 공연적 대본으로 보느냐가 미묘한 문제다.
이들의 희곡은 어쩔 수 없이 무대 만들기를 의식하며 씌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작가는 희곡쓰기로 출발한다기 보다 머리 속에 무대를 동시에, 혹은 먼저 상상하게되고 따라서 그 희곡은 어느 정도 공연을 위한 메모나 공연대본의 성격을 띄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는 그들의 희곡은 공연을 향한 제안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공연의 부속적 위치로부터 출발하는 셈이 된다. 연출가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희곡이 아니라 연출적 사고에 의해 희곡의 상상력을 제한받는 그런 희곡이 되는 것이다. 이들 희곡이 연출되었을 때 공연은 희곡과 공연 사이에 거리가 없다. 공연은 희곡을 일 대 일로 뒤덮는다. 여기서 연출은 타자없는 전능한 작업을 수행한다. 그의 무대만들기는희곡의 사이사이에 숨겨진 부재하는 의미를 읽어내고 존재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 대 일로 단순재현하는 동어반복이다.
만일 그들의 공연으로부터 희곡의 형해를 추론해 들어갈 때 그 희곡으로부터 객관적인 완성도를 찾기는 힘들다. 만일 희곡의 형체를 추려낼 수 있다 하더라도 그 희곡은 희곡으로서의 온전한 가치를 발휘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것은 자신만의 공연을 위한 대본이며 또 다른 연출가가 발견해 낼 다성적 의미들을 품고 있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태석의 경우 “희곡을 쓰되 그것을 자신이 연출한다는 가정 하에 쓰기 때문에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혹은 하기 어려운 상당부분을 약간의 암시 외에는 쓰지 않는” 까닭에 그의 희곡은 연출이라는 타자를 위한 부분이 없다. 94년 오태석 연극제에 관련되어 제기된 몇가지 이슈는 이와 관련해 의미심장하다. 우선 그의 기존 작품들을 다른 연출가들로 하여금 공연하게 한 기획 자체가 오태석의 작품은 “그 이외에는 누구도 연출할 수 없다는 통설”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며 그 결과 다른 연출가의 연출작업을 폄하하는 일부 비평에 대해 이윤택, 김철리들이 거세게 반항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윤택은 “오태석 희곡은 오태석 본인이 연출해야한다면 오태석 희곡은 객관적 문학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오태석 개인의 연출을 위한 공연 대본적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라고 불만을 표시한 바 있다.
자신이 쓴 희곡을 자신이 연출하는 경우를 서구 연극적 모델의 소통체계라는 관점으로 볼 때, 작가-연출가들은 하나의 희곡으로도 완성된 텍스트를 만들고 또 객관적 입장에서 그 텍스트에 기반해 공연을 만든다는 그런 불가능에 가까운 작업을 해야 한다. 만일 자신이 쓴 희곡은 자신만이 가장 잘 만들고 잘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서구 현대극의 관점에서의 희곡과 연극의 존재방식 자체를 거부하는 일이 될 것이며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은 또 다른 대안적 예술 장르로서 존재해야 할지 모른다.
반면 작가-연출가 겸직이 만든 무대는 실제로 좋은 결과를 손에 쥐어 주는 것도 사실이다. 이 연출자는 자신이 쓴 희곡의 내포된 의미를 가장 잘 알고있는 연출가중의 하나임에 틀림없을 것이며 희곡을 쓰며 상상했던 무대그림을 재현하기에 가장 적임자중의 한 명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작가-연출가는 극작능력 못지 않게 풍부한 무대적 상상력을 갖춘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무대는 공연적 아이디어와 개성으로 넘친다. 비록 스스로의 안에서 재현된 반복이지만 무대는 희곡과 밀착해 준비된 아이디어들로 부산하다. 니시도오 코오진 같은 일본의 연극평론가는 아르토 이후의 시대는 극작가가 동시에 연출가를 겸하는 극작가/연출가의 존재를 요청한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텍스트의 생산과 검증이 배우의 연기창조 공간에서 동시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오태석이나 박근형의 작가-연출가 겸업작업은 상당부분 그들 나름의 순발력과 즉흥성 등이 큰 작용을 하게된다. 자신이 소위 ‘북치고 장구친다’고 할 수 있는 이들 작가-연출가들은 공연 자체가 지닌 일회성과 우연성에 몸을 맡기게 되는데 그 결과 공연이 끝나는 날까지 희곡과 공연을 계속 고쳐나가는 기현상도 벌어지는 것이다. 공연은 치밀하게 계획된 기호화의 작업이라기 보다 생성과 즉흥성의 흐름을 타는 과정으로서의퍼포먼스적 성격을 띄게되는 셈이다. 즉 공연을 만들면서 수시로 자신이 쓴 희곡으로부터이탈하고 배신함으로써 희곡을 공연텍스트화하며 이 과정에서 기존의 희곡-공연 사이의 거리가 아닌 또 다른 성격의 거리를 창출한다. 서구적 의미의 텍스트-공연, 작가-연출가 사이의 거리는 없지만 일체화한 작가-연출가의 작업 안에서, 자기 자신 안에서 스스로 수시로 거리와 빈틈들을 만들어 가는 형국이며 이 과정에서 공연자들 역시 그 나름의 독자적 공연성을 발휘할 기회를 엿볼 수 있으며 관객들 역시 이 틈새들을 비집고 들어간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희곡 텍스트와 공연과의 관계는 서구연극의 중심된 요소이다. 이런 서구 연극의 개념에 비추어보아 우리 연극계는 파행적인 작업형태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 극계에서 파행적인 양상으로나마 작가-연출 겸업이 성행하며, 희곡을 포기하기 못하는 채 한편으로 이미 포기하는 과도기성의 이면에는 빈약한 희곡의 전통 속의 우리 민족의 기질이나 동양적 가치관이 숨어있지 않나 생각한다. 우리의 연극사가 희곡문학의 전통이 없이 탈춤과 판소리라는 구비전승과 행위로 존재했듯이 문자라는 고정된 장치에 가치를 두지 않은 채 직접 행위로, 생성과 변화와 소멸이라는 공연성의 세계로 뛰어든 한국인, 혹은 비서구인적 기질이 오늘날에도 다시 발현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이러한 작가-연출가의 문제는 현재로서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들을 안고 있다.

[자료출처: 연극과 인간, 21세기를 여는 연극 몸·퍼포먼스·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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