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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과 인간 5] 희곡의 위기, 희곡의 존재방식 - 희곡의 위기와 그 징후들

 

[아래는 김방옥의 연극론집 ‘21세기를 여는 연극 몸·퍼포먼스·해체’를 일부 연재한 것이다. 기획연재 ‘연극과 인간’은 김방옥의 연극론집을 통해서 한국 연극의 발전을 도모하고 나아가 전반적인 한국 공연문화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해보고자 함이다.]

빈약한 전통과 희곡형식의 와해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의 희곡계는 분명 위기에 처해있다. 그런데 이런 한국연극의 위기는 근래에 들어 두 가지의 외적 변화나 사건에 의해 잘 반증될 수 있다. 하나는 한국 현대희곡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민국 연극제의 변화요, 또 하나는 한국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한 작가를 둘러싼 논란이다.

1. 대한민국 연극제의 변화
한국 연극계에서 희곡의 위상의 변화는 무엇보다 서울 연극제를 통해 가장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77년에 시작된 대한민국 연극제는 주지하다시피 우리 희곡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해왔다. 이강백이 지적했듯이 7~80년대 당시 해마다 무려 10편 가까운 신작 창작극이 공연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한국 희곡계의 발전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출범 당시 연극제의 일차적 목표는 창작극 지원이었고 희곡심사를 거친 여덟 편의 신작 희곡이 진흥원의 지원금을 받아 공연될 기회를 얻었다. 물론 개중에는 무대적 해석과 형상화가 돋보인 공연들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많은 경우 희곡의 확보는 곧 공연 자체를 의미했고 그런 의미에서 희곡은 즉 연극이었다.

그러나 제한된 작가의 작품이 제한된 극단에 의해 공연되고 예선에 통과된 희곡을 무성의하게 올리는 극단의 예가 늘어나면서 희곡과 공연의 질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특히 90년대에 들어서 희곡이 내포한 공연의 가능성과 연극에 있어서의 공연의 비중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 따라서 희곡만을 대상으로 연극제 참여작을 선정하는 심사제도에 대한 문제점들이 제기되었고 그 결과 11회부터 일부가 실연심사로 바뀌었다. 백현미는 이에 관해 이전까지의 연극제가 희곡을 연극의 최종심급으로 삼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점, 연극성의 확장이라는 현대적 경향을 수렴하지 못한 채 문학지향적인 연극만을 편애하는 발상이라는 점등을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연극계에서도 더 이상 희곡이 연극의 이니시어티브를 쥔 주인공이 아니라는 점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후로 뮤지컬과 번역극도 참여작품에 포함되게 되고 실연심사의 비중이 더 늘어나면서 ‘절대적 희곡’, ‘순수한 희곡’의 위상은 점점 더 위축되게 되었다. 희곡보다는 공연의 측면에서 작품을 평가하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경연대회형식에서 축제방식으로 전환되면서 희곡 부문상이 없어지기도 했다. 요컨대 서울연극제의 변화는 희곡 자체에 대한 관심이 축소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2. 작가 이강백을 둘러싼 논란들-희곡과 연출의 불협화음
이와 함께 변해가는 희곡의 의미를 대변하는 상징적 사건으로 극작가 이강백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을 들 수 있다. 이강백은 70년대 초 데뷔한 이래 독특한 알레고리 스타일을 고수하며 삼십편이 넘는 희곡을 발표해왔으며 대한민국 연극제 및 서울연극제의 최다 참여 극작가의 한 명이기도 하다. 희곡의 위기가 거론되는 근래의 상황에서 그에 관해 관심이 모아지는 것은 일견 당연하다. 그는 대표적인 현역 극작가로서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활발히 작업하고 있는 유일한 ‘전업 극작가’일 뿐 아니라 평소 문학적 희곡을 고수할 마지막 지킴이로 자부해왔기 때문이다.

1998년은 이강백에게 있어서 최상의 해이자 또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줄 계기에 접한 해이기도 했다. 그는 이 해에《느낌, 극락같은》(이강백 작, 이윤택 연출)으로 서울 연극제 작품상, 희곡상, 연출상 등 5개 분야에 걸쳐 수상했을 뿐 아니라 예술의 전당이 주최하는 ‘오늘의 작가 시리즈’에 오태석, 최인훈에 이어 선정되는 영광을 얻었다. 그런데 그는 이 과정에서 두 가지의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질문들과 마주치게 된다. 하나는 그의 희곡의 ‘닫혀있음’에 관한 지적이고, 또 하나는 희곡과 연출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갈등이다.
이강백의 희곡은 다양한 관념적 소재와 마르지 않는 상상력과 정교한 계산에도 불구하고 근래들어 답답하고 고루하다는 느낌을 주어왔다. 이는 아마도 그의 희곡이 변했다기 보다 변하지 않는 그의 희곡에 대해 세상의 반응이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을 설명하고 설교하려는 과욕 때문에 의미가 닫혀져버린 알레고리, 그리고 지나치게 친절한 무대지시문들은 언젠가부터 연출과 관객의 상상적 참여를 제한한다는 느낌을 주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김미도는 “작가는 자신이 설정해 놓은 풍부한 연극적 장치들을 다시 지나친 설명적 언설로 폐쇄시킨다”고 분석하고 있다. 안치운은 이강백의 이런 경향을 연극성이 희곡보다 우위를 점하게 된 시기의 희곡이 느끼는 상실감, 즉 ‘허무주의’로 파악하면서 이강백 희곡의 허무주의는 “작가가 강조하는 진리, 정보의 지나친 노출, 연극성을 위한 무대장치나 오브제의 표상성이 강조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느낌, 극락같은》은 제작발표 당시부터 극작과 연출가 사이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주목을 끌기도 했다. 연출가가 작가의 희곡의 관념성을 비난하고 그 일부를 임의로 변경했다는 점, 그리고 연출의 작업이 희곡을 넘어서는 성과를 올렸는가의 여부가 화제가 되었다.《느낌, 극락같은》에서 이윤택의 연출은 내용 대 형식이라는 관념성이 짙은 원작을 육체화한 부처로 형상화시켰으며 당시 이에 대해 여러 이견들이 있었다. 한상철은 “시각적 현상을 아무리 잘 표현한다고 해도 표현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 보상하고 한걸음 더 승화할 수 있었는데…” 라고 아쉬움을 표현했으며 필자는 ‘원작의 관념적 이원론을 비집고 나온 육체성’이 공연에 생동감을 부여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여기서 이 작품에 관한 당시의 작가-연출가의 관계를 다시 추적하거나 작품 자체를 다시 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느낌, …》의 경우는 우선 이강백과 이윤택이라는, 각각 문학적 희곡과 무대적 연출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의 만남이었고 그 작품적 성과가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건이 문학적 희곡의 고수자로서의 이강백의 입장과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대한 관심과 함께 희곡과 연출 사이의 함수관계의 상징적 표출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증폭되었다(이강백의 최근작인《오, 맙소사!》 프로그램에 실린 글(󰡔주간조선󰡕, 2000년 8월 3일자 “신용관의 작가탐험”을 수록한 것임)에 의하면 이강백은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손오공이 날아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놀듯 연출자가 장면을 바꾸거나 심지어 더 써넣기까지 하더라도 결국 공연은 희곡 내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나 희곡 자체를 꽉꽉 채우면 안됩니다. 연출가나 배우의 영역을 남겨놓아야지요… 바퀴살 없이 통짜로 만들었다고 수레가 가볍게 굴러갈 리 없고, 배도 빈곳을 둬야 잘 떠다니듯 희곡도 그래야 합니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오늘의 연극에서 희곡과 연출의 부딪침과 화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점이며 다만 그것이 어떤 만남이고 충돌이며 화해인가 하는 점이다. 사실 연출이 작가와 상의없이 희곡을 가감하거나 훼손하는 일은 그동안 빈번히 발생함으로써 항상 논쟁의 여지를 안고 있다. 훼손인가 재창작인가? 작가가 리허설에 참석할 수 있는가, 작가는 연출가의 작품수정 요구를 들어줄 의무가 있는가, 연출가는 작가의 동의없이 작품의 일부를 잘라내거나 심지어 덧붙여 쓸 수 있는가, 특히 초연의 경우 작가의 창작의도로부터 얼마나 이탈할 수 있는가 등등의 의문들에 대해서는 그 대답을 구하려는 노력이 아직 충분히 경주되지 못했다.

실제로 희곡의 위상이 약화되기 시작한 90년대 이후 최근 많은 희곡작가들이 연출가에 의한 일방적인 희곡훼손에 대해 울분을 터뜨리고 있다. 한 희곡작가에 의하면 그것은 “작품이 연출가가 원하는 모습으로 성형수술 당하고 필요한 부위만 적출되거나 살육되고, 상업주의라는 돼지의 심장이 강제로 이식되고 하는 식의 유린”에 대한 공포요 분노다.
외국의 경우에도 작가와 연출가 사이에 비슷한 분쟁이 일어나는데 작가의 저작권법이 잘 보장되어있는 외국의 경우 대체로 법은 극작가에게 유리한 것 같다. 근래에 아더 밀러가 자신의 희곡《시련》의 일부를 공연의 맥락에 맞게 임의적으로 차용한 우스터 그룹을 소송해 승소한 예는 잘 알려져 있다. 베케트 역시 자신의《게임의 끝》의 배경을 지하철역으로 바꿔 공연하려한 죠안 아크레티스에게 소송을 걸어 공연금지시켰다. 원칙적으로 연출적 해석이 원작으로부터 상상적으로 도약하는 것은 현대 연극의 피치 못할 한 경향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런 경향은 동시에 어떤 기준으로 희곡작가의 저작의 고유성을 보호해줄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자료출처: 연극과 인간, 21세기를 여는 연극 몸·퍼포먼스·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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