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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정의 타임캡슐 2] 우리나라에서 현대무용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Ⅰ

 

1899년을 시작으로 주한 외국 공사관의 무도회나 음악회 등에서 이루어진 외국 무용수의 발레와 민속무용 공연은 꾸준히 있어왔다. 하지만 정식으로 무용만을 위한 무대 위에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표출하여 우리나라 지식인과 예술인들에게 깊은 각인을 심어준 예술로서의 현대무용은 언제 시작된 것일까.
우리나라 근대 무용사를 기웃거려 본적이 있는 독자라면 이쯤에서 눈치 챘을지 모르겠다. 그렇다. 한국 무용사에서 빼놓을 없는 이름, ‘이시이 바쿠의 1926년 내한 공연’이다. 좀 전에 이미 감 잡은 독자들은 혹 “또 이시이 바쿠야?”라며 진부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시이 바쿠를 또 언급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한국에 현대무용을 들여왔기 때문이다. 이시이 바쿠는 1926년부터 1929년까지 4년 동안 4번에 걸친 대대적인 내한공연을 하였으며, 이는 당시 시대상과 맞물려 우리나라의 특수한 배경 설명이 조금 필요하겠다.

이시이 바쿠의 공연이 이루어지기까지
일본은 1910년 한반도를 강점한 후 10년이 채 못 되어 3·1운동(1919)이 일어나자 식민지에 대한 무단통치에 한계를 느껴 민족분열정책을 위한 문화정치로 방향을 선회한다. 문화주의를 표방한 문화정치를 통해 일본은 한반도에 새 친일파 양성정책을 폈고, 이에 부응해 3·1운동 직후 부임한 총독 사이토오(1858·1926)는 ‘조선 민족운동에 대한 대책’을 구상하면서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친일파 양성책을 고안했다.

《첫째, 일본에게 절대 충성을 다하는 자로써 관리(官吏)를 강화한다.
둘째, 신명(身命)을 바칠 친일적 인물을 물색하고 이들을 귀족·양반·유생·부호·실업가·교육가·종교가들에게 침투시켜 친일 단체를 만든다.
셋째, 각종 종교단체에서 친일파가 최고 지도자가 되게 하고 일본인을 고문으로 얹혀 어용화 한다.
넷째, 친일적 민간인에게 편의와 원조를 제공하고 수재교육의 이름 아래 지식인을 대량으로 장기적 안목에서 양성한다.
다섯째, 양반·유생으로 직업이 없는 자에게 생활방도를 만들어주고 이들을 선전과 민정정찰에 이용한다.
여섯째, 조선인 부호에게는 노동쟁의·소작쟁의를 통해 노동자·농민과의 대립을 인식시키고 또 일본자본을 도입해 그것과 연계를 맺도록 매판화시켜 일본측에 끌어들인다.
일곱째, 농민을 통제 조종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 유지가 이끄는 친일단체 교풍회(矯風會)·진흥회(振興會)를 만들어 국유림의 일부를 불하(拂下)해주는 한편 입회권(入會權, 수목채취권)을 주어 회유 이용한다.》

사이토오의 구상은 어느 정도 성공했고 이렇게 양성된 친일파들은 문화계·종교계·경제계 등 각계각층으로 파고들어 친일세력을 확장시키는 한편 종교운동·수양운동·사교운동·생활개선운동·농촌계몽운동 등을 적극 장려하며 국내 민족운동의 열기를 정치운동에서 문화운동으로 점차 전환시켜나갔다

춤에서도 1900년대 초에는 무도외교를 위해 몇 건의 무도회에서만 외래춤이 선보였지만 이후 1920년부터 31년까지는 15건으로 외래춤 공연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가, 일제가 세계경제공황의 여파로 궁지에 몰리자 독점자본주의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대륙침략을 본격화하면서 다시 열기가 시들해졌다.
외래춤은 문화정치에 힘입어 무도회·음악회 등이 행사에 공연되기도 하고 영화 상영회의 막간에도 출연하면서 공연되었다. 각국의 민속무용이 공연되기도 하였지만 주로 일본을 통한 민속무용·발레, 일본에 망명한 러시아 무용수들에 의한 민속무용·발레가 이루어져 당시 우리나라에서 행해졌던 외래춤들은 대부분 일본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926년 이시이 바쿠의 경성공회당 공연은 일본 문화정치의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
이시이 바쿠 공연의 주최자는 매일신보였는데 이 신문은 1904년 7월 18일 영국인 베셀(Ernes Thomas Bethell)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일제가 사들여 국권침탈 직후인 1910년 8월 30일부터 ‘대한’ 두 자를 떼고 『매일신보(每日申報)』로 개제한 것이다. 1920년대 초 까지 유일한 한국어 일간지였던 『매일신보(每日申報)』는 일어판 기관지인 『경성일보(京城日報)』에 통합되어 『경성일보』의 일본인 사장과 편집국장의 관리 하에 일제의 한국 통치를 합리화하고,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는 논조로 발간되는 신문이었다.
일본정부의 한반도를 문화적으로도 식민지화하려는 정책, 그리고 그것에 동조하는 매일신보의 후원으로 이시이 바쿠는 경성공회당이라는 일급 무대에서 단독으로 무용공연을 하였고 한국인 제자들을 받아들였다. 이시이 바쿠의 공연은 그러나 일본의 정치적 의도가 다분한 공연이었다고 볼 수 있다.


글_황희정 jutte96@dreamwiz.com
사진_내한공연을 앞둔 현대무용계의 살아있는 전설, 피나바우쉬 (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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