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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의 '화장실'을 통한 ' 자아' 들여다보기

 

Ⅰ.

어찌나 높이 솟아 있는지
서울이 싫어 죽을 지경인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는 밤하늘의 침을 받을 수 있는 집
나는 한밤중 일어나 먹구름 속에 숨은 초승달 같은
두 눈을 번쩍 뜨고 화장실부터 간다
당연히 공중 높이 치솟은 화장실
그 높은 배관 위에 걸터앉아 나는 생각한다
오늘은 내 시집이 출간된 날
일평생 나를 빨아먹은 내 시들
레버를 당겨 시가 왔던 그곳으로
이름없는 것들 우글대는 그곳으로
흩어 보낼 수 있다면

나는 산속에서 길 잃은 사람처럼
구름들이 쏟아붓는 분노를 받고 싶다
높디높은 하늘에서 내려오느라 얼어붙은 침들을 목덜미에 맞고 싶다

엊저녁 잠들기 전 흘린 눈물은 어디로 갔는가
작년 이맘때 내 온몸을 휘감던 빗물은 어디로 갔는가
저녁마다 발톱 끝까지 감전시키던 두통은 어디로 갔는가

저 아래 지붕들마다 올려진 물탱그들이
밀봉된 우물처럼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

서울의 벼랑에 매달려 나는 몸을 씻는다
세척 솔을 들어 말끔히 몸속도 닦고 싶다
빨래처럼 스카이라인에 걸려 흔들리는 집에 산다는 것
시집 출간일의 화장실도 부르르 떨고
높이 솟은 배관들도 덩달아 부르르 떨고
이름 붙인 자의 이름은 여전히 더럽다

몸을 다 씻고 나오자 베란다 창밖엔
말을 배우기 이전의 내 혀가
침을 줄줄 흘리며 붙어 있다
내게 전해줄 슬픈 말을 평생 참은 것처럼



Ⅱ.
‘자아’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와 이영애의 ‘너나 잘 하세요’에서 ‘자아’는 본질의 규명에서 커뮤니케이션의 관계성의 코드로 진화되었다. 현대문명은 양방향성과 그 속도의 표현수단이 너무 빨라 관계성 속에 ‘자아’가 역류하고 있다. 우주의 미아처럼 사이버와 미디어의 가상 속에 입구는 있되 출구가 없는 정체성의 블랙홀이 형성되고 있다. 사회적 문제가 되는 이은주와 유니의 자살 또한 ‘자아’ 혼돈를 극복하지 못한 결과이다.
김혜순의 ‘자아’ 들여다보기는 그 본질과 행위를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자아의 은밀한 공간인 화장실을 통하여 ‘자아 배설과 씻음’을 가혹할 정도로 행위 하면서 ‘이름없는 것들 우글대는 그곳으로 흩어 보낼 수 있다면‘라는 구절을 통해 근원으로 돌려놓기를 한다. ’자아‘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우주의 정글처럼 은유적으로 흔적은 있되 알 수는 근원지가 자아의 근원 공간이다. 그곳을 향해 나아감은 그곳을 향한 열정과 바로보기 일 것이다. 바라보는 행위 자체가 곧 근원으로 여행이다. ’잠들기 전 흘린 눈물은 어디로 갔는가, 작년 이맘때 내 온몸을 휘감던 빗물은 어디로 갔는가. 저녁마다 발톱 끝까지 감전시키던 두통은 어디로 갔는가’ 를 통한 자아 고통을 견디며 근원으로의 순례자의 모습에 우리의 ‘자아 바로보기’ 자세를 제시해 준다. ‘자아’ 찾기를 하면 ‘자아’가 찾아지는가? 영원하지는 않지만 어디 정도 ‘씻김’은 있을 것이다. ‘말을 배우기 이전의 내 혀가 침을 줄줄 흘리며 붙어 있다 내게 전해줄 슬픈 말을 평생 참은 것처럼’, 어쨌든 김혜순 시인은 혹독한 자기 반성을 통한 ‘자아 씻음’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자아’는 엉킨 실타래처럼 풀였다 꼬였다를 반복한다. 풀렸을 때는 문제가 없지만 꼬였을 때는 심각하다. ‘자아’의 관계가 복합하고 구조 속에서 방향 찾기도 쉽지 않는 현대 사회에 그래도 고전적인 방법인 혹독한 자기 반성과 근원 들여다보기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것이다.


편집부 sugun11@korea.com



※ 비엠뉴스가(Bmnews)가 뉴스테이지(Newstage)로 2007년 7월 23일 개편되었습니다. 본 기사는 비엠뉴스(Bmnews)의 2007년 1월 2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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