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주의 희곡은 매력 있다. 왕가와 귀족이 등장하는 거대한 스케일도 없고, 아무때나 요정이 등장하는 자유분방한 상상력도 없지만 사실주의 희곡만의 날카로운 매력이 있다. 

이 장르는 유럽에서 봉건제도가 붕괴하고 소시민사회가 형성될 즈음 발전했다. 영웅이 아닌 서민을 주인공으로 그들의 삶을 그대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묘사’하는 과정에서 우연과 과장이 축소됐고, 시적인 대사는 산문형이 됐으며 무대지시는 구체화됐다.

이 장르의 작품들은 삶의 단면들을 사실적으로 날카롭게 포착해낸다. 인과관계도 정밀하고 견고하게 설정한다. 그 안에 응축된 감정선, 쌓여진 연결고리를 밟아가는 것이 사실주의 희곡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주의 희곡을 쓸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은 평범한 주인공의 삶에 보편적인 ‘인간’을 불어넣는 것이다. 자칫하면 한 작품이 한 개인의 에피소드로 끝나게 될 수 있다. 제대로 쓰여진 사실주의 작품은 평범한 주인공이 겪는 문제를 그 시대의 문제로, 등장인물의 감정을 전 인간의 감정으로 확대시킨다. 이 부분을 고민하는 극작가 지망생들에게 사실주의 작품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하고 미국 연극계 및 세계 연극사에 한 획을 그은 미국 3대 극작가와 그들의 대표작을 소개한다.

유진 오닐 ‘밤으로의 긴 여로’  

유진 오닐은 미국에서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극작가다. 퓰리처상은 네 번이나 수상했다. ‘밤으로의 긴 여로’는 유진 오닐 사후에 공개된 유작으로, 이 세상에 없는 유진 오닐에게 네 번째 퓰리처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작품은 늙은 배우인 아버지, 마약중독자 어머니, 알코올 중독자 형 제미, 병약하고 시인 기질을 가진 동생 에드먼드의 이야기이자 유진 오닐 그 자신의 이야기다. ‘밤으로의 긴 여로’ 등장인물들은 이름만 바꾼 그의 가족들이다.

그는 자신이 죽은 뒤 25년 동안 이 작품을 발표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당부는 비록 지켜지지 못했지만 이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인간의 보편적인 진실로 승화시킨 대표적인 예술 자품으로 평가받았다. 영화와 텔레비젼 극으로도 제작되며 지금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연극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언뜻 보면 병적인 가족들이 등장하는 ‘막장극’ 같지만, ‘밤으로의 긴 여로’는 통속극에 머물러 있던 미국 연극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하룻밤 동안 이 가족이 겪는 증오와 애정, 그리고 허무를 통해 가족과 인간을 들여다볼 수 있다.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아서 밀러는 1949년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뉴욕 연극 비평가상과 퓰리처상을 수상함으로써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극작가로 입지를 굳혔다. 이 작품은 2년 동안 742회나 공연됐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연극계 최고의 걸작’이라는 평을 받았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1930년대 대공황시절 뉴욕 브루클린의 평범한 세일즈맨인 윌리 로만이 실직 후 좌절과 방황 끝에 자살을 택하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윌리 로만이 나이를 먹어 더 이상 세일즈맨으로서의 입지가 없어 해고 당한 뒤 좌절과 방황 끝에 자살을 택하는 과정을 하루 동안의 이야기로 보여준다. 아서 밀러는 실제 대공황 시절 사업실패로 자살한 자신의 삼촌 매니뉴먼을 모델로 삼아 집필했다고 한다.

작품 속 윌리 로만의 일상은 여느 때와 같다. 그는 헛소리 비슷한 혼잣말을 하지만 나이를 먹은 후 나타난 습관 중 하나일 뿐이다. 아들과도 말다툼을 하지만 아들이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하게 된 뒤로 자주 벌어졌던 말다툼 중 하나다. 그러나 그 일상은 윌리 로만이 겪어온 좌절이었고 그는 끝내 파국으로 내달리게 된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윌리 로만과 그 가족들을 통해 한 인간의 인생에서 한 가정과 한 나라의 역사까지 관통하는 통찰을 보여준다. 아메리칸드림의 붕괴, 시대 변화에 따른 세대 갈등, 한 개인의 무너진 자존감 등을 외판원의 일상으로 보여주는 이 작품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번역돼 끊임없이 공연되고 있다. 

테네시 윌리엄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테네시 윌리엄스에게 첫 번째 퓰리처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가정폭력, 강간, 동성애 등 강한 성적 코드들로 강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비비안 리와 말론 브랜도 주연으로 영화화돼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기도 했다.

주인공 블랑쉬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 탄 뒤 ‘극락’이라는 마을에 내린다. 이 마을에는 동생 스텔라와 제부 스탠리가 살고 있다. 허언증과 신경성을 앓던 블랑쉬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거짓말 속에서 산다. 속물 스탠리는 블랑쉬의 거짓말을 그녀가 맘에 두고 있던 미치 앞에서 폭로해버리고 그녀를 범하기까지 한다. 결국 그녀는 ‘묘지’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인도된다.

막장드라마의 줄거리와 비슷하지만 그 안에는 자본주의 사회와 자본주의화된 인간들, 속물적 본성, 이기심, 무관심이 켜켜이 쌓여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몰락한 한 여자를 통해 사회와 인간의 본능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이고 심오한 작품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또 한 가지 매력은 테네시 윌리엄스의 서정적인 대사다. 많은 비평가들이 “미국의 극작가 중 그 어느 누구도 윌리엄스가 작품에서 구사한 대사에 나오는 서정주의적 필치를 따를 자가 없을 것”이라는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사실주의 속 깊게 밴 풍부한 서정성을 함께 느껴보는 것을 추천한다.

한국의 사실주의 희곡도 뛰어난 작품이 많다. 차범석 ‘산불’, 함세덕 ‘동승’, 채만식 ‘체향날’, 유치진 ‘소’ 등이다. 올 추석연휴 동서양 사실주의를 읽고 비교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유진 오닐 사진 출처_세계문학사 작은사전 

아서 밀러 사진 출처_U.S. State Department@Wikipedia

테네시 윌리엄스 사진 출처_Wikimedia Commons, Orland Fernandez 

이수현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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