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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소 칼럼]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절망에서 희망을 연결하려 공을 쏘다’

얼마 전 본 연극이 생각난다. 고난이 곧 축복이라고 말하던 그 연극을 보면서 우리 삶의 도처에 서식하는 이율배반성을 어떻게 인식하여야 되는가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삶을 고난이라고 느끼고 절망하는 순간 우린 반사적으로 그와 상반되는 희망을 꿈꾼다. 고난이라는 삶의 지옥 같은 터널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이룰 수 없는 그 애절한 아름다움 때문에 현실의 고난을 더 절절하게 격렬하게 느낄 수 있다. 대립된 이쪽에서 저쪽을 그리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비극적인 일상을 사실주의적이면서도 낭만적이게 그려내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우리 삶의 변주곡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개념의 서로 다른 이쪽과 저쪽의 세계가 자주 등장한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세상은 공부를 한 자와 못한 자로 엄격하게 나누어져 있었다.’. ‘우리가 학교 안에서 배운 것과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보호를 받고 있었다’ ‘지도자가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되면 인간의 고통을 잊어버리게 된다’, ‘영희가 팬지 꽃 두 송이를 공장 폐수 속에 던져 넣고 있었다.’가 그것인데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화해 불가능한 이율배반적인 두 세계는 서로의 극과 극에 서서 줄다리기를 한 채 단절되어 있다. 문제는 그 양립된 두 세계에의 단절로 일어나는 소통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소통의 부재는 여기 정상인이 아닌 난쟁이로 살아가는 난쟁이의 가족의 삶을 고난의 투쟁으로 내몰고 있다. 정상인이 아닌 장애인으로, 억압하는 자의 아래 놓인 억압받는 자로, 가진 자의 반대편에 놓여 있는 못가진자로, 희망의 반대편에 사는 고난의 삶의 주인공인 이들은 유일한 안식처이고 고통의 연속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집’이라는 공간에서 마저도 단절되어 사회 바깥으로 내몰린다. 소설은 극과 극의 충돌과 파탄으로 진행되는 비극적 절망을 통한 승화를 이야기한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70년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는 자본주의 논리 안에 잠식되어 70년대의 그것보다 더 은근하게 대립의 한 끝에 서서 항상 억압하고 있다. 부익부 빈익빈, 강대국과 제3세계,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지나간 것과 현재의 것의 충돌은 항상 존재 하고 있으나 우리가 그 대립의 극한의 끝에 서 있지 않아서 체감을 못하는 것일 뿐이다. 체감을 못한다는 것은 위험한 것인데 그것은 난장이와 그의 가족들이 그들과 대립하려 했던 사람들과 그렇게 하려했던 소통의 부재에 내가 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을 통해 이율배반이 가득한, 극과 극의 대립이 만연해 돌아가는 사회에서 방관하며 은폐하고 서 있는 내가 보여 씁쓸해진다. 그러나 한편으로 다행인 것은 방관자인 나를 발견하고 돌아올 미래에 난쟁이가 쏘아올린 그것과 비슷한 것을 쏘아 올릴 채비를 하고 있다는 것에 있다. 난쟁이도, 나도, 그리고 우리는... 비극의 절망에 서서 저 건너편에 기다리는 희망을 연결하려 공을 쏘아 올린다.


글 · 김 미소 · 키네틱국악그룹 옌 연출



※ 비엠뉴스가(Bmnews)가 뉴스테이지(Newstage)로 2007년 7월 23일 개편되었습니다. 본 기사는 비엠뉴스(Bmnews)의 2007년 4월 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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