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째, 무용이 관객과 나누는 몸의 대화라 한다면 지난 5일 M극장에서 공연된 기진령의 ‘내 그림자의 햇빛(Sunshine of my shadow)'은 침묵하고 있던 여성의 아킬레스건과 열 발가락부터 시선으로 거꾸로 올라가 말을 걸었다. 그것은 무용수가 처음 벗어놓은 하이힐에서 시작되었다.
둘째, 기진령의 ‘내 그림자의 햇빛’은 ‘떠오르는 안무가전Ⅱ’의 여덟 개의 공연 중 첫 포문을 연 무대였다. 작품은 마치 낡은 주간지 한 귀퉁이에 그려진 낱말퍼즐과도 같지만 그것은 정답이 적힌 퍼즐 칸이 제시된 뒤 질문의 의미를 새로 써야 하는 낯선 문제지 같았다.
관객에게 주어진 단어는 딱 여섯 개다. ‘여자’와 ‘하이힐’, ‘여자’와 ‘남자’, 그리고 제목의 ‘그림자’와 ‘햇빛’. 그리고 무용수들은 관객을 놀리듯 이렇게 춤추고 있었다. ‘자, 지금부터 이 단어의 의미를 적어봐.’
여자와 여자, 그리고 하이힐
정장을 입고 하이힐을 신던 무용수 앞에 빛으로 길이 그려졌다. 그녀가 높은 힐에 촘촘히 보석이 박힌 하이힐을 벗었을 때 특유의 냄새가 나는 듯했다. 여성들은 안다. 그 안에 갇힌 온갖 지저분한 냄새의 의미를.
마릴린 먼로가 그랬던가. “나를 성공의 길로 높이 올려준 것은 바로 하이힐이었다” 그러나 무대 위의 무용수는 조용히 하이힐을 벗는다. 그녀가 입고 있는 단정한 정장과 그 외에 그녀를 규정하는 많은 조건들, 심지어는 이름마저 무너지리라는 허무한 생각이 앞섰다. 그러나 그 허무는 곧 반 스타킹만 신은 채 무대를 자유롭게 누비는 여자의 춤으로 채워진다.
이제 그녀를 맨발이라 부르자. 맨발의 발은 편안해 지리라. 쉴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열 발가락이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이며 자신의 의지를 그대로 실혈할 것이다. 맨발의 동작에 맞춰 ‘I'm Free'라고 내뱉는 남자의 절절한 목소리가 주문처럼 반복되는 음악이 흐른다. 그런데로 의미전달이 되는 음악이다.
그런데 자유롭게 춤을 추고 있는 맨발을 향해 또 한 여자가 걸어 나간다. 객석에 앉아 있던 검고 단정한 정장 차림의 여성이다. 하이힐을 벗고 있는 여성의 주위를 모델이 워킹 하듯 딱딱한 발걸음으로 걷고 있는 이 앞만 보고 걷는 여성은 워킹걸이라 부르겠다.
워킹걸은 무대를 따라 걸으며 사각의 틀을 만들고 맨발은 그 안에서 자유롭게 춤을 춘다. 물론 워킹걸 또한 가끔씩 멈춰 서서 동요하곤 한다. 땀에 젖은 듯 초조해 보이는 표정으로 한쪽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타이트한 치마에 강하게 문지르곤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표정은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하고 오르가즘에 젖어 보이기도 하지만 결코 흐트러지거나 무너지지 않는다. 동작을 이행한 뒤 그녀는 다시 걷기를 반복한다.
두 여자의 관계와 제목을 연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진령의 ‘내 그림자의 햇빛’은 천천히 단어를 던져준 뒤 그 의미를 연결해 유추하게 하는 작품이다. 몸에 걸친 의상을 통해 일상적인 동작을 끌어내는 무용수들이 다음에는 또 어떤 단어들을 던져 주는지 눈으로 따라 가보기로 했다.
시선, 몸을 살덩이로 만드는.....
음악은 어느덧 주파수가 맞지 않는 라디오 소리로 바뀌었다. 차갑게 반복되는 기계음에 맞춰 두 여인은 반복적인 동작을 선보이고 이쯤에서 조명은 무대 한쪽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향한다. 드디어 ‘남자’라는 단어가 제시되었다.
남자에 대한 의미는 무심한 표정에 초점 없는 시선으로 앉아 거만하게 앉아서 여자를 관찰하고 있는 동작만으로 판단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그 남자의 시선은 그 자체만으로도 거리감이 느껴지게 만들었다. 남자가 어딜 보든 그의 시선은 깊은 상처를 남긴다. 게다가 이 남자, 정장차림의 맨발인데도 흐트러져 보이지 않는다. 하이힐을 벗은 뒤에도 미친 듯 춤을 추며 더 자유롭기를 갈망하는 맨발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이제 주어진 여섯 개의 단어를 통해 서서히 의미를 유추하고 그러다 보니 어느덧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남자는 반복적으로 워킹을 하고 있는 그 여자와 더 가까운 쪽이다. 무대 위의 셋은 모두 검은 정장차림이지만 이상하게도 그 남자와 아귀가 맞는 쪽은 바로 워킹걸이다. 하이힐와 재킷만 벗었을 뿐인데, 무대 한 가운데에서 춤을 추던 맨발은 어느새 그들로부터 궤도를 이탈해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춤만 추는 여자. 민소매 원피스 속에 두 팔을 넣고 휘젓는 동작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어딘가 그녀가 춤추고 있는 무대와 숨죽인 객석이 마치 어느 대기업 본사의 차가운 대리석바닥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그 춤을 만든 안무자의 과거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순전히 개인적인 호기심이었다. 그녀의 몸이, 그리고 그녀가 맞받아치고 있는 그 시선이, 분명 상처받아야만 홀로 설 수 있는 한 여성을 너무도 잘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맨발의 원피스 속에서 요동치는 그녀의 몸, 그건 신체가 아닌 살덩어리였다. 그리고 그 살덩어리들이 받았던 시선이 기형적인 신체가 되어 울퉁불퉁한 모양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춤추지 않고 절제된 동작만 보여주는 워킹걸의 몸 또한 상처마저 꾸역꾸역 넣어서 엉망이 되어버린 육신을 검은 정장 안에 숨기고 있을 듯했다. 그 둘은 하나인가? 아니면 각기 다른 개인들인가? 이야기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다만 두 여인의 상처라는 결론만이 보인다.
그러다 잠깐 하이힐을 벗던 워킹걸. 하지만 그녀는 다시 하이힐을 신고 남자의 주변을 배회하다 처음처럼 당당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무대 주변을 돈다. 때론 손바닥을 옷에 비비며......
어느덧 무대 위에는 뜨겁게 춤만 추던 맨발의 여인만이 남았다. 다시 시작되는 ‘I'm free'는 어딘지 역설적이다. 그리고 홀로 남은 맨발의 한쪽 스타킹은 벗겨져 있다. 그 또한 동작이 된다. 하이힐을 벗고 한쪽 스타킹을 벗는 동안 그녀는 정말 자유로워졌을까? 무엇으로부터?
이제 마지막 남은 단어, 즉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그림자’와 ‘햇빛’을 풀어야겠다. 어느 누구든 그림자와 햇빛이 있다면 햇빛을 따라 그림자를 보게 된다. 그러나 그 시선의 논리를 한번 뒤집어보자. 그림자에서 햇빛으로. 그런 뒤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보자. 그 전에 우선 던지고 싶은 질문이 있다. 당신의 그림자에서 햇빛이 보이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그림자의 자세를 취했는가? 그리고 햇빛 속엔 과연 무엇이 들어있는가? 아주 긴 이야기의 정답이어도 상관없다.
정효진 객원기자 dugongj@naver.com
[공연문화의 부드러운 외침 ⓒ 뉴스테이지 www.newstage.co.kr]
뉴스테이지
<저작권자 © 뉴스테이지,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평택아트센터 '조성진 피아노 리사이틀' 성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