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은 솔직합니다. 어떠한 의도도 없습니다. 다만 반응할 뿐입니다. 자신의 몸 전체와 세세한 구석 모두를 통제하고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등 뒤에서 혹은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표정과 손발조차 갑작스러운 변화, 즉 러시 한 가운데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런 우리의 몸은 하루 종일 세상에 대고 몇 마디의 언어를 내뱉을까요? 아마 우리는 그 언어의 99% 이상을 공허하게 흘려보내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흘려보낸 우리 몸의 언어를 모아 한 편의 시를 완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춤을 추고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지난 7일 아르코 대극장에서 김지원의 러시는 공연 내내 제가 잊고 있던 몸의 언어를 모아 한 편의 해체시를 들려주었습니다.
- 삼각형, 혹은 우리 머릿속의 가장 높은 산
어둠 속에서 맨발의 무용수가 관객석 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옵니다. 그 단순한 걸음걸이에도 관객은 숨죽여 어떤 의미를 찾아냅니다. 그러나 무용수는 음악이 없는 적막한 무대 바닥에 조명으로 그려진 삼각형의 한 변을 따라 걷기만 합니다. 뒤이어 그 무용수의 뒤를 쫓는 다른 무용수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천천히 걷고 있는 무용수를 추월해 조금 더 빠른 속도로 걷습니다. 그렇게 여섯 명의 무용수가 삼각형을 돌기 시작합니다.
이상하게 그들은 서로 마주칠 때도 시선을 맞추지 않고 부드럽게 몸을 옆으로 틀어 부딪치지 않고 걷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사람만 지나가면 몸을 낮춰 걷는 이도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잠시만....” 그의 동작을 통해 너무도 바쁘지만 결코 예의를 잊지 않는 한 지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멈추지 않는 그들의 걸음은 너무도 익숙해 망각하고 있던 그 무언가를 떠올리게 합니다. 북적대는 거리에서 다른 행인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우리의 일상적인 반응, 바로 지금 사람들로 북적이는 명동거리와 강남역 어딘가를 걷고 있을 당신의 몸입니다.
그렇다면 무용수들이 걷고 있는 곳이 왜 하필 삼각형인지, 그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머리 속의 물음표 하나가 제 몸속으로 쫙, 퍼지는 순간 문득, 눈앞에 산이 하나 그려집니다. 동네 뒷산이나 에베레스트 산과 같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산이 아닙니다. 모두들 성공에 대한 비유로 드는 매우 추상적인 ‘산’입니다. 오르는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꼭대기는 최후의 승자만이 살아남는 ‘우리 머릿속에서 가장 높은 산’ 말입니다.
무대 위의 삼각형은 높낮이가 없습니다. 다른 무용수보다 빠른 걸음으로 걷던 무용수가 삼각형을 한 바퀴 돌고나면 다시 자신이 추월했던 이의 뒤에 서게 됩니다. 목적지인 꼭짓점에 도달하지만 다시 몸을 돌려 다음 목적지를 향해 멈추지 말고 걸어야 합니다. 무대 위에 눕혀진 삼각형 어디가 꼭짓점이고 목적지라 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를 겁니다. 그들의 동작은 오늘도 둥글고 평평한 지구 위에서 높고 낮음을 재며 사는 50억의 군상을 닮았습니다.
순간 무대 위의 삼각형이 사라집니다. 아니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의 확장일 수도 있습니다. 안무가의 의도야 어찌됐든, 저에겐 객석까지 침범한 여러 개의 ‘확장된 삼각형’이 보였으니까요.
- 확장된 삼각형
애절하기도 하고 바람에 날리는 마른 풀을 연상케 하는 탱고 음악이 시작됩니다. 무용수들은 하나로 뭉쳐 무언가로부터 자연스럽게 날리고 흘러가는 동작을 선보입니다.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바람일까요, 아니면 목적지가 같은 그들 자신의 힘일까요? 그들은 흩어졌다 다시 모이기를 반복합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이물질처럼 혼자 삐걱 대는 남자가 있습니다. 숨이 가쁜 건지, 몸에 경련이 일어난 건지, 그 무용수는 거친 숨을 내쉬며 서서히 집단으로부터 분리되었고 무대에는 어느새 그만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A입니다. 물론 제가 지은 이름입니다. 신문기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표본들 중 하나인 이니셜 A씨. 어쩐지 그가 주인공은 아닌 듯합니다. 무작위로 선택된 익명의 누군가를 연상케 했으니까요. 그 수많은 무명씨들 중 누군가 그에게만 카메라를 들이대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이쯤에서 러시의 ‘확장된 삼각형’을 읽을 수 있습니다. 무용수들이 흩어지고 모이기를 반복하는 동작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영화에 비유하자면 세 가지 카메라 기법이 사용된 셈이죠. 카메라는 인공위성과 같은 위치에 있을 수도 있고 고층빌딩 꼭대기에 설치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거리 전체와 한 사람을 타깃으로 잡아낼 수 있는 사양이면 됩니다. 그리고 그 카메라는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의 눈입니다.
그 카메라가 집단의 일부만 비추다 삼각형이 사라진 순간 페이드아웃을 합니다. 이로써 카메라 렌즈가 줌 인을 해 여섯 무용수의 강렬한 군무가 표현하는 전체의 흐름을 보여줍니다. 그러다 갑자기 무작위로 무용수 A씨를 향해 카메라 렌즈를 빠르게, 들이댑니다. 무대 위에는 A한 사람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움직이게 만드는 장치가 등장합니다. 그의 몸은 그 장치에 따라 반응하고 그때마다 관객의 시선은 클로즈업 된 그의 몸에 집중합니다.
이제 관객들은 A씨의 몸짓을 통해 변화와 자극의 한 가운데에 놓인 자신의 몸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어떤 이들이 몰래 카메라로 들키고 싶지 않은 자신의 치부를 타인을 통해 발견하고 해소하는 것과 같습니다.
- 발레리나, 무용수, 관객으로의 확장
홀로 남은 남자 무용수의 앞에 이날 공연의 최대 볼거리 중 하나였던 설치작품이 등장합니다. 무대 천정까지 닿는 거대한 빨간색 박스 속에는 노란 불빛을 뒤로 하고 서 있는 발레리나가 있습니다. 은색 반짝이 옷을 입고 있는 발레리나는 그녀를 가로막는 노란 장막 안에서 춤을 추고 있죠. 이에 황홀한 표정으로 그 앞에 서 있는 남자 무용수도 따라서 춤을 춥니다. 푸른 요정을 그리던 피노키오처럼 남자는 완벽해 보이는 상자 속 여인이 되고자 발레리나와 같은 동작을 취합니다. 그 순간 무용수 A씨의 아픔이 제 몸에 전달되었습니다. 그건 빨간색 박스를 바라보고 있는 A씨가 서 있는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으로서의 각성입니다. 앞에서 제가 언급했던 ‘확장된 삼각형’이란 말이 이제 좀 설명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A씨, 그러니까 발레리나와 함께 춤을 추던 남자 무용수가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장막 때문에 괴로운 듯 갑자기 자신의 검은 옷을 쥐어뜯습니다. 지하철 전광판 속 화장품 광고 모델을 보며 그 상품을 소유하지 못했던 저, 그리고 그 모델처럼 아름답지 못했던 제 몸, 그래서 절망하며 다이어트 계획을 짜곤 했던 바로 제 자신이 떠오르더군요.
상자 속 발레리나처럼 우리를 자극하는 이미지는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특히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부속품처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이미지는 자극만 줄 뿐입니다. 어릴 때 티브이 브라운관에 두 눈을 바짝 대고 본 연예인의 이미지는 수많은 색의 입자로 이뤄져 있는 걸 보고 화들짝 놀라던 기억들이 있을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감각을 건드리는 이미지의 실체입니다.
설치작품이 퇴장한 뒤 무용수들이 다시 모여 춤을 춥니다. 그들은 다시 모인 수많은 무명씨들입니다. 그 안에는 다시 일상의 움직임으로 돌아간 A씨의 몸도 있습니다. 그들이 함께 모여 만든 강렬한 군무는 러시 한 가운데에 놓인 우리 삶의 한 단면과 그 속도를 끄집어냅니다. 각자 어떠한 자극 속에서 몸을 움직이든 어딘가 높고 먼 곳에서 본 그들의 움직임은 거대한 흐름을 넘어서 한 생명체와도 같습니다. 때문에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는 그들은 매 순간 서로를 자극하고 침묵 속에서도 끊임없이 몸의 언어를 주고받고 있습니다.
- 더 큰 메아리로 울릴 감각의 떨판
이날 공연은 순수 창작무용만으로도 충분히 관객과 소통할 수 있음을 보여준 뜻 깊은 무대였습니다. 대부분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젊은 무용수들의 춤은 너무도 젊고 강렬합니다. 커다란 무대를 꽉 채운 맨발의 무용수들의 표정은 자신감에 차 있고 동작의 선이 매우 큽니다. 그 힘은 춤의 기교가 아닌 바로 튀어 오를 것 같은 생명력입니다. 아마, 그들이 나이를 먹기 전,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다시 못 볼지도 모르는 젊음의 동작입니다.
팸플릿에 적힌 김지원의 소개 글에 ‘감각의 떨판’이란 말이 나옵니다. 그날 김지원의 러시를 통해 그런 떨판이 내게도 존재함을 확인했습니다. 평소 몸의 커뮤니케이션에 인색한 일반인에게 이처럼 몸의 언어로 주고받을 기회가 주어지는 것, 그게 바로 무용공연에 빠지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다만 무용수들의 몸이 내지르는 언어가 좀 더 크고 과감하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아직 중얼거림에 멈춰 있는 듯했으니까요. 스쳐 지나가는 타인의 몸과 부딪치지 않기 위해 애쓰는 평범한 몸이 속으로 내지르는 말과 같습니다. 좀 더 용기를 내 아주 먼 곳까지 메아리를 만들어내는 몸짓을 창조하는 건 어떨까요.
삼각형과 설치작품 등의 장치들도 조금 더 과감한 실험으로 이어지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각각의 소재는 훌륭했지만 그러한 장치들이 아직은 이음새가 헐렁한 조립식 조각과도 같았습니다. 거칠고 투박하더라도 좀 더 크고 과감한 무대가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규모의 확장은 볼거리의 화려함을 추구하는 게 아닙니다. 무용수들의 폭발하는 힘을 끌어내고 관객의 감각을 효과적으로 두드리기 위한 수식어와 같습니다.
객원기자 정효진 dugongj@naver.com
[공연문화의 부드러운 외침 ⓒ 뉴스테이지 www.newstage.co.kr]
뉴스테이지
<저작권자 © 뉴스테이지,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평택아트센터 '조성진 피아노 리사이틀' 성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