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20.3.28 토 14:04
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리뷰
[리뷰] 보고 싶었다! 71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춘향, 국립발레단 120회 정기 공연

 

잠시 첫눈 이야기. 당신은 첫눈을 기다리십니까? 이 세상의 인간은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 첫눈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 전자는 젊은이이고 후자는 늙은이입니다. 나이가 적고 많음이 젊음과 늙음의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눈은 비보다 훨씬 신비로운 모습으로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옵니다. 눈은 천상에서 태어난 전적으로 천상의 것입니다. 중세 시대 영주와 기사들은 사냥을 할 때 땅에 가까운 동물일수록 천하게 여겼고 하늘과 가까운 동물일수록 귀하게 여겼습니다. 개나 돼지는 하찮았고 하늘을 나는 새들은 귀하고 신성했습니다. 그 시대에는 하늘과 가깝다는 것은 더 신성하다는 의미였지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눈은 정말 신성한 것입니다.
눈은 똑같이 생긴 하얀 점들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각각 다 다른 기하학적 모양을 이루고 있어 꽃송이만큼 아름답습니다. 천상에서 내리는 희고 가볍고 신비로운 것들. 발레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처럼 천상적이고 신성하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그 눈을 기다리기도 하고 쳐다보기도 하고 그 눈을 뭉쳐 장난을 치기도 하고 그 눈이 녹는 것을 아쉬워하기도 합니다. 이번 국립발레단 120회 정기 공연은 특히 그랬습니다.
이번 국립발레단 120회 공연(10.31~11.3, 예술의전당 오페라 하우스)에서는 러시아 발레를 세계적인 발레로 끌어올린 안무가 미하일 포킨(Michel Fokine)의 작품 「레 실드(Les Sylphides)」「춘향-사랑의 시련(L'Epreuve d'Amour)」과 러시아 국민예술가 칭호를 받은 현대 발레의 거장 보리스 에이프만(Boris Eifman)이 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뉴욕시티발레단에 헌정한 작품인 「뮤자게트(Musagète)」가 함께 무대 위에 올랐습니다.

1 「레 실피드(Les Sylphides, 공기의 요정들)」
시적이고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숲속 공기의 요정들
태양이 할 일을 마치고 제 갈 길을 간 뒤, 이윽고 퇴락한 수도원의 불빛도 꺼지고, 달빛만 은은하게 빛나는 검은 밤입니다. 한 청년이 신비로운 달빛에 이끌려 오솔길을 따라 인적이 드문 숲속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쉿! 모두들 조용히 숨을 죽이고 숲속을 구경해보세요. 막이 올랐습니다. 무대의 첫 장면은 청년과 세 명의 공기의 요정들 주위로 여러 명의 공기의 요정들이 아름답게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곧이어 쇼팽의 음악에 맞추어 여자 요정 1(김주원)의 경쾌한 왈츠, 청년(김현웅)의 마주르카, 여자 요정 2의 마주르카, 여자 요정 3의 프렐류드, 여자 요정 1과 청년의 파드되인 왈츠, 앙상블 액션, 솔로이스트를 위한 왈츠로 이어집니다.
이 작품은 어떤 내용이냐고요? 줄거리보다는 무엇을 추구했는지가 더 중요한 작품입니다. 안무를 맡았던 포킨이 이 작품에서 무엇을 추구했는지는 청년 역을 맡은 남자 무용수에게 요구한 내용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포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관객을 위해 무용을 하지 말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지 말고, 자신을 찬미하지 마세요. 대신 아주 가볍고 영묘한 요정들을 보아야 합니다. 요정들을 찬미하고 요정들에게 닿고자 하세요. 이와 같이 어떤 환상의 세계를 향하여 동경하고 가서 닿으려는 순간들이 이 발레의 표현이자 근본적 동작이 되는 것입니다.”
김주원은 상체의 유연함과 신성한 우아함을 제대로 보여주었고 김현웅은 신이 내린 완벽한 신체 구조를 이용해 조용하면서도 힘있는 젊은 남자의 매력을 선사했습니다(신이시여, 저렇게 멋진 몸을 지닌 남자를 만드시다니요! 그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팔과 다리가 깁니다). 포킨이 의도했던 시적 영감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작은 날개를 단 공기의 요정들은 전혀 힘이 들지 않는 것처럼 사뿐사뿐 가볍게 춤을 춥니다. 유일하게 인간인 청년은 인생의 무거운 짐들은 잠시 내려놓고 날개도 없고 곧 늙고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도 천상의 춤을 춥니다. 요정들이 깃털처럼 가볍게, 마치 지상에 발을 디디지 않고 하늘을 나는 것처럼 춤을 추는 것처럼요. 청년과 요정은 같은 존재가 된 듯 어우러집니다. 인간인 청년도 잠시 인간이 아닌 고귀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달빛 아래 숲속은 너무나도 시적이고 서정적이고 낭만적입니다. 햇빛은 우리의 키를 자라게 하고 달빛은 우리의 영혼을 자라게 합니다.


러시아 발레의 위대함을 전 세계에 알린 미하일 포킨의 대표작!
이 작품은 1908년 3월 21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황실 발레단에 의해 처음으로 무대에 올려졌습니다. 그때의 작품명은 「쇼피니아나Chopiniana)」입니다. 쇼팽의 피아노곡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해서 발레음악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쇼팽의 이름을 딴 쇼피니아나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안무가 미하일 포킨은 이 작품에서 낭만주의 작곡가 쇼팽의 생애를 묘사했다고 말했습니다. 청년은 쇼팽이지요. 여자 요정들은 그가 추구했던 이상적인 예술 세계이고요.
이후 러시아 발레를 전 세계적으로 흥행시킨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i Dyagilev)가 이끄는 발레뤼스(Ballets Russes, 러시아 발레단)가 1909년 6월 2일 파리에서 이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그 유명한 안나 파블로바(Anna Pavlovna Pavlova), 타마라 카르사비나(Tamara Karsavina), 마리아 발디나, 바슬라브 니진스키(Vatslav Nizhinskii) 등이 주역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너무나 환상적인 내용을 너무나 환상적인 발레리나와 발레리노가 맡아서 한 것입니다. 이때 디아길레프가 작품명을 「쇼피니아나」에서 낭만주의 발레의 첫 시작을 알린 신호탄이자 불후의 작품으로 기억되는 「라 실피드(La sylphide)」에서 이름을 따와 「레 실피드」로 바꾸었습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이 작품을 보고 예술 창작의 영감을 얻었다고 고백했습니다.



2 「춘향-사랑의 시련(L'Epreuve d'Amour)」
춘향이가 고향에 돌아오기까지의 이야기
이번 국립발레단 120회 정기 공연에서 가장 많은 화제를 받았던 작품은 단연 「춘향-사랑의 시련」입니다. 세계적인 발레 안무가 미하일 포킨이 한국의 그 유명한 이야기 「춘향전」을 가지고 안무를 짰다는 것 자체가 큰 화젯거리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도대체 그 세계적인 대가가 우리 이야기 「춘향전」을 어떻게 만들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죠. 근데 한국 무대에 올라 그 궁금증이 풀리는 데 장장 71년이나 걸렸네요.
포킨이 「사랑의 시련」을 모나코에서 초연을 했을 때는 1936년입니다. 우리나라가 역사상 가장 비참하고 궁핍하고 비극적인 시절이었던 일제치하. 우리는 발레에 신경을 쓰기 어려웠습니다. 또한 「사랑의 시련」이 「춘향전」 이야기인지는 심증만 있었고 정확한 고증을 찾기도 어려웠습니다. 우리의 「춘향전」이라고 보기에는 등장인물들의 의상이 너무나 중국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작년에 좋은 소식이 신문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2006년 10월에 연극평론가 김승렬(프랑스 파리 제8대학 공연예술학 박사과정)이 1956년에 핀란드 국립발레단이 리메이크한 포킨의 「사랑의 시련」 공연의 팸플릿과 공연 사진을 입수했던 거죠. 12월 초에는 포킨의 초연 공연사진과 무대 데생 등도 찾아냈습니다. 또한 1982년판 옥스퍼드 발레 사전에 포킨의 이 작품이 "한국 설화를 바탕으로 만든 것(based on a Korean fairy tale)"이라는 문헌적인 자료까지 찾았습니다. 12월 14일에는 뉴욕공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1937년도에 찍은 「사랑의 시련」 리허설 동영상이 발굴되었습니다.
이제 포킨의 「사랑의 시련」이 「춘향전」이야기임이 확실해졌습니다. 남은 것은 춘향이를 고향으로 데려오는 일이지요.

작품에 대한 도식적일 수도 있는 사적인 몽상 혹은 상상!
저는 이 작품을 아주 재미있게 보았고 1930년대적인 상황 속에서 이해했습니다. 사적인 너무나 사적인 엉뚱한 이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에서 ‘님’은 연인이기도 하고 조국이기도 하고 절대적인 신이기도 합니다. 예술작품은 해석하기 나름이지 않습니까. 저도 그러기로 했습니다.
무대의 막이 오르자 우스꽝스런 원숭이 여섯 마리가 보입니다. 첫 장면이 주는 상징은? 그 무대의 시대적 역사적 배경은 원숭이들이 판치는 세상이란 말인가! 원숭이들이란, 모리배들과 위정자들을 상징하기에 너무나 잘 들어맞긴 하지요. 더 구체적으로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들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원숭이들에 이어 등장하는 만다린(mandarin, 신해혁명 이전 중국의 고급관리를 지칭하는 영어). 춘향의 아버지입니다. 우스꽝스런 모습입니다. 권력을 무력화시키는 데 희화화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귀족을 상징하는 보라색 비단옷을 입고 있는 권세가. 그는 국가나 백성들의 안위에는 관심이 없는 왕 혹은 지배자를 상징하겠군요. 왕을 포함한 왕족과 귀족들은 일신상의 부귀영화와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았으니까요.
아름다운 여자들의 춤. 그리고 청년의 등장. 그는 허름한 옷을 입었지만 건강한 정신을 지닌 젊은이입니다. 바로 춘향이가 사랑하는 몽룡. 몽룡은 원작과는 달리 양반가문의 자제도 아니고 과거에 급제한 관료도 아닙니다. 그는 그야말로 민중 그 자체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인물 설정입니까. 만약 그 시절에 과거에 급제한다면? 그건 또 다른 모리배나 위정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그냥 가난하지만 건강한 젊은이가 더 긍정적인 인물이지요. 훨씬 더 진보된 인물 해석이고요.
그리고 만다린의 딸 춘향. 옷도 분홍과 연보라를 입었습니다. 이번 보라는 귀족을 상징하는 보라가 아니라 수난과 희생을 상징하는 보라입니다. 그녀는 바로 힘없는 우리의 조국입니다. 원래 국가는 여자로 상징될 때가 많습니다. 만다린(왕 혹은 지배층)은 자신의 딸인 춘향(조국)을 외국 외교관(제국주의 열강)에게 시집보내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재물을 얻기 위해서지요.
하지만 춘향(조국)은 몽룡(민중)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춘향(조국)을 사랑하고 지키고 위험에서 구할 사람도 몽룡(민중)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합니다. 그 두 사람을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비록 춘향의 아버지 만다린이 엄청난 시련을 준다고 해도요.
만다린이 사위로 점찍은 외교관은 재물과 권세로 그 위용을 한껏 부립니다. 이 작품에서는 중국 외교관으로 설정돼 있습니다(이런! 일본 외교관으로 하면 더 좋았을 텐데요). 외교관 앞에서 만다린은 잘 보이려고 절절 맵니다. 상전 모시듯 하죠. 기세등등한 외교관은 한밤중에 도둑질하듯 아름다운 춘향을 겁탈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원작 「춘향전」에서는 춘향이가 목숨을 걸고 그 시련과 맞서 싸우고 마침내 극복해냅니다. 변 사또의 수청 요구를 거절하고 대신 고문을 받고 마침내 사형을 당하기 일보직전까지 가지요.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몽룡이 춘향을 구해 오는 걸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때 마침 용이 나타나 외교관과 그의 수하들을 겁주고 춘향을 구해냅니다. 용과 춘향 단둘이 있습니다. 용이 옷을 벗자 그 안에서 몽룡이 나옵니다. 몽룡은 연인 춘향 앞에서 “내가 꼭 너를 지켜줄게”라고 말하는 듯 두 팔을 들어 용감함과 기개를 표현합니다. 춘향은 그런 몽룡에게 한없은 신뢰를 보내듯 박수를 치고 응원하고요. 춘향은 몽룡의 사랑을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무한한 신뢰를 보내지요.
몽룡의 친구들은 가면을 쓰고 외교관들의 재물을 빼앗아 옵니다. 한편 만다린은 외교관들이 재물을 도둑맞은 것을 알고 관군을 동원해 몽룡과 친구들을 잡습니다. 관군은 민중을 보호해야 하는데 다른 나라 외교관을 보호하다니! 이 얼마나 역사적 사실과 절묘하게 일치합니까.
외교관은 빼앗긴 재물을 가지고 떠납니다. 춘향과 몽룡은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사랑을 성취합니다. 행복한 결말이지요.
「춘향-사랑의 시련」에서 안무는 포킨의 것을 거의 그대로 살렸고 의상과 무대 디자인은 새롭게 했습니다. 한국 초연이었다는 점과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데 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물론 이 작품은 우리가 기존에 알던 「춘향전」과는 많이 다른 내용입니다. 하지만 몇 가지 오해들을 바로잡는다면 ‘사랑’이라는 위대한 이상이 해학과 풍자와 웃음 속에서 잘 실현된 작품이라고 봅니다. 또 여러 가지 다양한 해석도 가능하고요.
「춘향전」의 이야기는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입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더 발전된 「춘향-사랑의 시련」이 무대에 올랐으면 합니다. 보고 싶었고 잘 보았습니다.



3 「뮤자게트(Musagète)」
안무가로 산다는 것, 조지 발란신에게 바침!
「뮤자게트」는 2004년에 보리스 에이프만이 세계적인 안무가 조지 발란신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뉴욕시티발레단에 헌정한 작품입니다.
뮤자게트는 그리스 신화 속의 춤과 노래, 시, 연극 등 여러 가지의 예술을 주재하는 여신을 뜻합니다. 조지 발란신이 평생토록 사랑하며 추구했던 춤, 노래, 시, 연극을 상징하지 않을까요? 조지 발란신의 인생을 구성했던 요소들이죠.
이 작품은 한 늙은 안무가의 끊임없는 열정과 인생에 대한 회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꼭 초인적인 예술가의 인생 이야기로만 보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네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한 안무가의 인생을 통해 인간의 인생을 표현해냈습니다.
첫 장면은 고뇌에 찬 안무가(장운규)의 모습에서 시작됩니다. 장운규는 기가 막히게 예술가의 모습을 구현해냈습니다. 고뇌, 환희, 절망, 다시 도전, 기쁨 그리고……. 한 예술가의 인생 속 희로애락이 요약된 파노라마처럼 담깁니다. 조지 발란신이 사랑했던 발레리나들, 그리고 치열했던 안무 연습, 힘이 느껴지는 역동적인 전성기, 무대 위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았던 불멸의 작품들,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사랑의 아픔, 창작의 고뇌, 창작의 열정 등이 강렬하면서도 드라마틱하게 단순하면서도 철학적으로 표현됩니다.
무용가에게 혹은 안무가에게 육체가 늙는다는 것은 비극적입니다. 한때 육체는 붉은 피가 돌았고 육체는 영혼의 캔버스가 되어주었습니다. 육체는 영혼이 이끄는 대로 잘 따르고 잘 표현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육체는 늙었습니다. 안무가는 서 있지도 못하고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합니다. 의자에서 일어서려고 해도 제지당합니다. 그것으로 인간의 삶은 끝인가요? 우리의 인생을 구원해주던 예술은 더 이상 우리의 인생을 구원해주지 못할까요?
안무가 보리스 에이프만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불멸을 추구했던 조지 발란신의 작품 세계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의 마지막을 전성기의 열정으로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출생이나 사망의 시점보다 전성기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전성기란 한 개인의 일생에서 가장 큰 성공을 누리는 시기를 말합니다. 맨 마지막에 가장 화려하고 역동적인 군무를 선사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마음을 통째로 빼앗아버리는 감동을 줍니다.

*(사족 한 마디!)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 김주원의 상반신 누드 소동에 대한 짧은 생각
얼마 전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 김주원의 상반신 누드 소동이 있었습니다. 패션잡지 「보그 코리아」 10월호에 상반신 누드 사진 몇 컷이 실렸지만 3주가 지날 때까지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곧 10월호 잡지는 11월호로 바뀌었고요. 그러나 뒤늦게 자녀에게 발레 공부를 시키는 한 학부모가 그 상반신 누드 사진이 발레리나의 품위를 훼손했다면서 항의 전화를 한 게 발단이 돼 소동이 있었습니다. 모두들 부랴부랴 “그런 일이 있었어?” 하고 잡지를 찾았지만 잡지는 이미 새 잡지로 바뀐 뒤였죠.
이런 소동이 근대 미술 사상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손꼽히는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가 발표되었던 때의 소동과 비슷해 보입니다. 사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오늘날 명화로 대접받고 있지만 발표 당시인 1863년에는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켰고 사상 최악의 작품이라는 혹평도 받았죠. 그 이유가 벌거벗은 여성 때문입니다. 사실 당시의 회화에서 여성 누드는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비너스를 비롯해 신화 속 여신들은 다들 누드로 나왔으니까요. 하지만 일반 여성의 누드는 절대 그려서는 안 되는 금기사항이었습니다. 마네의 그림이 비난받은 이유는 너무나 현실적인 일반 여성의 누드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마네는 이 그림을 그릴 때 르네상스 후기의 거장 티치아노의 「전원의 합주」를 참고해서 그렸습니다. 「전원의 합주」는 들판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두 젊은이 곁에 미의 여신 뮤즈가 함께 있는 그림입니다. 미의 여신 뮤즈는 알몸이지만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 상황을 현대적으로 다시 창조해낸 작품이 바로 「풀밭 위의 점심식사」입니다. 그러한 미학적 의도와 예술성은 감안하지 않은 채 단지 알몸을 하고 있다는 것만 비난한 것은 예술을 특히 예술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처사였습니다.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 김주원은 한국 무용계에서 강수진의 뒤를 잇는 가장 뛰어난 발레리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녀는 어떤 발레리나인가요? 하루 10시간을 연습하는 자타가 인정하는 연습벌레, 하루 연습량으로 체중 2kg이 빠질 정도로 자기에게 혹독한 장인, 한 달에 15켤레의 토슈즈가 필요할 정도로 끊임없이 단련하는 수도사, ‘팔에도 표정이 있다’는 찬사를 받는 표현력이 뛰어난 예술가, 젊음이 유한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아쉬워하고 그 변하는 모습을 기록해두고 싶었던 한 인간. 그리고 2006년 러시아 볼쇼이 극장에서 열린 ‘보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 춤의 영예)에서 최고 여성 무용상인 브누아 드 라 당스를 수상하고도 한국 무대에서 한국 발레의 현장에 언제나 함께 있으려고 하는 발레리나. 그녀는 그런 사람입니다.
사실, 발레리나는 여신이나 요정처럼 아름답습니다. 아니, 여신이고 요정입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너무나도 육체적이지 않습니다. 육체를 통해 정신적인 것들을 표현합니다. 육체의 단련을 통해 인간적인 것들을 초월합니다. 발레리나의 가슴은 얼마나 빈약한가요. 믿기지 않을 만큼 살덩어리들은 없습니다. 존재 그 자체입니다. 발레리나의 상반신 누드란? 구도자의 몸처럼 신성하고 아름답습니다. 외설을 상상할 수 있다고요? 도대체 누가요?


안현주 bread-wine@hanmail.net

뉴스테이지  

<저작권자 © 뉴스테이지,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뉴스테이지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