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의 음악은 1960년대에 안무가 니진스카에 의해 춤으로 태어난다. 그 이후 ‘볼레로’ 음악을 사용한 조르주 동의 안무는 현재까지 많은 이들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있기도 하다. 이 나지막하고 반복적인 음악은 아직까지도 많은 안무가들에게 영감을 던져 주고 있다.
‘뉴 볼레로’의 서미숙 안무가는 반복적이며 환희의 절정을 느낄 수 있는 ‘볼레로’ 음악과 동양 사상에서 공통점을 얻은 듯하다. 이 작품은 불교라는 종교적 느낌은 없으나 불교문화가 작품 속에서 짙은 색을 내고 있다. 그러나 불교의 이미지만을 차용한 것은 아니다. 음악과 부처의 사상에 대한 공통점, 그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작품 속에 부드럽게 녹아있다. 그렇다면 안무가는 과연 유럽의 예술과 동양 사상이라는 두 어색한 요소를 어떻게 꿰어냈을까?
외국의 춤으로 한국을 표현하다
이 작품에서 춤은 발레, 현대무용, 힙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춤 동작은 발에 중심이 있다. 정확한 공통점은 발의 움직임이다. 현대, 발레, 힙합은 같은 동작이지만 각각의 무용수들이 추는 장르의 특성에 맞게 전혀 다른 느낌의 춤이 되었다. 예를 들면, 모두 똑같이 발만으로 스텝을 밟는데도 발레, 현대, 힙합이라는 장르가 뚜렷하게 구분된다. 이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묘미이다. 이것은 우연한 발견이 아닌 안무가의 정확한 계산으로 보인다.
안무자는 이 작품의 명확한 스토리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6명의 탐험가에 대한 이야기임이 틀림없다. 그 6명의 탐험가들을 이끄는 발이 머문 곳은 바로 부처의 세계인 것이다. 결국 모든 사항이 합일점을 이룬 곳은 해탈의 경지이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생각 할 필요도 없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그 공간에 도달한 것이다. 그 세계에 들어온 무용수들은 비로소 통일된 춤을 추게 된다.
안무가는 이렇게 외국무용이라는 춤의 장르로 동양의 문화를 표현한다. 이는 한국의 문화이기도 하다. 게다가 춤은 한국 무용의 묵직한 호흡법에 가벼운 몸놀림이 더해졌다. 그들의 동작이 빠르고 역동적이었어도 진지한 느낌이 강했다.
이상은, 그 움직임의 오묘한 세계
작품의 홍일점이었던 이상은은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신장 182cm의 발레리나로 잘 알려진 그녀는 유니버설발레단의 군무 속에 큰 키를 숨겨온 것과는 다르게 이 작품에선 자신의 장점을 마음껏 발휘했다. 그녀의 인상적인 이미지는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는 듯 보였다. 그녀가 풍기는 강력한 기운은 아무래도 숨기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외모에서부터 작품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북돋았다. 그녀는 눈에 띄게 서구적인 무용수 체형이지만 춤 자체는 동양적인 이미지를 자아냈다. 정적이며 절제된 동작과는 반대로 그녀의 몸은 펼쳐진 부채와 같이 시원한 라인을 만들어냈다. 이는 부조화 속 조화라고 할 수 있다. 새가 활개를 핀 듯한 그녀의 느릿하고 기하학적인 움직임은 보는 이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잔상을 남겼다.
반복(反覆)의 미학에 참배하다
이 작품은 볼레로 음악이 시작되면서 단순화된 동작의 반복이 심해졌다. 동작에는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나 반드시 변화가 있다. 그것은 절을 하는 움직임을 변형해 놓은 듯했다. 흡사 불교의 108번뇌를 소멸하기 위해 참배하는 것처럼 말이다. 음향이 증폭되면 관객들은 마치 108배를 모두 수행한 듯 카타르시스의 환희를 느낀다. 이는 반복(反覆)의 미(美)이다.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간다는 의미의 반복(反覆)이다. 모든 것이 하나였던 처음의 것처럼 그 곳의 춤은, 음악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의 모습이 되었다.
SEO 발레단의 ‘뉴 볼레로’에는 장르만이 하나로 꿰어진 것이 아니다. 작품에는 마치 물이 든 비커에 잉크가 번져가듯 서양과 동양의 문화가 훌륭하게 융합되었다. 작품 속에 존재한 조화로운 의미와 이미지는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김유리 yuri400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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