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박종훈은 ‘평범하게 살면서 특별한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말 한마디로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자신의 철학을 드러냈다. “어렸을 때는 음악만 생각하면서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삶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심지어는 모차르트나 베토벤도 집세 걱정을 하고 다른 일상의 소소한 일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곤 했죠. 지금은 다릅니다. 가능하면 평범하게 살면서 특별한 음악을 만들고 싶네요”

박종훈은 현재 9월 20일 LG아트센터에서 열리는 ‘피아니스트 박종훈의 파가니니에 의한 대연습곡’을 준비 중이다. “재작년 초절기교 연습곡 전곡 연주에 이어서 두 번째 갖게 되는 연습곡 전곡 연주에요. 초절기교 연습곡이 피아노의 피아니즘의 한계에 도전하는 대곡들이라 한다면 이번 파가니니 연습곡들은 좀 더 음악적으로 청중에게 친숙한 곡들이 되겠네요.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꿈 전곡(3곡)도 같이 연주합니다. 기교적으로는 어렵지만, 음악적으로는 청중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그는 이번 공연에서 관객들이 ‘리스트의 낭만성’에 주목하기를 바란다. “이번 공연에서 선보일 곡들은 초절기교 연습곡과 달리 더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선율들이 넘치는 음악들입니다. 같은 연습곡이라도 추구하는 것이 많이 다르죠. 특히 파가니니의 곡들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피아노이기 때문에 구현할 수 있는 낭만 음악의 특징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랑의 꿈 세곡은 말할 것도 없죠”

‘피아노’는 대중에게 가장 친근하고 사랑 받는 악기다. 피아니스트 박종훈은 어떻게 해서 피아노를 시작하게 되었을까. 그는 “정확한 시점을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의 유년 시절은 대부분이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기억들이 많다. “피아노 연습은 누구나 그렇듯이 재미없었습니다. 다만, 선생님이 시키지 않은 곡들을 쳐 본다든가 나름대로 나만의 곡을 만들어 본다든가 하면서 피아노 앞에 앉아서 노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자작곡을 부모님과 형제들한테 들려주던 기억이 나네요”

박종훈은 바이올리니스트 파벨 베르만, 첼리스트 비토리오 체칸티와 오랫동안 호흡을 맞추어 왔다. 또한, 클라리네티스트 리차드 스톨츠만, 안톤 슈타이네커, 바이올리니스트 빌헴 체핀스키, 기타리스트 이병우와 듀오 콘서트 등 최고의 연주자들과 함께 협연했다. 그가 가장 기억에 남고 인상적이었던 연주의 ‘순간’ 혹은, 연주자와의 ‘만남’은 언제였을까.

“리차드 스톨츠만과의 연주 때 제가 몸이 많이 안 좋았습니다. 말도 잘 못할 정도로 심한 독감에 걸려서 열이 펄펄 나는 중에도 리허설을 했습니다. 음악적으로나 여러 가지 면에서 배려가 섬세한 분이셨어요. 심지어는 브람스 소나타의 해석을 제 해석에 맞추어서 연주하셨습니다. 그래도 그분만의 연주 개성은 전혀 사라지지 않더군요. 재즈 편곡 하나도 같이 연주 했는데 중간에 흥이 나서 서로 즉흥연주를 재미나게 주고받던 기억이 있어요. 그 기억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박종훈의 스승이었던 라자르 베르만은 그의 연주가 마음에 안 들 때 곧잘 “자면서도 참 잘 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박종훈은 “그 말씀에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준비를 잘해서 연주하지만 살아있는 연주가 아니다 즉, 그런 연주는 예술가의 연주가 아니라는 뜻이 있었어요. 지금도 연주할 때마다 그 말씀을 잊지 않으려 노력합니다”고 말했다.

그는 11년 전인 지난 2000년 이탈리아 산레모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주목받았다. 하지만 이후 클래식 연주에 머무르지 않고 재즈, 뉴에이지 등 다양한 대중음악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했다. 그의 음악 세계의 영역은 어디까지인지 궁금했다. “저는 일단 음악 자체의 영역을 나누지 않습니다. 음악은 다 똑같은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하다 보니까 여러 가지 활동을 한다고 알려졌네요. 저는 음악의 영역에 제한을 두고 싶지 않습니다”

박종훈은 유독 이탈리아와 인연이 깊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지금까지 매우 활발하게 활동해왔다. 그에게 이탈리아는 어떤 의미일까. “이탈리아는 우선 첫 번째로 제가 이몰라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하게 된 곳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콩쿠르에 우승하고 연주 활동을 시작한 곳이죠. 이탈리아에서 협연, 실내악, 독주회 등 여러 가지 연주를 하고 TV와 라디오에 출연하며 활발한 활동을 했지만 가장 제게 먼저 와 닿는 부분은 ‘스트레스 없는 환경’이에요.(웃음) 물론 인간사는 곳이 다 똑같다고 하지만 이상하게 이탈리아에 있으면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모든 게 편안합니다. 연주회를 할 때 청중들의 얼굴에서도 그런 것을 읽을 수 있어요. 다들 음악을 즐길 준비가 완벽하게 돼 있는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죠. 다른 나라에선 찾기 힘든 느낌입니다”

해외를 오가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박종훈. 해외활동에서 힘든 점이 있지 않을까 물었더니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오히려 힘들다면 국내 활동이 힘든 것 같아요. 해외에서 느끼는 힘든 점들은 물론 있지만 그런 것들은 당연히 힘들 거라고 예상하고 감당하는 것들이에요. 그다지 스트레스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좋은 점이 많지요. 어차피 저는 서양음악을 하는 사람입니다. 서양의 문화가 단절 없이 그대로 이어 내려오고 있는 곳에서 연주한다는 것만큼 값진 일은 없다고 봐요. 한번은 이탈리아 시골도시에 연주를 갔는데 별 기대 안 하고 허름한 홀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내부는 완전히 딴판이었어요. 17세기에 만든 홀인데 너무나 아름다운 샹들리에와 장식들이 원형극장을 꽉 메우고 있었습니다.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음악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이런 경험은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이나 북유럽에선 접하기 힘들죠.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지의 매력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그 옛날 음악가들이 활동하던 그 무대 그대로, 현재의 연주자가 그 정기를 이어받아서 연주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구체적인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특별한 계획은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냥 만들고 싶은 음악, 연주하고 싶은 음악, 들려주고 싶은 음악, 듣고 싶어 하시는 음악을 하면서 살겠다”고 말하는 그는 음악을 자신의 삶 그 자체로 여기는 피아니스트다.

(* 이 글은 월간 삼호뮤직 9월 호에 실린 글임)

박세은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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