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23.12.1 금 12:58
상단여백
HOME 댄스
[취재기]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되는 곳, 제 21회 크누아 무용단 정기공연

                       

 

‘그들이 움직이니 움직임이 시작되는 곳이 바로 그곳이 아니던가!’ ‘그들’은 다름 아닌 크누아(KNUA) 무용단이다. 제21회 크누아 무용단 정기공연 ‘신비’가 지난 5월 16일과 17일 한국예술종합학교 석관동 중극장에서 공연되었다. 이번 크누아 무용단의 정기공연은 창작과 안무집단 학생들이 만들어 낸 하나의 완성된 공연이었다. 창작과에 재학 중인 함지혜, 졸업생 나연우, 김설진 그리고 초빙교수 마츠시마 마코토가 안무를 한 4개의 작품으로 무대가 만들어졌다.

나연우의 ‘Wringgle’은 작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창작과 예술사 졸업공연의 마지막을 ‘완성’으로 이끌었던 나연우의 작품이 발전된 것이다. 하얀 머리의 무용수들이 무대 바닥을 덮는 하얀 천속에서 꿈틀거리다 함몰되고, 사라지더니 다시금 스르륵 모습을 드러낸다. 안무가는 이것을 사고의 꿈틀거림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얀 거대한 천이 위로 올려졌다 내려지면서 공기를 머금더니 바람의 모습을 온 몸으로 보여준다. 한편 그 바람의 형상 아래에는 무용수들이 끊임없이 바삐 움직이며 자리를 잡는다. 그런 다음 천이 만들어내는 바람의 형상이 가라앉으면 하얀 덩어리들이 되어 꿈틀거린다. 하얀 천 위에는 한 사람이 있다. 하얀 움직임들이 만들어내는 기분 좋은 파도타기에 그는 몸을 내맡길 수 있다. 한 순간의 삐그덕거림 없이 평화로운 리듬으로 움직인다. 그러다 그가 앞으로 나아가려하면 하얀 움직임들은 그가 의지하는 바를 움직이게 한다. 좀 더 가볍게, 좀 더 시원하게. 우리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고들의 흐름이다. 대개 삶은 답답하고 정체한다. 그만큼 사고들은 답답해하고 정체되어 있다.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연우의 ‘Wringgle’에서는 ‘의심’ 혹은 ‘정체된 상태의 사고’보다도 자신만의 리듬을 갖고 경쾌하게 스텝을 밟고 있는 사고와 ‘내’가 있었다.

1부의 두 번째 작품, 김설진의 ‘순화 - <무거운 하늘>’의 무대에는 강렬한 몸들이 있었다. 대부분 무용수들의 몸집이 작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그토록 강렬하고 무거운 무게는 굉장한 흡입력을 발휘했다. 무대 위에는 굉장히 검은(의상도 분위기도 중립적인 표정마저 어두운) 사람들이 있다. 중립적인 공기가 작용하는 가운데 손이 그리고 몸이 위를 향하면 이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몸이 된다. 그러기를 몇 번이고 반복한다. 검은 사람들은 내려찧고 내팽겨 치는 힘에 거스르기보다는 마치 그 힘을 온 몸으로 증명하려는 듯이 힘에 순종적이다. 하지만 마냥 순종적이지만은 않다. 힘의 ‘밑으로’ 작용이 끝나면 다시금 하늘 쪽을 향하곤 했으니까. 힘의 작용방향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의지를 가지고 그 의지를 전달하기까지 한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확인하는 순간, 그들을 ‘위대한 테크니션’이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춤의 움직임은 ‘의지’를 갖는 것이 전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순화 - <무거운 공기>’는 움직임에서 의지를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의지를 알게 하는 움직임 또한 비록 어디선가 보았던 ‘동작’이라고 말할 수 있더라도 전혀 새로운 움직임의 발견이 되었다. ‘정화’, 혹은 ‘조화’의 이야기로 마무리를 이끌기 위해 사용한 이미지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 닳은 길바닥을 연상하게 해 아쉽다. 굳이 작품에 새로운 문법,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마무리가 갑자기 영화의 ‘헐리우드식 엔딩’마냥 낯익은 문법이 적용되어 김이 빠져버린다. 힘과 의지의 움직임들이 만들어내는 팽팽한 긴장감을 여느 ‘구원’의 이미지로써 조화를 이끌어내려 한 점은 안이한 결론짓기가 아니었는가 생각해볼만 하다.

2부의 첫 작품 ‘만나는 동안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창작과에 재학 중인 함지혜가 안무했다. 이 작품은 2007년 4월에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초연되었던 작품을 발전시킨 것이다. 이번 작품의 전체적인 색깔은 안무가가 ‘만남’을 대하는 시선이 성숙되고 안정되었음을 보여 비추는 따뜻한 주광색이었다. 한편 부분적으로는 최대한 ‘만남’의 다양한 모습들 그대로를 표현하려고 한 노력이 물씬했다. 쇼팽의 피아노 선율이 울리기 시작하는 순간에 선택적으로 시작을 같이 하는 두 무용수의 팔 움직임은 하나는 위로 하나는 옆으로 뻗어가더니 공기를 머금고 천천히 내려온다. 그동안 팔이 올라가며 머금은 숨은 점점 빠른 호흡으로 이어져 다음 동작으로 또 그 다음 동작으로 진행되어 두 무용수가 만나고 얽히게 한다. 그러다 둘 중 한 사람이 쓰러지면 한 팔을 잡고 한 발짝씩 한 발짝씩 끌고 간다. ‘만나는 동안에’ 생길 수 있는 상처를 만들어 낸 사람이 책임을 지듯이 끌고 간다. 그리고 다시 상처의 회복, 그러면 처음처럼 각자 한 사람으로 돌아가 다른 만남을 혹은 반복된 만남을 계속한다. 자신의 숨에서 시작한 움직임이 다른 사람과 겹치거나 만나면 호흡을 나누고 서로의 움직임을 이끌어내고, 이끌림을 당하기도 하다 다시 헤어지고 혼자가 되어 또 다른 만남을 이어간다. 무대의 앞 쪽에서는 이러한 만남이 4명의 무용수들에게서 이루어지고 있고 그동안 무대 뒤에서 그들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한 없이 걸어가기만 하는 사람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세상에서 안무가는 옷깃이 스치지 않았지만 그들과의 (공간의 혹은 시선의 혹은 아무것도 아닌 그저)스침 또한 만남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전작 ‘만남’에 비해 성숙하고 안정된 느낌의 ‘만나는 동안에’는 삶에서라면 ‘끊이지 않는 만남’을 춤 언어로 이야기했다.

초빙교수 마츠시마 마코토가 안무한 ‘The tree approaching to my ear’는 공간을 채우는 존재의 노래, 목소리, 움직임과 아이디어를 보여주었다. 작품의 시작에서는 빨간 원피스를 입은 캄보디아 여인이 부르는 노래가 듣는 이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맞은편에는 남자가 저음의 소리를 내며 걸어온다. 그러다가 두 사람이 엇갈리는 순간 노랫소리도 남자의 소리도 끊겨버린다. 그럼에도 그들은 걸음을 멈추거나 늦추거나 하지 않는다. 갑자기 굉음이 시작하더니 멈출 줄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고 소리를 내고 달린다. 공간을 채우는 사람들과 그들의 발작적인 움직임은 그저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마치 길을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각자의 사정을 안고 있지만 그저 걸어가는 사람으로만 보고 있는 방관자의 관계처럼 그랬다. 고함을 지르고 소리를 내던 사람들의 웅얼거림 속에서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각자의 사정 중에 하나가 들리기 시작한다. 다들 이야기를 가지고 정신없이 살고 있다. ‘할 말’이라는 건 모두가 가지고 있다고 이 작품은 이야기한다. 그리고 각자의 사정이란 것이 때로는 응석이고, 변명일 수 있다. 한편으로 각자의 사정이라는 게 꼭 있어야 하는 것일까? ‘사정’을 갖으라고 요구한 세상이 나쁜 게 아닌가? 순간 억울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 순간! 억울함을 보듬어주는 사람을 만났다. 무대 위에는 다들 저마다 다르게, 하지만 바쁘다는 표면사실뿐이다. 그 중에 멈추어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러고나서도 한참동안을 그 바쁜 사람들의 속에서 잠자코 두드러져 있다. 그러다 어디선가 그의 앞에 와 서는 또 다른 사람. 그리고 위로를 받는다. 작품 ‘The tree approaching to my ear’는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단편적인 인상들이 모여 있다. 하지만 단편적이어서 부족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단편적이고 조각보 만들듯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를 이야기할 때 억지 없이 이야기를 이루어낼 수 있는게 아닐까.

김은지 기자 newstage@hanmail.net
[공연문화의 부드러운 외침 ⓒ 뉴스테이지 www.newstage.co.kr]
 

뉴스테이지  

<저작권자 © 뉴스테이지,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뉴스테이지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