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열이 40도까지 치솟았다. 해열제를 맞으며 꼴딱 밤을 새고 아침 일곱 시가 되어서야 잠깐 눈을 붙였다. 감기에 장염까지 걸렸는데도 가능한 한 가장 말쑥한 모양새로 연습에 참여했다. 그가 말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게다가 웃기까지 한다. 안무가가 구상한 게 있을 테니 무용수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연습이 제대로 이루어진단다. 대단하다는 말에 당연한 거라고 받아치던 이영철이 또 웃는다. “국립발레단에서 월급을 주니까요(웃음).”

국립발레단이 5월 20일과 21일 창작발레 프로젝트 ‘컨버댄스(CONVERDANCE)’를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무대에 올린다. ‘컨버댄스’는 ‘J씨의 사랑이야기(안무 정현옥)’, ‘스윙타임(안무 안성수)’, ‘0 1(안무 박화경)’로 구성됐으며,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이영철은 ‘스윙타임’으로 함께한다. 젊은 남녀들이 재회의 기쁨과 인생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스윙타임’에는 네 커플이 나온다. 그러니까 이영철이 모 광고의 ‘씽씽 불어라~’로 기억되는 그 스윙을 춘다. 가만히 누워 떨어지는 감을 얼떨결에 받아들었는데, 그 맛이 기막히게 싱싱하고 달콤한 꼴이다. 우리는 기분 좋게 음미하기만 하면 된다.

“안성수 선생님과는 처음으로 작업해 봐요. 선생님께서 클래식과 컨템포러리 등 다양한 작업을 하시는 분이라 꼭 한 번 함께 해보고 싶었어요.” 이영철에게 이번 작품을 통해 처음 만난 안무가 안성수는 꽤나 인상 깊게 다가온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의 배려를 보인다. 그야말로 “민주적”이다. “굉장히 젠틀하세요. 누구보다 무용수의 입장에서 생각하시죠. 고쳐야 할 부분이 있을 때도 조용히 다가오셔서 이야기해주세요. 제 이상향이라고 할 수 있어요.”

국립발레단의 다양한 작품에서 주역으로 활약했지만 ‘스윙타임’의 안무는 그에게 익숙한 동작이 아니다. “표현의 확장이랄까요. 대부분 정해져 있는 클래식과 달리 여러 방식으로의 접근이 가능하고 절대적 제약이 없다보니 말 그대로 즐기면서 하고 있어요. 클래식과는 또 다른 색과 그만의 매력이 있죠.” 그만큼 몸에 무리가 오는 것도 사실이다. “하나의 동작을 끝까지 완성해야하는 습관이 있는데 이번 작품의 경우 빠르게 이어가야하니까요.” 그럼에도 재즈 풍의 신나는 스윙음악이라 즐겁게 임하고 있다. 음악이 흘러나오면 정식 안무가 들어가기 전에도 무용수들이 계속 춤을 춘다고. 연습실 분위기도 화기애애하다. “그런데, 너무 빨라(웃음).”

진짜 그늘이 무엇인지 아는,
깊은 뿌리를 가진 든든한 나무 같은,

타고나길 ‘잘 타고난’ 이영철은 잘 먹고 잘 자는 것 외에 특별한 관리를 하지 않는다. 몸이 유연해 어지간해서는 잘 다치지도 않는다. “크게 문제된 적은 없었어요. 티가 날 정도로 발목이 부어도 조금만 지나면 괜찮았었는데, 이제 나이를 먹다보니까(웃음). 운동을 하는데 다쳐서라기보다는 재활센터에서 근육 움직이는 일을 꾸준히 해요.” 연습이 없을 때도 집에 가만히 있기 보다는 활동적으로 움직이는 편이다. 스치는 인상만으로는 과격한 운동이 잘 어울릴 것 같지만 첫 인사 한 번만으로도 강아지와의 소소한 산책이 안성맞춤일 것 같은 친절함과 여유를 가진 무용수다.

“날카로운 인상 때문인지 강한 역을 많이 맡았어요. 무대에서는 실제 키보다 커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예전에는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았어요. 그런데 계속 악역만 맡다보니까(웃음)….” 이영철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이 남성미다. 하나의 작품에서 주인공, 이를테면 왕자 동시에 그와 대립되는 역을 함께 맡기도 했다. 관객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다보니 분명한 캐릭터를 가질 수 있다는 게 행복하기도 하나 한쪽으로만 부각되지는 않을까 걱정도 된다. “물론 유약한 역을 맡기도 하는데 이미지가 있어서 그런지 악역으로 많이 기억되는 것 같아요. 저 정말로 한 번 단장님께 가서 말씀드리고 싶어요. 너무 악역만 주지 마시라고요(웃음).”

이영철은 많은 발레 팬들을 안심시키는, 참으로 든든한 무용수다. 그러니 국립발레단 후배들에게는 오죽하랴. 이 침착하고 친절한 말투로 후배들에게 조언과 애정 어린 질타를 아끼지 않을 것 같지만 예상외로 터치가 없는 선배다. “관심이 없다기보다 그게 후배들을 배려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판단하는 게 틀릴 수도 있으니까, 또 후배들이 알아서 잘 하겠지, 라는 기대가 있어서 가르친다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얼마 전, 아, 내가 겁을 먹어서 그런 걸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근에는 선생님들께서 후배들을 이끌어주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요즘 바짝 긴장하고 있다. 조언 전에 모범이 되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다행히도 후배들이 잘 따라와 줘서 고맙다는 이영철은 그래서 더욱 긴장을 하며 이번 작품, ‘스윙타임’에 함께하고 있다.

“‘스윙타임’은 연습하는 저희처럼 관객들도 즐기면서 관람할 수 있는 작품이에요. 안무가의 의도나 기본적 내용을 먼저 참고하신다면 더 재미있게 즐기실 수 있을 거예요.” 이어 관객들에게 부탁의 말도 덧붙였다. “무용수들은 늘 힘들고 굉장한 노력을 기울여 준비해요. 작품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나 사람이다 보니 환경적인 것 등 다양한 요소들 때문에 실수 할 때도 있어요. 예전에 국립발레단을 검색해 본 적이 있는데 어느 공연에 대한 평이 상상 이상으로 험하게 평가되었더라고요. 제가 출연한 공연은 아니었는데 찾아보면 분명 제 공연에 관한 이런 이야기도 있을 거 아니에요(웃음).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당연히 좋은 말씀만 해달라는 건 아니에요. 다만 애정을 갖고 무용수들과 작품을 아껴주셨으면 하는 거죠.”

이제 곧, 묵직하고 성실한 무용수 이영철의 자유로운 움직임이 당신들의 마음에 시원한 바람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니 우리 즐길 준비를 하자! It's Swing Time! Let's dance!

글,사진_뉴스테이지 이영경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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