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초연 이래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앵콜 공연을 이어가고 있는 뮤지컬 ‘삼총사’는 대중적 코드가 가득해 남녀노소 누구나 즐겁게 관람할 수 있는, 그야말로 연말연시에 제격인 작품이다. 17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열혈청년 달타냥과 세 명의 왕실 총사(아토스, 포르토스, 아라미스)의 모험담을 그린 ‘삼총사’는 화려한 캐스팅으로도 유명한데, 이번 시즌에서 유독 눈에 띄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아토스 역의 서범석이다. 지난 해 ‘모차르트!’의 레오폴트, ‘서편제’의 유봉 등 고뇌 가득한 아버지 역으로 관객의 눈물을 쏙 뺐던 그가 용맹하고 섹시한 총사로 분한 것. 오랜만에 선보이는 로맨스가 조금은 어색하다는 서범석의 이야기.

- 최근에 모차르트나 서편제처럼 비극적 색깔이 강한 작품을 하다가 모처럼 굉장히 유쾌한 작품을 만나셨습니다.
“네. 레오폴트나 유봉이는 자식 걱정을 빙자해 자신의 꿈을 이루려 했다는 점에서 좀 유사했죠. (웃음) 아무래도 음울했어요. 근데 삼총사는 의리와 정의를 말하고 유쾌·상쾌·통쾌한 작품이라 연습하면서부터 분위기 자체가 밝았어요. 그래도 공연 초반까지는 유봉이의 무거움이 좀 남아 있었는데 공연장에서 관객 분들이 반응을 해주시니까 제 스스로 많이 바뀌더라고요. 객석과 교감하는 것. 그 점이 삼총사의 가장 큰 특징인 것 같아요. 또 제가 앙상블 출신이어서 몸을 많이 쓰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 메인 배우가 되면서부터 몸을 많이 안 썼거든요. 이번에 검술 연습을 하면서 땀 흘리고 그러는 게 굉장히 좋더라고요.”

- 아토스는 ‘검으로 총알도 튕겨낸다’는 전설의 검객이죠. 아주 섹시한 역할인 것 같아요. 오랜만에 멜로 연기도 하시고요. 겨울나그네, 불의 검, 명성황후, 위대한 캣츠비, 노트르담드파리 등 수많은 작품에서 짝사랑만 하셨는데 말이죠. (웃음)
“그렇죠. 일단 비주얼적으로 멋있게 해주시니까. 근데 전 섹시함은 좀 없고요. (웃음) 여기서도 여전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데 그나마 다정했던 한때를 그리는 장면이 있어요. 근데 좀 부끄러워요. 나이 먹어서 이게 뭔 짓인가... 그런 느낌이 들어서 닭살 돋습니다. 자신 있게 하질 못해요. (웃음)”

- 초연 멤버인 유준상씨와 더블이신데, 초연 멤버가 캐릭터의 틀을 만드는 경우가 많잖아요. 서범석의 아토스는 어떤 캐릭터인가요?
“특히나 ‘삼총사’는 요소요소에 실제 유준상 배우의 톤이 굉장히 많이 녹아 있어요. 객석에 내려가는 거라든가. 중간중간 애드립으로 관객과 소통하는 부분 같은. 너무 심각하지 않게, 여유 있고 유쾌하게 볼 수 있게끔 하는 게 유준상 배우가 바라보는 뮤지컬 톤인데 그것이 삼총사에 많이 녹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작품을 할 때 나만이 할 수 있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많이 찾는 편이지만 ‘삼총사’는 이미 구축된 작품의 색깔이 있기 때문에 나만의 톤으로 갔다간 따로 놀겠다는 느낌이 오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적극적으로 작품에 부합해서 나가보자 생각했어요. 애드립도 더 많이 연구하고. 다만 놓지 않는 게 있다면 저는 항상 아토스가 군인이라는 걸 염두에 두고 연기해요. 어떤 대사,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군인의 톤을 갖고 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개인적으로 ‘삼총사’ 중 아토스의 넘버 ‘약속’을 무척 좋아합니다. 뮤지컬 배우 중에서도 노래 잘하는 배우로 손꼽히시는데요.
“뮤지컬에서의 노래는 노래 연기죠. 저는 노래 속에서 연기가 나와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뮤지컬 노래를 할 때 말하는 목소리로 많이 연습했어요. 그냥 말할 때와 노래할 때 목소리 톤이 거의 일치하게 말이죠. 가사 전달력을 위해서요. 가요 같은 건 많이 들으면서 ‘아 이런 가사였구나] 알수 있는데 뮤지컬은 그럴 수 없잖아요. 처음 듣는 관객의 귀에 정확히 꽂히게 해야 하죠.”

- 아토스는 삼총사의 리더죠. 실제로도 리더십이 강한 편인가요?
“어렸을 땐 그랬는데 뮤지컬 작업을 하면서 혼자 연습해야 하는 기간이 많았어요. 그래서 약간은 개인주의적이 되고 내 연습, 내 작업 위주로 챙기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이번 작품을 통해서 보다 많은 동료들과의 관계에 대해 배운 것 같아요. 계속 ‘우리는 하나’를 외치니까 공동체 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웃음) 마치 어렸을 때 가졌던 동료 의식으로 돌아간 느낌이랄까. 더 주변을 돌아보게 되고요. 계속 ‘정의는 살아있다’ 외치니까 질서도 더 지키고, 일상생활에서도 더 양보하게 되고요.”

- 왜 어렸을 때 같이 몰려다니는 친한 친구들을 묶어서 삼총사, 사총사 하잖아요. 지금도 그렇게 꼽을 만한 친구가 있으신지요?
“학창 시절엔 꼭 있었는데 지금은 늘 붙어 다니는 친구는 없고요. 뮤지컬 배우들 중에서는 앙상블 시절 친구들, 지하철 1호선 같이 했던 임진웅, 또 최민철, 김재만, 김장섭이랑 많이 친하고. 저는 또 형들을 좋아해요. 이희정, 김성기, 조승룡. 유희성 형. 제가 아무 것도 없을 때 그 분들을 롤 모델로 삼고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 임태경 씨도 서범석씨를 무척 따르는 것 같던데요. 작년에 하셨던 인터미션 콘서트에 갔었는데 객석에서 어떤 남자가 ‘우유빛깔 서범석’을 외쳐서 쳐다봤더니 임태경씨더라고요.
“아! 맞아요. 태경이랑 친합니다. 그걸 느끼셨구나. 태경이랑은 ‘불의 검’부터 같이 했고 취미(골프)도 같아요. ‘서편제’도 사실 제가 얘기해서 뒤늦게 합류하게 됐는데 너무 잘 해냈어요. 태경이가 연기를 잘하고 싶어 하거든요. 노래야 워낙 잘 하니까.”

- 요즘 들어 많이 받는 질문일 것 같은데, 아이돌과의 작업은 어떠신가요?
“저는 굉장히 좋아합니다. 같이 작업을 하면서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어요. 처음에 약간 적응을 못할 뿐이에요. 그들도 무대에 서기 위해 굉장히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고, 관객을 대하는 법은 이미 콘서트를 통해서 훈련이 되어 있죠. 다만 연기하는 법을 몰랐던 거고요. 준수(모차르트), 예성(남한산성)이, 이번에 규현이, 제이 다들 잘해요. 그들이 뮤지컬을 통해 얻어가듯이. 아이돌이 뮤지컬에 기여한 부분도 분명 있고. 그래서 긍정적으로 봅니다. 제가 웬만하면 긍정적으로 보는 스타일이라. (웃음)

- 1994년 창작뮤지컬 ‘번데기’로 데뷔하셨으니 햇수로 18년째 뮤지컬에 몸담고 계십니다.  배우로서 언제가 전환점이었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사실 첨부터 잘 풀렸어요. 앙상블 오디션은 보면 100% 다 됐어요. 그래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좋아하는 일을 끊이지 않고 했으니까요. 고민은 배역을 받으면서부터 시작됐어요. 1999년인가? ‘명성황후’에서 이토 히로부미 역을 맡게 됐는데 노래 한 곡 하는 게 그렇게 힘든 거예요. 그 후 2000년에 블루사이공을 했는데 역시 뻣뻣하게 했어요. 급기야 ‘명성황후’의 홍계훈을 하면서는 내 존재감에 대해 고민이 더 깊어졌어요. 그러던 중 ‘지하철 1호선’을 만났어요. 김민기 선생님(연출), 김윤석 형(조연출)을 만났죠. 윤석이 형은 그때도 이미 연기 철학이 확고한 사람이었어요. 하루는 형이 ‘네가 무대에서 불안한 건 연기를 너무 잘하려고 해서 그런 거 아니냐. 정확하게 하는 것부터 시작해봐라’ 하시더라고요. 그 말에 답을 찾기 시작하면서부터 좀 편해졌어요. 예를 들어  ‘밥 먹으러 가자’란 말이 있는데 정말 배고파서 밥 먹으러 가잔 말이 있고, 나는 배부른데 네가 때를 놓쳤으니 먹으러 가자가 있고, 네가 쏠 게 있으니 밥 먹으러 가자가 있고. 여러 가지가 있을 거 아니에요? 가장 정확한 게 뭔가를 찾기 시작한 거죠. 그 때부터 존재감이 생기기 시작한 것 같아요.”

- 데뷔작인 ‘번데기’부터 ‘불의 검’, ‘미스터마우스’, ‘명성황후’, ‘하루’, ‘사랑은 비를 타고’,  ‘위대한 캣츠비’, ‘라디오 스타’, ‘파이란’, 서편제 등 유독 창작을 많이 하셨어요.
“저는 창작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진짜 우리 정서를 담은 우리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생각했고, 그런 우리 것을 가지고 외국에 나가고 싶었어요. 지금도 좋은 창작이 외국으로 역수출 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으로 창작을 많이 했는데 외로워서 라이선스를 하게 된 거예요. ‘미스터마우스’를 할 때였어요. 작품을 본 관객은 다 서범석을 인정해 주는데 정작 메이저 뮤지컬 관계자들은 서범석을 모르는 거죠. 대극장에서 번역 뮤지컬을 안 하니까 모르는 거예요. 그러다 ‘노트르담드파리’에 프롤로 신부로 출연하게 됐고 그 작품으로 많은 사람들이 서범석을 알게 됐죠. 역이 저랑 너무 잘 맞았어요. 노래도 제가 잘 낼 수 있는 음역대로만 작곡이 되있고. (웃음)”

- 그렇게 선역, 악역, 창작, 라이선스, 시대극, 현대극... 다양한 역할을 하셨는데 필생의 배역을 만나셨나요?
“필생의 배역이 하나 남은 것 같습니다.”

- 혹시 계속 하고 싶다고 얘기해 오신 ‘헤드윅’인가요?
“그건 도전 정신으로 해보고 싶었던 거고요. ‘난 슬픈 사람이야. 난 불쌍한 사람이야, 나 좀 알아줘’가 아니라 ‘너희들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봐. 내가 어디가 어때서? 난 나야. 니들 나 몰라도 돼’ 라는 식으로 접근해 보고 싶고. 일단은 노래가 너무 좋아서 해보고 싶은 건데 안 시켜줄 거 같아요. (웃음) 제가 ‘헤드윅’을 한다면 좀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는데, 정말 잘할 수 있는 게 하나 남은 것 같아요. ‘맨오브라만차’의 돈키호테. 올 6월에 올라가는데 오디션을 보려고 합니다. 만약 된다면 연습 첫 날 노래와 대사를 다 외워 가고 싶어요. 목숨 걸고 싶은 작품입니다.”

- 그렇다면 돈키호테로 무대에 서는 게 올 해의 소망이신가요?
“네. 그리고 또 소망이 있다면 다른 장르의 경험을 쌓고 싶어요. 영화 한 편, 드라마 한 편. 이렇게 해보고 싶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지금처럼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마지노선을 마흔 다섯 살까지 보고 있어요. 뮤지컬계엔 조로(早老)가 있기 때문에. 이제 45세 이후의 배우 서범석을 준비할 때인 것 같아요. 물론 뮤지컬을 소홀히 하는 건 아닙니다. 무대를 떠날 수는 없는 일이죠.”

올 해로 마흔 둘. 스스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작품에 출연한 무대 경력 18년 차,  ‘범사마’로 불리며 많은 뮤지컬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서범석은 아직 자신을 ‘배우’로 소개하지 못한다. 그저 나이를 먹고 여러 경험을 쌓으며 한발한발 배우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고. 얼마 전 한 TV프로그램에서 박신양이 말한 ‘연기자적 양심’이란 말을 가슴에 새길 정도로 연기에 대한 고민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그다. 서범석은 앞으로 보여줄 것이 더 많은 ‘배우’다.

(뮤지컬 ‘삼총사’ : 1월 30일까지. 충무아트홀 대극장)

조수현(공연칼럼니스트) lovestage@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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