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해 보자. 서른 줄의 올리비아 핫세가 줄리엣을 연기하는 모습을,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소피 마르소가 라붐의 단발머리 여학생으로 복귀하는 장면을. 대중의 사랑을 담뿍 받은 캐릭터를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연기하는 것은 배우에겐 일종의 도박이랄 수 있다. 대중에게 각인된 이미지를 거스르고 환상을 깰 수 있기 때문. 여기 서른을 넘긴 나이에 20대 한창 시절 연기했던 아리따운 처녀 역할로 돌아온 여배우가 있다. 뮤지컬 배우 김소현. 2001년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크리스틴 역으로 뮤지컬계의 신데렐라로 떠오른 이후 탄탄한 커리어를 쌓아온 그녀가 2009년 같은 역할로 다시 무대에 올랐다. 이 쉽지 않은 도전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무척 호의적, 역시 김소현이라는 찬사가 끊이질 않는다. 이는 작품에 대한 변치 않은 애정과, 발전된 캐릭터를 위한 노력, 그리고 도무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동안의 외모, 3박자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첫사랑과 재회한 기분으로 살고 있다는 그녀, 김소현을 만나보자.


- 뮤지컬 첫사랑 ‘팬텀’과의 가슴 벅찬 재회

‘그리스’나 ‘지킬앤하이드’ 등 여러 차례 재공연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김소현이지만 이번만큼 부담이 된 적은 없었다. 1000대 1의 치열한 경쟁률, 높아진 팬들의 기대치, 10개월이 넘는 긴 공연 기간 등. 그러나 그 어떤 것도 크리스틴으로 다시 무대에 서고 싶은 그녀의 열망을 앞서지는 못했다.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품인 만큼 아쉬움도 컸기에 앞뒤 잴 겨를도 없이 무조건 하고 싶었단다. ‘시켜만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자세로 오디션에 임했고 다시 크리스틴에 발탁됐다,
“오디션에 너무 훌륭한 배우 분들이 많았는데 설도윤 대표님이 옛날 멤버들을 좋게 생각해주신 것 같아요. (윤)영석이 오빠랑 다시 팬텀과 크리스틴으로 만나게 된 감회가 굉장히 새로웠어요. 둘 다 첫 뮤지컬이었기 때문에. 다시 선택해 주신 것이 너무 감사했고 발전된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서 열심히 연습할 수밖에 없었던 거 같아요.”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다 뮤지컬에 입문했던 신인 시절엔 뭣 모르고 용감하게 노래만 열심히 불렀던 것 같다는 김소현은 이번엔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단다. 극중 무용수에서 오페라의 디바로 변신하는 크리스틴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 발톱이 으스러질 정도로 무용 연습을 하고, 뮤지컬에 맞게 바뀐 노래 소리를 성악적인 발성과 창법으로 되돌리기 위해 공을 들였다. 1년 쯤 전부터 시작한 금주가 목 관리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고. 공연 중 13벌의 의상을 갈아입어야 하기 때문에 옷 빨리 갈아입기의 고수가 되었다며 웃음보를 터뜨린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해 처음 무대에 오른 날. 그 날의 긴장과 떨림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한다.
“크리스틴의 첫 넘버인 ‘Think of me’를 부르기까지 30여분 정도가 걸리는데 그 전까지 숨도 잘 안 쉬어지고 오금이 저릴 정도로 떨렸어요. (웃음) 마침내 ‘Think of me’를 부르는데 정말 만감이 교차하더라고요. 다시 데뷔하는 느낌도 들고. 요즘도 이 노래를 부를 때 가장 떨리고 흥분된답니다.”
다시 데뷔하는 느낌이었다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 날의 설렘과 흥분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렇다면 2001년의 크리스틴과 2009년의 크리스틴은 무엇이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을까?
“2001년에는 크리스틴의 심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어요. 사랑을 갈구하는 팬텀에게 등을 돌리는 크리스틴이 나쁘게 생각되기도 했고, 특히 팬텀에게 반지를 돌려주는 씬은 참 싫었죠. 지금 와서 생각하니 팬텀에 대한 크리스틴의 감정은 존경과 두려움이 섞인 복합적인 감정의 사랑인 것 같아요. 그렇지만 팬텀이 확신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떠날 수밖에 없었고,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의미로 반지를 돌려준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라울이 편하고 보호받을 수 있는 존재라면 두렵지만 스릴 있는 사랑은 팬텀 쪽이죠. 그런 마음으로 연기하고 있는데 그런 크리스틴의 감정이 관객 분들에게 잘 전달이 됐으면 좋겠어요.”
8년이 지나 변한 것은 김소현의 크리스틴 만이 아니다. 김소현은 팬텀으로 재회한 윤영석의 성숙해진 노래와 연기에 놀랐고 새롭게 호흡을 맞추는 팬텀 역의 양준모, 라울 역의 정상윤, 홍광호와의 작업도 색다른 즐거움를 준다며 동료들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크리스틴 더블인 최현주 씨는 일본 무대에서 저보다도 크리스틴으로 많이 선 친구라 서로 좋은 모니터가 되요. 영석 오빠가 목소리는 위압적이지만 어딘지 동정심을 유발하는 팬텀이라면 준모 씨의 팬텀은 음산하면서도 섹시한 느낌이 있죠. 상윤 씨는 노래는 약간 팝적이지만 캐릭터적인 면에서 좀 더 보듬어주고 보호받는 느낌이 들어서 좋고요. 광호 씨는 성악 전공자가 아닌데도 굉장히 클래식한 목소리를 가졌죠. 내년 1월엔 팬텀으로 무대에 서게 될 텐데 어떤 느낌의 팬텀이 나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요. (웃음)”


- 성숙,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하는 것

‘오페라의 유령’의 크리스틴으로 데뷔해 ‘지킬앤하이드’의 엠마, ‘대장금’의 장금이, ‘마이 페어 레이디’의 엘리자 등을 거친 김소현의 커리어는 화려하기 그지없다. 본인은 운 좋게 대작의 주인공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말하지만 그녀가 운과 타고난 재능만으로 여기까지 왔을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비단길이었을 것만 같은 김소현의 지난날에는 남모를 눈물과 좌절의 순간도 많았다. 남들에겐 프리미엄으로 보일 서울대 성악과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오히려 영역을 한정시키는 굴레였고, ‘노래만 잘하고 연기는 별로다, 늘 예쁜 역만 맡는다’는 평이 싫어 파격적인 연극과 사극 드라마의 악역에도 도전했다. 그리고 그런 선택은 결과적으로 김소현 만의 색깔을 완성시키는 촉매가 되었다.
“나름 다양한 배역을 맡았다 생각하는데 히트 친 작품의 캐릭터가 공주 옷 입고 나풀나풀 다니니 늘 비슷해 보이시나 봐요. (웃음) 한동안은 그런 이미지에 대해 참 고민이 많았죠. 무조건 파격적인 변신이 하고 싶어서 드라마 ‘왕과 나’에도 출연하고 연극 ‘미친 키스’에도 도전했어요. 특히 ‘미친 키스’는 무대에서 내려가고 싶었던 게 한 두 번이 아니었을 정도로 어렵고 힘든 작업이었어요. 그런 도전들이 저를 단단히 다지는 계기가 됐죠.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최대한 살려서 보여드리자는 거예요. 연기 변신도 좋지만 배우가 자기만의 색깔이 있고, 그것을 더 발전시켜나가는 것도 못지않게 어려운 일 아닐까요? 물론 앞으로도 다양한 경험을 쌓기 위해 다른 분야에 도전을 하겠지만 예전보다는 안전한 경우를 선택할 것 같아요. (웃음)”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냉정히 판단하는 것! 그것이 바로 김소현이 배우로 성숙해 가기 위해 찾아낸 방식이다. 여배우라면 탐나는 배역을 도맡아 연기해왔지만 아직도 하고 싶은 역이 너무 많다는 김소현은 사랑스러운 워커홀릭이기도 하다.
“공연에 묶인 삶이 저는 좋아요. 너무 피곤할 때는 쉬고 싶기도 하지만 막상 며칠만 쉬어도 이상하고 살아있는 것 같지 않고요. (웃음) 그게 해가 갈수록 심해져요. 뮤지컬 배우들이 그래서 결혼을 늦게 하나 봐요. (웃음) 하고 싶은 작품도 너무 많죠. ‘레미제라블’, ‘위키드’, ‘미스사이공’, ‘메리포핀스’... ‘웨스트사이드스토리’의 마리아를 해봤으니까 ‘사운드오브뮤직’이랑 ‘지저스크라이스트슈퍼스타’의 마리아까지 해서 마리아 전문 배우가 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도 해봤어요. (웃음)”
관객의 열정적인 커튼콜에 매혹 당해 오페라 가수에서 뮤지컬의 길로 들어선지 8년. 뮤지컬과 8년 간 열애 중인 김소현의 현재 사랑은 당연히 ‘오페라의 유령’이다.
“요즘 제 일상의 90%는 팬텀이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이렇게 1년 크리스틴으로 살고 나면 정말 원은 없을 것 같아요. 사실 이거 하고 뮤지컬을 그만둬야 돼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다음을 계획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팬텀만 보이고, 뭘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요. 참 행복한 와중에도 그런 것들이 좀 걱정이 되네요. 제가 커튼콜 때 너무 울먹이면서 나온다고 가식이다 이런 분도 계신데 100% 제 솔직한 감정이에요. (웃음) 청순함과 강인함이 조화된 저만의 크리스틴을 보여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테니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봐주세요. (웃음)”

인터뷰를 위해 만난 김소현은 화장기 없는 수수한 모습이었지만 특유의 밝은 미소와 꾸밈 없는 태도로 주변을 화사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존재였다. 작품에 올인해 크리스틴으로 살아가고 있는 김소현. 그녀에게 물었다. 크리스틴으로 무대에 서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일 텐데, 공연이 끝난 후 정말 미련이 남지 않겠냐고. 그녀는 ‘칼롯타(극중 크리스틴에게 주역 자리를 빼앗기는 오페라 프리마돈나 역)로 다시?’ 하며 함박웃음을 지어보였다. 팬텀을 향한 그녀의 사랑은 아마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2009년 9월 23일부터 2010년 8월 8일까지. 샤롯데씨어터. 윤영석, 김소현, 양준모, 최현주, 홍광호, 정상윤 등 출연)

조수현 lovestage@empal.com
[공연문화의 부드러운 외침 ⓒ 뉴스테이지 www.newstage.co.kr]

뉴스테이지  

<저작권자 © 뉴스테이지,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