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바탕 꿈을 꾸고 난 느낌이다. 그것도 아주 환상적인 꿈 말이다. 꿈속에는 나라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진 고독한 왕이 있고, 사랑에 목마른 여인들이 있고, 대의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자들이 있으며, 그러한 인간들을 굽어보는 천인(天人)들이 있다. 판타지아(Fantasia)! 뮤지컬의 판타지아가 있다면 바로 이 작품, ‘바람의 나라’가 그것이겠다. 흔히 판타지아란 환상곡, 즉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악상이 떠오르는 대로 작곡한 악곡을 말한다.
창작 뮤지컬 ‘바람의 나라’는 2006년 초연 당시 기승전결식 스토리라인을 배제하고 시제를 뒤섞은 독특한 내러티브와 감각적인 珠羚�, 시낭송과 같은 화법 등 기존의 뮤지컬 공식을 뒤집은 실험적 시도로 마니아층을 형성한 작품. 2007년 재공연 이후 다시 돌아온 2009 바람의 나라는 초연의 신선한 느낌은 그대로 가져가되 극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조명 보강, 음향 개선, 몇몇 넘버의 편곡 및 가사 수정 작업 등을 거쳤다. 무대 위에 다시 부는 ‘바람의 나라’의 키워드.
- 원소스 멀티유즈(One Source Multi Use)
뮤지컬 ‘바람의 나라’는 김진의 동명 만화가 원작이다. 만화 ‘바람의 나라’는 전쟁의 신이라 불린 고구려 3대 대무신왕 무휼의 전쟁과 사랑, 그리고 그의 아들 호동 사이에 낀 살(煞)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작품. 1992년 첫 선을 보인 이래 아직도 연재 중인 대하극으로, 최근 대중문화계의 트렌드로 자리잡은 원소스 멀티유즈(하나의 원작이 다양한 분야나 장르에서 활용되면서 고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비즈니스 구조)를 말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작품 중 하나다.
만화 단행본만 100만부가 넘게 팔린 ‘바람의 나라’는 1996년 게임으로 만들어져 이른바 대박이 났고, 2004년에는 소설로도 출간되었으며, 2006년 뮤지컬, 지난 해에는 송일국 주연의 드라마로도 제작된 바 있으니 그야말로 원소스 멀티유즈의 원조이자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지나친 리메이크는 지양되어야 마땅하지만 ‘바람의 나라’는 잘 키운 문화 콘텐츠가 얼마나 다양한 소비로 이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 이미지(Image)
영화 ‘벨벳 골드마인’에 등장하는 글램록 스타 브라이언 슬레이드는 오스카 와일드를 인용하며 이렇게 읊조린다. ‘인생은 이미지다’라고. 알아야 할 대상이 너무 많은 시절을 사는 우리는 이미지를 통해 대상을 판단하고 정의한다. 그만큼 이미지가 중요한 시대다.
뮤지컬 ‘바람의 나라’는 초연 당시 이미지 뮤지컬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탄생시킨 작품. ‘바람의 나라’의 무대 버전인 뮤지컬 ‘바람의 나라’는 스토리를 기승전결식 내러티브로 설명하기보다 원작에서 11개의 독립된 장면을 차용하여 각각의 이미지와 배우의 몸짓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새로운 방식을 택하였다. 방대한 원작을 지루하게 나열하느니 주요 에피소드에 강력한 임팩트를 실어 관객에게 전하기 위함이다.
원작 캐릭터의 이미지에 최대한 가까운 인물을 무대에 세우기 위해 캐스팅에도 공을 들였다. 만화 속 이미지 컷과 만화책을 찢고 나온 듯한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교차하는 장면은 관객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 퓨전(Fusion)
동서양의 만남이란 점에서도 ‘바람의 나라‘의 실험성은 빛난다. 때문에 ’바람의 나라‘는 우리 고구려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시대극이라기보다는 판타지극에 가까운 작품이다. 부도(符都), 살(煞), 신수(神獸), 효(孝) 등 작품 속에 녹아 있는 지극히 동양적인 가치가 고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같은 연출의 힘이라 하겠다.
국악, 클래식, 록, 하우스, 힙합, 테크노 등 다채로운 장르의 음악이 뒤섞인 17곡의 넘버, 한국 무용의 절제미에 현대 무용의 역동성이 어우러진 안무, 시대를 예측하기 힘든 몽환적인 의상, 시공을 초월하는 추상적인 무대 등에는 한국적 전통적 정서와 현대의 감성을 조화시키고자 한 제작진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대사보다 강력한 몸짓
‘바람의 나라’에서 등장인물의 심리와 극의 상황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대사가 아닌 몸짓이다. ‘바람의 나라’는 무용극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안무가 돋보이는 작품. 현대무용가 안애순 씨가 탄생시킨 ‘바람의 나라’의 안무는 여느 뮤지컬처럼 스토리를 부연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몸짓과 동선, 안무 자체가 의미를 전달하는 또 하나의 대사이다.
관객은 무휼의 독무(獨舞)를 통해 최고 권력자의 고독과 번뇌를 읽고, 혜압의 한 판 굿을 보며 연인을 떠나보내는 슬픔을 이해하고, 연의 처절한 몸부림을 보며 자식을 지키려는 모정을 느낀다. 특히, 2막 초반 12분여 에 걸친 대규모 전쟁 씬은 ‘바람의 나라’의 백미. 전쟁 씬만으로도 ‘바람의 나라’는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 뮤지컬 ‘바람의 나라’는?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서울예술단의 정기 창작 뮤지컬. 고구려 3대 대무신왕 무휼의 전쟁과 사랑, 그의 아들 호동 사이에 낀 살(煞)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강렬한 비주얼과 실험성 짙은 연출이 돋보인다. 친절한 내러티브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시놉시스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관극하도록 하자. 보다 쉽게 극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6월 30일까지.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이지나 연출. 고영빈, 금승훈, 김태훈, 양준모, 도정주 등 출연.
조수현 lovestage@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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