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제는 하늘이 내려주신 벗’이라는 옛말이 있다. 공감한다. 그런가 하면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한 핏줄인 형제끼리의 싸움만큼 끔찍한 것은 없다.’ 이 또한 공감한다. 형제는 사람이 태어나 인생에서 마주하게 되는 최초의 라이벌이자 최후까지 손잡을 수 있는 동반자이다.
겨울 공연가에서 관객의 사랑을 담뿍 받고 있는 뮤지컬 ‘형제는 용감했다(이하 형제)’는 이처럼 핏줄로 맺어져 미우나 고우나 외면할 수 없는 형제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동명의 헐리우드 고전 영화를 떠올리며 진정 용감한 형제들의 활극을 기대한다면 오산. 공연 내내 관객의 웃음과 눈물을 쏙 빼는 코믹신파 뮤지컬 ‘형제는 용감했다’의 키워드.
- 진상형제 ‘봉 브라더스’
‘형제’의 석봉과 주봉은 대놓고 앙숙인 사이. 우유부단 팔랑귀인 석봉은 잇단 사업 실패로 가산을 탕진하고, 고집불통 삐딱이 주봉은 대학 시절 시위를 하다 잡혀 전과자가 된 뒤 고시를 준비하는 백수다. 사사건건 대립하면서 집안의 물을 흐리는 석봉과 주봉. 안동 이씨 종갓집의 후손들로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라났건만 이제 이들은 가문의 어르신들에게 ‘썩을 놈 석봉이, 죽일 놈 주봉이’로 불리는 가문의 수치일 뿐이다.
설상가상 이들 ‘봉 브라더스’는 형제간에 사이가 나쁜 것도 모자라 아버지와도 의절 상태다. 3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유가 무심한 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 그러던 중 아버지의 부고를 받고 마지못해 귀향, 재회한 ‘봉 브라더스’는 아버지가 남긴 로또 복권을 놓고 또 다시 충돌하며 진상을 떨어댄다.
- 어깨가 무거운 장남 ‘석봉’ vs 2인자의 설움 ‘주봉’
대한민국 하� 아래 장남은 유독 어깨가 무겁다. ‘형제’의 석봉이도 예외가 아니다. 제아무리 집안을 말아먹은 망나니 석봉이라도 장남의 책임감에서 자유로울 순 없는 것. 극중 석봉이 부르는 솔로곡에는 종갓집 장남으로서의 애환이 잘 드러난다. 제 딴엔 잘해보려고 이리저리 벌인 사업은 몽땅 실패하고. 집안의 기대와 관심에 부응하기에는 자신의 능력이 모자람을 잘 알고 있는 석봉. 똑똑한 동생에게 은근한 자격지심이 있는 터에 자신을 무시하는 주봉이 곱게 보일 리 만무하다.
석봉만 힘들쏘냐. 주봉도 할 말이 많다. 자신이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명문대에 진학해도 집안의 우선순위는 언제나 형인 석봉의 몫이었다. 어려서부터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던 주봉. 주봉은 진심으로 사랑했던 연상녀와의 결혼을 망친 것도 형이요, 사업 실패로 재산을 말아 먹어 자신의 유학길을 막은 사람도 형이라고 생각한다. 번번이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석봉을 고분고분 형으로 대접하기엔 주봉은 지나치게 뻣뻣한 사람이다.
- 형제의 여자(?) ‘오로라’
조의금 배분 문제로 다투던 석봉과 주봉 앞에 나타난 묘령의 여인 ‘오로라.’ 자신을 안동 시내 법률사무소의 사무원이라고 밝힌 그녀는 아버지가 숨겨둔 1등 당첨 로또 복권의 존재를 알린다. 복권을 찾기 위해 한 바탕 소동을 벌이는 석봉과 주봉. 여기에다 오로라를 사이에 둔 사랑 싸움까지 더해져 형제의 갈등은 극한으로 치닫는다.
가수 아이비를 닮은 오로라는 묘한 관능미와 백치미를 풍기며 웃음의 한 축을 담당하는데, 그녀가 ‘난 목마른 여자, 난 메마른 여자’를 외치며 형제를 홀리는 장면은 압권. 오로라의 정체는 강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생략하도록 한다. 궁금한 분들은 직접 확인하시길.
- 수줍은 아버지의 사랑
석봉과 주봉이 끝까지 반목하다 끝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물론 이들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한다. 그러나 ‘형제’는 비단 석봉과 주봉의 화합만을 다루고 있지 않다. 의절했던 아버지와의 화해 또한 작품의 큰 줄기다. 자신들은 몰랐던, 아니 알려 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진심. 뒤늦게 가슴 아파하는 석봉과 주봉을 비난하기엔 나 역시 언제나 내가 우선인 이기적인 자식에 불과하다. 문득 신해철의 노래 ‘아버지와 나’의 가사가 떠오른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아직 수줍다. 그들은 다정하게 뺨을 부비며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 빛나는 연출로 풀어낸 코믹신파 뮤지컬
다음 달 8일까지 공연되는 ‘형제’는 지난해 3월 초연 때 뜨거운 반응을 얻어 제 2회 뮤지컬 어워즈에서 베스트 소극장 뮤지컬 상을 수상한 웰 메이드 뮤지컬이다. 중극장으로 무대를 옮긴 이번 앙코르 공연에선 넘버와 캐릭터를 추가해 소소한 재미를 더했다.
장유정의 연출은 여전했다. 시골 양반집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무대에서 간결하게 보여 지는 한국의 장례 문화가 인상적이며 예상을 뛰어 넘는 설정은 큰 웃음을 준다. 굽은 허리를 갑자기 꼿꼿이 세우고 힙합퍼로 변신하는 칠순 노인을 비롯해 엄숙한 분위기에서 갑자기 최신 댄스를 춰대는 어르신들, 러브송을 연상시키는 석봉과 주봉의 말다툼 등에 시종일관 공연장은 관객들의 웃음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부모님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객석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린다. 웃음이 눈물로, 코믹이 신파로 순식간에 뒤집히고 종국에는 훈훈한 미소로 마무리되는 ‘형제’에서는 따뜻한 웃음과 감성을 전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장유정 연출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조수현 lovestage@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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