굵직한 화제작이 즐비한 2009년 연말 뮤지컬 라인업 가운데 독특한 설정의 창작뮤지컬 한편이 공연 마니아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모든 감정과 대사가 ‘아킬라(AKILLA)’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가상의 시대를 배경으로 두 연인의 목숨을 건 불멸의 사랑을 담아낸 뮤지컬 ‘아킬라’가 그것. 무엇보다 ‘아킬라’가 기대되는 이유는 유명 싱어송라이터 송시현이 작곡과 연출을 맡았다는 점이다. 10월 9일 첫 공연을 앞두고 막바지 연습에 한창인 송시현을 만나 베일에 싸인 뮤지컬 ‘아킬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음악만으로 소통하는 뮤지컬 ‘아킬라’, 가장 뮤지컬다운 뮤지컬 될 것

송시현에게 뮤지컬 ‘아킬라’는 아픔이 있는 작품이다. 애초 계획대로였다면 2007년에 초연되었어야 했던 뮤지컬 ‘아킬라’는 약속 되었던 투자가 이뤄지지 않아 연습이 거의 끝난 상태에서 공연을 접어야 했다. 당시 제작까지 겸했던 송시현은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지만 작품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그는 쓰러지지 않고 작품을 지켜냈다.

“작품적인 면에선 오히려 약이 된 것 같아요. 덕분에 프리 프로덕션까지 포함해 5년이라는 긴 준비 기간을 가질 수 있었고(웃음), 여러 가지를 실험하고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으니까요. 이번에는 작곡과 연출만 하면서 작품에만 집중했어요.”

뮤지컬 ‘아킬라’는 ‘인류사에 있어 언어보다 음악이 먼저였다’는 한 문장에서 시작되었다. 대학에서 실용음악을 가르치던 송시현은 강의 준비를 위해 뒤적이던 책에서 우연히 이 문장을 발견했고, 이미 알고 있던 이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음을 느꼈다. 언어가 없던 시절에 음악만으로 소통하는 이야기를 그려낸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뮤지컬다운 뮤지컬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그것은 뮤지컬 ‘아킬라’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영화나 드라마에 비해 뮤지컬은 언어적 한계를 극복하기 힘든 부분이 있고, 그것은 세계무대로 진출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죠. 한국 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정서가 담긴 드라마를 언어 외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해외에서 어필할 수 있는 훌륭한 장치를 안고 가는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아킬라(AKILLA)’라는 단어도 어느 나라 사람이나 발음하기 쉬울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습니다. 죽음을 뛰어넘은 사랑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Kill이라는 단어를 가운데 놓았고요. A가 A를 죽였다는 의미도 되고, A로 시작해서 A로 끝난다는 건 끊임없이 순환하는 인류사를 뜻하기도 하죠.”

이렇게 탄생한 뮤지컬 ‘아킬라’는 원시의 이미지를 간직한 제3시대를 배경으로 오직 ‘아킬라’라는 세 음절로 이뤄진 단어 조합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아킬라 부족은 불을 다룰 수 있고 과학과 예술이 매우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언어의 발달이 필요치 않았던 것. 언어가 없던 시절의 사랑과 문명 이야기에서 출발한 뮤지컬 ‘아킬라’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만나 비로소 완성된 드라마를 갖게 되었다.

“예술 작품으로서 대중에게 다가서는 가장 기본적인 메시지는 결국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세계무대를 염두에 두고 관객에게 보다 빨리 흡수될 수 있는 드라마가 없을까 궁리하다보니, 제가 생각하고 있는 구조와 딱 들어맞는 명작이 있었고 그게 바로 ‘로미오와 줄리엣’이었죠. 남녀 주인공의 이름인 ‘로’와 ‘주’도 거기서 따온 것이고요. 그렇지만 우리 작품은 단순한 남녀 간의 애정이 아닌 인류사적인 측면에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뮤지컬 ‘아킬라’에서는 대단히 메시아적인 줄리엣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웃음).”

- 뮤지컬은 음악 인생의 종착역, 뮤지컬 한류 위해 힘쓸 것

감성적인 멜로디의 귀재 송시현이 작곡을 담당한 작품이니만큼 뮤지컬 ‘아킬라’에서 가장 기대가 되는 부분은 뭐니 뭐니 해도 음악이다. 송시현은 한국적 정서가 담긴 월드 비트를 기본으로 오케스트레이션이 가미된 그랜드한 음악이 될 것이라 귀띔했다. 이미 OST도 제작된 상태. 그는 '로'가 부르는 주제곡 ‘아이 아킬라 유’가 뮤지컬 팬을 넘어 대중적인 사랑을 받길 바란다며 음악에 대한 자신감을 피력했다.

“한국에선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연극에서 발전했어요. 배우도 스태프도 연극을 전공한 분들이 많고, 뮤지컬학과가 생긴 것도 얼마 안 되죠. 그래서 창작뮤지컬은 대개 노래보다 대사가 많고 스토리 역시 대사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요. 저는 음악가로 뮤지컬을 시작한 만큼 음악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뮤지컬을 만들고 싶어요.”

30곡이 넘는 넘버를 소화해내야 하기에 캐스팅에서 가장 중요시한 부분도 배우의 가창력이었다. 쟁쟁한 중견들이 중심을 잡은 가운데 윤형렬, 문혜원, 문종원 등 검증된 가창력을 지닌 떠오르는 뮤지컬 스타들이 주연으로 캐스팅됐다. 그 중 남자 주인공 ‘로’로 발탁된 아이돌 그룹 슈퍼쥬니어 멤버 성민의 캐스팅이 눈길을 끄는데, 송시현은 연습 기간 동안 가장 성실하고 열심히 노력한 배우로 성민을 꼽으며 그에 대한 신뢰를 드러냈다.

“내키지 않았던 게 사실이에요. 제가 연예인들의 뮤지컬 진출에 마냥 호의적인 사람도 아니고. 그런데 오디션 공지를 하기도 전에 미리 오디션을 보고 싶다고 연락이 와서 한번 보기나 하자 싶었죠. 명지대에서 뮤지컬을 전공하고 있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답니다. 그런데 이 친구 마스크가 제가 상상하고 있던 ‘로’인 거예요(웃음). 거기에다 공개해둔 넘버를 모조리 외워오는 성의를 보였고요. 자세가 됐다 싶었죠. 아니나 다를까 연습 기간 동안 가장 노력하고 가장 성실했어요. 연습 시간에 늦을까봐 스케줄이 끝나면 숙소로 가지 않고 곧장 연습실로 와서 연습실 바닥에서 자는 거예요. 한국 최고 아이돌 중의 한 명이 말이죠. 어리지만 이미 훌륭한 예술가라고 생각합니다.”

뮤지컬이라는 단어도 모르던 중학교 2학년,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단체관람으로 접한 뒤 뮤지컬의 매력에 눈떴다는 송시현이 뮤지컬과 인연을 맺게 된지도 어언 10여 년이 흘렀다. ‘한바탕 웃음으로’를 비롯해 수많은 히트곡을 써낸 싱어송라이터였던 그는 2000년 MBC가 제작한 어린이 뮤지컬 ‘알라딘의 요술램프’의 음악을 작곡하면서 뮤지컬계에 발을 들인 뒤 5년 전쯤 부터는 다른 활동을 접고 뮤지컬에 올인 하다시피 하고 있다. 뮤지컬이 지금까지 해왔던 작업 중에 가장 재밌고 잘 맞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꿈이었던 그가 가수로, 작곡가로, 앨범 제작자로, 작가로 다양한 경험을 쌓은 것도 결국 뮤지컬을 하기 위한 훈련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최근에는 ‘썸(SUM)’이라는 뮤지컬 크리에이티브 회사까지 차렸다. 창작 뮤지컬이 발전하기 위해선 크리에이티브가 빨리 확고해져야겠다는 생각에서다.

“10여년 뮤지컬을 해오면서 물질적인 면만을 따지면 아직까진 마이너스예요. 하지만 저는 희생과 노력 없이는 터닝 포인트가 올 수 없다 믿어요. 한국 영화가 헐리우드 영화보다 사랑받게 된 전환점이 있었던 것처럼 한국 뮤지컬도 언젠가는 그런 전환점을 맞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에 일부분이라도 기여하는 것이 저의 소망이고요. 뮤지컬 ‘아킬라’는 그런 바람이 담긴 첫 작품이 될 겁니다. 잘 키워나가야죠. 저는 뮤지컬 ‘아킬라’가 한국에서는 가장 세계적인 작품, 세계 속에서는 가장 한국적인 작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0월 9일부터 11월 8일까지. 한전아트센터. 송시현 연출. 윤형렬, 성민, 문혜원, 문종원 등 출연)


조수현 lovestage@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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