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고 일어나 보니 스타가 되었다!’ 작품 하나로 벼락 스타가 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목격한다. 그리고 그렇게 반짝 하다 사라지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차곡차곡 묵묵히 자신의 커리어를 쌓으며 대중의 뇌리에 스펀지처럼 스며드는 배우가 있다. 이렇게 은근히 스며든 존재감이 더 떨치기 힘든 법. 오늘의 인터뷰이가 그렇다.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2006년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의 앙상블로 데뷔한 이 배우는 ‘그리스’, ‘위대한 캣츠비’, ‘사랑은 비를 타고’, ‘컴퍼니’, ‘씨왓아이워너씨’ 등 창작과 라이선스를 오가며 내공을 다지다가 마침내 2009년, 한 남자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살인에 동참하는 ‘나(네이슨)’로 무대에 섰다. 그리고 관객은 처절하고 안쓰러운 사랑을 하는 이 남자에 깊이 빠져들었다. 오늘의 인터뷰는 ‘쓰릴미’ 시즌3가 낳은 보석 ‘정상윤’이다.
- 잊을 수 없는 ‘나’를 보내고
‘쓰릴미’가 막을 내린지 한 달 이상이 흘렀다. 그 동안 못 만났던 친구들도 만나고, 공연도 보고, 여행도 다녀오면서 모처럼 백수 모드로 재충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정상윤은 너무 쉬느라 체중이 2kg이나 불었다며 웃는다. 편안한 미소에서 ‘쓰릴미’ 속 네이슨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네이슨과 저는 끝났어요. (웃음) 물론 아쉽죠. 네이슨으로 무대에 서는 동안 너무 좋았으니까요. 남자를 사랑해서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는 캐릭터를 이해하기가 쉽진 않았지만요. 마지막 공연이 끝나고 얼마 동안은 공허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이제는 완전히 보냈어요.”
수많은 마니아를 거느리고 있는 ‘쓰릴미’의 시즌3는 앞선 두 번의 시즌과는 작품의 해석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흑백 영화를 보듯 아련했던 극의 분위기에는 현실의 색채가 입혀지고 어둡기만 했던 캐릭터에는 스무 살의 발랄함이 묻어났다. 바뀐 극의 분위기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쓰릴미 마니아들도 적지 않았다. 정상윤이 창조한 ‘나’ 역시 마찬가지. 애절하게 ‘그(리처드)’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은 가련하기 그지없지만 순간순간 객석에 보여주는 눈빛은 무척이나 섬뜩하다. ‘쓰릴미’ 사상 가장 지능적이고 계획적이지만 또한 사랑 앞에서 가장 철저하게 무너지던 네이슨이었다.
“이전 시즌에 적응이 돼있었던 팬 분들은 받아들이기 힘드셨을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쓰릴미’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인 만큼 최대한 그것에 가깝게 접근해보자는 것이 연출님이나 배우들의 공통된 생각이었어요. 제 경우엔, 많은 분들이 찌질한 네이슨이라고 표현하셨는데요. (웃음) ‘네 찌질함만 그리웠다’는 리처드 대사의 영향 때문인가? 그런 얘기를 많이 들어서인지 지난 시즌에서 리처드를 연기했던 동호가 보고는 이렇게 안 찌질한 네이슨은 처음이라고 얘기해 줘서 기분이 좋더라고요. (웃음)”
지난 시즌들을 객석에서 관람할 때까지만 해도 정상윤은 자신이 ‘쓰릴미’에 출연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도 ‘나’를 하게 되리라고는.

“애초에 제의가 들어온 것은 ‘그(리처드)’였어요. 당시 ‘씨왓아이워너씨’에서 워낙 센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그’가 어울린다는 말을 많이 해주셨고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상대적으로 강하고 리드하는 ‘그’와 상대적으로 약하고 끌려 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나’ 사이에서 조율을 하다가 ‘나’를 택했죠. 저에게도 새로운 도전이었고 결과적으로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가지 않은 길, ‘그’에 대한 아쉬움은 없을까?
“리처드도 정말 탐나는 캐릭터죠. 정상윤의 네이슨이 새로웠듯이 지금까지의 리처드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줄 자신도 있고요. 쓰릴미 마니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리처드가 이런 느낌일 수도 있다,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는 걸요. 제가 생각하는 리처드는 강함 속에 부드러움이 살아 있는 캐릭터인데, 솜사탕이나 크림 같은 부드러움은 아니고요. 뭐랄까. 고양이 같은? 아무튼 완전히 뒤집어 주고 싶다니까요 (웃음). 네이슨이든 리처드든 ‘쓰릴미’는 꼭 다시 하고 싶은 작품이에요.”
- ‘쓰릴미’는 과정도 결과도 행복했던 작품
정상윤에게 ‘쓰릴미’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깨닫게 해준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쇼적인 뮤지컬보다는 드라마가 강한 작품이, 극적인 캐릭터보다는 잔잔함으로 관객을 설득하는 캐릭터가 자신과 잘 맞는 것 같단다. 대작 뮤지컬의 드라마틱한 캐릭터를 해보고 싶어하는 대부분의 배우들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심심해 보일 수 있는 뮤지컬 ‘컴퍼니’의 바비 역으로 무대에 서는 것을 꿈꾸는 이유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전 힘주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 잔잔한 연기가 더 어렵기 때문에 도전 의식이 생기기도 하고요. 바비는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바람둥이죠. 극적이지는 않지만 워낙 다채로운 매력을 동시에 보여줘야 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꼭 해보고 싶어요.”
더불어 ‘쓰릴미’는 그를 보다 많은 대중에게 알리는 기회가 되어준 고마운 작품이다. ‘쓰릴미’에 출연한 많은 배우가 그랬듯이. 팬클럽 회원 수가 수백 명이나 늘었다며 배시시 웃는다. 팬들의 관심이 고맙기만 하다는 정상윤은 아무리 피곤해도 팬들의 사인 요청을 거절하는 법이 없다고.
“‘쓰릴미’가 워낙 작품이 좋고 마니아층이 탄탄한 작품이니까 어느 정도 잘 될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예상보다 저를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많이 생겨서 너무 좋고 감사하죠. 비싼 돈 내고 보러 오신 분들인데 당연히 해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사인이나 사진 요청을 하시면 다 응해드렸어요. 그런데 나중엔 귀갓길을 기다리시는 분들이 너무 많아져서……. (웃음) 피곤하다고 거절하면 변했다는 소릴 들을까봐……. (웃음) 앞으로도 할 수 있는 한 다해드릴 생각이에요.”
정상윤은 ‘쓰릴미’를 결과 뿐 아니라 과정도 즐거웠던 작품으로 기억한다. 팀워크가 워낙 좋았기 때문. 특히 리처드를 연기한 김우형, 김산호는 죽이 잘 맞는 동갑내기 친구들이다. 이들은 81년생 동갑내기라는 것 외에 ‘그리스’의 대니 역을 거쳤다는 공통점이 있다.

“산호와는 ‘그리스’라는 작품을 같이 해서 예전부터 아주 친했어요. 둘 다 춤을 잘 추는 편이 아니어서 안무 선생님한테 막 혼났던 기억이 있네요. (웃음) 우형이랑은 이번에 처음 만났는데 서로 참 잘 맞더라고요. 5월 달에 제 생일이 있었는데요. 우형이가 새벽 두 시쯤인가, 서울에서 혼자 차를 끌고 제가 사는 수지까지 와서 같이 술을 마셨어요. 의리 있는 친구에요. (웃음)”
- 무대는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찾아가는 공간
2009년 상반기를 ‘쓰릴미’로 화려하게 보낸 정상윤은 하반기에 또 한 번의 도약을 앞두고 있다. 뮤지컬 배우라면 한번쯤 서보고 싶은 무대 ‘오페라의 유령’의 라울 역에 캐스팅된 것. 노래 잘하기로 소문난 홍광호와 더블 캐스팅이다.
“공교롭게도 광호랑 ‘씨왓아이워너씨’ 이후 또 같은 역에 캐스팅됐어요. 서로의 개성이 완전히 다르니까 관객의 입장에선 골라 보는 재미가 있으실 거예요. 저는 일단 강한 라울을 생각하고 있어요. 사랑하는 여자를 지킬 수 있는 믿음직하고 강직한 라울. 팬텀이랑 맞짱을 떠도 절대 지지 않을 그런 남자로 말이죠. 아직 시간이 많이 있으니까 서서히 찾아가야죠.”
배우로서 가장 성공적인 한 해를 보내고 있는 정상윤. 어릴 적부터 막연하게 노래와 연기에 대한 동경을 품어왔던 정상윤은 한 때 성우를 꿈꾸기도 했단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정말 할 게 없어서 연기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말하는 그이지만 일단 진로를 정한 후엔 다른 생각 않고 한 우물만 팠다.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며 연기에 대한 감각을 익힌 그가 자신의 길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된 것은 제대 후 극작가 팀버레이크 워텐베이커의 ‘조국을 위하여’라는 작품을 하면서이다.
“1700년대 영국에서 식민지 호주로 호송되어간 죄수와 군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에요. 한 장교가 죄수들을 데리고 연극을 하면서 갈등을 해소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극중극 형태로 휴머니즘이 살아 있는 좋은 작품이에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다시 올렸으면 좋겠어요.”
인터뷰 내내 정상윤은 참 덤덤했다. 눈빛, 말투, 표정 모든 것이 느림직한 매력이 있다. 잔잔한 캐릭터가 좋다는 연기관 만큼이나 그도 참 잔잔한 사람 같다. 본인은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글쎄, 그런 모습은 아주 친한 사람에게만 보여줄 것 같으니 확인할 방법이 없다. 살짝 치켜 올라간 입꼬리를 보면 살짝 예상이 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달변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하고픈 말은 놓치지 않는다. 못했다 싶은 말이 있으면 다른 질문 중간에도 이전 질문의 대답을 풀어놓는다. 역시나 덤덤하게 말이다. 그렇게 시종일관 수줍고 차분하던 그가 유일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순간이 있었다.
“무대는 또 다른 나를 찾을 수 있는 공간이에요. 내 안에 존재하는 무수한 나를 끄집어낼 수 있는 그런 공간이요. 무대에 서면 행복합니다. 배우가 되고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요. 깡통을 차더라도 배우로 살래요,”
잔잔함 속에 뜨거운 열정이 숨 쉬는 배우, 내가 만난 정상윤이다.
조수현 lovestage@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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