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일은 결국 두 부류에 지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범위를 조금만 좁히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세상은 증명할 수 있는 것과 증명할 수 없는 것으로 존재한다고 말이다. 이런 식이라면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세상 절반이나 되지만, 증명할 수 없는 것 또한 절반이나 된다. 두 영역을 모두 내포한다면 신(神)일 테고, 둘 중 한 쪽만 내포한다면 천재거나 바보일 것이다. 신(神)도 아니고 그렇다고 천재나 바보도 아닌 다음에야 두 영역을 얼쩡거리며 고통 받고, 외로워하고, 사랑하는 우리 같은 존재 아니겠는가.
수학 천재 ‘존내쉬’가 눈에 보이는 절반의 세상에 장악당한다면, 그의 딸 ‘캐서린’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절반의 세상에 지배당한다. ‘프루프’를 보는 우리는 양쪽 세상을 모두 누리는 셈이다. 그렇다면 증명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구분되는 이 세상에서 ‘프루프’는 무엇을 증명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엇도 증명하지 않는다. 광기에 압도된 천재와 두려움에 압도된 천재를 통해 어쩌면 세상은 양분될 수도, 그렇게 돼서도 안 됨을 증명할 뿐이다.
‘존내쉬’의 삶은 영화 ‘뷰티풀 마인드’로 이미 대중화 된 소재다. 그러나 연극 ‘프루프’는 그에게 딸이 있었다면, 하는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정신분열과 불안장애로 비참한 말년을 맞은 천재 수학자 ‘존내쉬’, ‘캐서린’은 아버지를 간병하기 위해 학업도 포기한 채 아까운 청춘을 보낸다. 마침내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한 그녀는 자신도 아버지의 정신병을 물려받았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극도의 신경 불안 증세를 보인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대학 시절 제자 할이 찾아오면서 둘은 아버지의 유고를 함께 검증하게 되고, 캐서린은 숫자로는 해결되지 않는 인간관계의 함수에 직면하며 혼란에 빠진다.
천재의 삶은 보기에 좋을망정 실컷 감정이입해 봐야 원래의 범인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허무감을 수반한다. 그러나 캐서린의 삶에서 타고난 천재성을 빼내면 우리 삶과 다를 바 없다. 그마저도 ‘캐서린’의 천재적인 지능에 주목하지 않으니 그런 생각은 기우다. 오히려 ‘캐서린’은 ‘천재적으로’ 예민하고 다면적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결핍과 두려움에 최대한으로 노출돼 있기 때문이다. ‘캐서린’은 어쩌면 자신이 경험하는 극한의 결핍을 통해 우리의 구멍난 여기저기를 채워줄지 모른다.
그럼 이렇게 고통 받은 후에 얻는 게 무엇인가. ‘캐서린’이 도출하는 답은 수학을 지배하는 원칙이 삶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함수는 집합에 속하는 모든 원소가 다른 집합 속 하나의 원소와 짝을 이룬다는 ‘꿈의 관계’다. 그러나 꿈은 꿈일 뿐 인간관계에는 그처럼 완벽한 대칭도, 완벽한 관계도 없다. 답을 알았으니 이젠 그 식도 알아야 할 차례. ‘캐서린’역은 ‘클로저’ 이후 2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 김지호가 맡았다. 연극 ‘프루프’는 7월 11일부터 9월 7일까지 대학로 두레홀 4관에서 공연된다.
박혜진 객원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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