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품종의 커피 원두나 포도를 섞어서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블렌딩 기법이 있다. 도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의 저자 질 포코니에와 마크 터너는 이 블렌딩 기법처럼 사람들이 서로 다른 지식과 경험 영역에서 끄집어낸 정보를 통합하고 섞음으로써(blending)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는 개념적 혼성 이론을 학계에 제안했다. 이를 토대로 완성된 도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김동환, 최영호 교수의 손을 거쳐 한국의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독자들과 함께 이 책의 깊이를 새롭게 읽으며, 모두가 위기라는 인문학의 정신을 새롭게 끄집어내는 계기를 마련하고 싶다는 두 교수를 만났다.
- 이 책을 통해 저자는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나요
이 책은 인간 마음의 작용을 설명하는 인지 이론인 ‘개념적 혼성’을 설명하고 있다. 저자인 질 포코니에와 마크 터너는 촘스키 이후 언어학의 중심 조류인 인지언어학 분야의 대표적인 학자로, 둘이서 함께 개념적 혼성(Conceptual Blending) 이론을 학계에 제안했다. 처음에 이들의 이론은 은유와 같은 언어의 창조적 측면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후 철학, 심리학, 사회학, 인류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관심을 갖고 연구를 시작하면서 개념적 혼성이 비단 언어만이 아닌 인간의 모든 사고와 상상력의 중심에 존재한다는 견해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들이 개발한 개념적 혼성 이론은 인간 마음의 작용을 설명하는 핵심 이론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조지 레이코프와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등 여러 학자들이 다방면에서 이루어낸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개념적 혼성이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며, 인간사의 온갖 분야에서 벌어지는 개념적 혼성의 사례와 그 원리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 이 책의 핵심인 개념적 혼성이란 무엇인가요
개념적 혼성 이론의 기본 원리는 사실 아주 간단하다. 마치 서로 다른 품종의 커피 원두나 포도를 섞어서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블렌딩 기법처럼, 사람들이 서로 다른 지식과 경험 영역에서 끄집어낸 정보를 통합하고 섞음으로써(blending)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간단한 예로 ‘컴퓨터 바이러스’를 보자. 바이러스는 본래 생물학적 개념이며, 컴퓨터 바이러스는 생물학적 바이러스와 같지 않다. ‘컴퓨터 바이러스’는 컴퓨터와 생물학적 바이러스의 혼성으로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낸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컴퓨터 바이러스와 생물학적 바이러스의 명백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 다 ‘바이러스’라고 부르며, 이어서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거나 ‘컴퓨터를 치료했다’라고 말할 수 있고 ‘바이러스 백신’이라는 개념도 새로 나타난다. “내가 너라면 검정색 옷을 입을 것이다”라는 표현은 어떤가. 이 표현은 ‘나’가 완전히 ‘너’가 된다는 뜻이 아니며 사실 ‘나’와 ‘너’가 완전히 동일하다면 이 표현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 표현은 ‘나’가 ‘너’의 상황과 입장이 된다면 검은색 옷을 입겠다는 뜻이다. 이는 ‘나’라는 사람의 성격과 특징을 ‘너’의 상황과 입장과 혼성해야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다. 우리는 이런 표현들을 아무 노력 없이 이해할 수 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간단한 이해에는 사실 매우 고난도의 인지 작용이 필요하다.
- 개념적 혼성의 근간이 되는 상상력의 과학이란 무엇인가요
우리는 모든 사람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인지 능력을 시시하게 여긴다. 간단하게 이해되는 의미는 그 의미를 만들어내는 과정 역시 간단할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컴퓨터는 세제곱근은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방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로봇은 아직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컴퓨터는 체스로는 세계챔피언도 이길 수 있지만 아주 간단한 말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인지신경과학은 나무를 나무로 인식하고, 컵을 컵으로 인식하는 더없이 쉬운 인식이 끔찍이 어려운 문제임이 밝혀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인식된다고 해서 그 과정이 간단하리라 가정하는 것은 큰 오류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우리가 의식하지 않고 쉽게 해온 생각들이 사실은 개념적 혼성이라는 고도의 인지 과정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우리가 쉽게 이해하는 비유, 농담, 속담, 반사실문, 그리고 평범한 표현 역시도 막상 깊이 들여다보면 그 이해 과정이 매우 복잡한 것으로 들어난다. 다만 그 과정이 의식 이면에서 일어나기에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시각이나 청각 등의 지각 과정이 사실은 매우 복잡한 뇌의 작용이지만 우리가 그 작용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 뇌가 수행하는 인지 과정은 의식으로부터 가려져 있고 결과물만이 의식에 떠오른다.
이 책은 바로 그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의 놀라운 복잡성을 파헤치면서, 인간의 인지에 대한 이해를 크게 넓혀준다.
무엇보다 도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우리에게 상상력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준다. 개념적 혼성은 상상적이고 창조적인 작업이며 외관상 아주 간단한 경우에도 그렇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정신적 개념을 혼성해서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는 일은 전적으로 상상력의 역할이다. 상상력의 작용에 따라 개념적 혼성은 아주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이런 상상력이 어떤 원리와 법칙에 의해 작동하는지를 분석하면서 상상력의 과학을 위한 첫발을 내딛고 있다.
- 이 책을 번역하면서 어려운 점과 그 의의는 무엇인가요
우리의 작업은 산 너머 산이었다. 초고를 완성하고 거듭해서 문맥과 맥락을 따지며 수차례의 교정 작업을 거치는 가운데 어느 정도 책의 감추어진 비밀이 풀리면서부터는 끝까지 해낼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작업을 끝내고, 우선은 이런 모습으로나마 책을 출간할 수 있게 되어 다행스럽다. 책을 완역했지만 지금의 우리 영혼은 텅 빈 상태다. 우리는 그저 우리 손에 놓인 완성본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가 할 일은 다했다고 말하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일단 우리의 작업은 여기까지였다. 이젠 이 빈 중심의 책을 독자들에게 내려놓는다. 그리하여 다시 독자들과 함께 이 책의 깊이를 새롭게 읽으며, 모두가 위기라는 인문학의 정신을 새롭게 끄집어내는 계기를 마련해 볼까 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우리를 흥분시키기보다 감동시킨다. 흥분이 감정을 부른다면, 감동은 성찰과 희망을 준다. 흥분이 우리를 하룻밤의 찰나로 이끌지만, 감동은 우리에게 온밤을 지새우며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게 만든다. 질 포코니에와 마크 터너 교수는 너무나도 흔해서 누구든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아무렇지 않게 생각해온 우리의 생각, 바로 거기서 세상을 창조하고 새롭게 만들어갈 값진 보물을 찾아냈다. 이런 값진 보물을 보고서도 감동하지 않는 존재, 그는 누구든가! 니체의 말이 생각난다. 운명은 길섶마다 행운을 숨겨 두었다고.
- 이 책의 저자와 역자를 소개해 주세요
저자 소개
질 포코니에Gilles Fauconnier : 프랑스 출신의 언어학자이자 인지과학자로 현재 캘리포니아 대학 인지과학과의 교수로 있다. 인지언어학의 창시자 중 하나로, 마크 터너와 함께 개념적 혼성 개념을 창안하여 학계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언어학과 인지과학에 관한 많은 책을 저술했다.
마크 터너Mark Turner : 질 포코니에와 함께 개념적 혼성 이론을 창안한 저명한 인지과학자로 인지과학과 언어학 분야에서 많은 책을 저술했으며, 콜레주 드 프랑스, 고등학술연구소, 행동과학 고등연구센터, 구겐하임 기념 재단 등에서 연구 활동을 했다. 현재는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 인지과학과의 교수로 있다.
역자 소개
김동환 : 경북대학교에서 영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해군사관학교 영어과 교수로 있다.『 개념적 혼성 이론: 인지언어학과 의미구성』『 인지언어학과 의미』를 저술했으며『, 인지언어학 개론』『 인지언어학 입문』『 인지문법』『 은유와 영상도식』『 인지언어학 기초』『 언어와 사회』『 은유와 문화의 만남』 등을 옮겼다.
최영호 : 고려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해군사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있다. 문학평론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계간「 문학바다」의 편집위원이다.『 해양문학을 찾아서』를 저술했으며, 『 자유인을 위한 책읽기』『 20세기 최고의 해저탐험가: 자크이브 쿠스토』『 白夜 이상춘의 西海風波』『 은유와 도상성』 등을 옮겼다.
김수연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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