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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 관객들에게 희망을! 뮤지컬 ‘맨오브라만차’

 

뮤지컬 ‘맨오브라만차’는 이상에 젖어 사는 돈키호테의 이야기를 새롭게 구성한 것이다. 누구 하나 모를 것 없는 스토리라는 점에서 내용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을뿐더러 그럴 필요도 못 느낀다. 따라서 내용 자체보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 방식, 즉 구조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는 비극에서는 줄거리 곧 플롯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에 뿌리를 두는 감상 방식이다. 당시 비극의 대부분은 그리스 신화를 그 내용으로 했다. 때문에 스토리를 뻔히 아는 관객들은 극의 내용 보다는 진행 방식, 시작과 끝의 설정, 강조 포인트와 인물의 형상화 등에 초점을 맞추어 작품을 봤다. 돈키호테의 이야기를 다루었으므로 ‘맨오브라만차’역시 내용 보다는 구조와 인물들에 대해 할 얘기가 훨씬 많다. 우리도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을 따라, 고대 그리스인들의 감상법을 따라 ‘맨 오브 라만차’의 구조를 통해 작품 전체를 파악해보자.

큰 줄거리는 원작 ‘돈키호테’와 다르지 않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맨오브라만차’가 극중극 방식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맨오브라만차’의 구조에 대해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배경은 스페인의 어느 지하 감옥. 스포트라이트가 맞춰지는 죄수는 세르반테스다. 우리가 아는 그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다. 신성 모독죄로 감옥에 끌려 왔다는 것을 알리며 시작하는 뮤지컬은 세르반테스가 종교재판을 받으러 나가면서 끝이 난다. 그러니, 감옥에 갇힌 세르반테스의 이야기가 일단 한 개의 극이다. 세르반테스는 종교재판을 받기에 앞서 감옥의 죄수들에게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한 즉흥극을 벌인다. 이 극이 바로 돈키호테 이야기다.

그렇다면 왜 극중극인가. 달리 표현하면, 왜 ‘맨오브라만차’에는 세르반테스가 등장하는가 하는 것이다. 가장 손쉬운 추측은 세르반테스의 ‘작가정신’을 작품 속에 녹이고 싶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돈키호테와 더불어 세르반테스마저 돈키호테에 견줄만한 인물로 만들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인물을 창조해낸 세르반테스를 ‘돈키호테’와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정신 또한 돈키호테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기에. 이렇게 해서 ‘맨오브라만차’에는 돈키호테를 지지하는 혹은 돈키호테와 같은 부류의 인간이 한 명 더 있게 되는 셈이다. 알돈자, 산초, 그리고 세르반테스까지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세르반테스의 등장은 돈키호테에 대한 열렬한 지지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또 다른 이유로는 가상의 돈키호테를 실존 인물 세르반테스와 중첩시킴으로써 돈키호테의 삶을 현실화하기 위함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돈키호테’이야기 자체는 불면 날아가 버릴 듯한 꿈같은 이야기다. 한마디로 ‘나는 살 수 없는 생’ 이라고나 할까. 아무리 미치고 싶어도 마음대로 미쳐지지 않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아는 한 돈키호테 이야기는 내가 흉내 낼 수도, 꿈꿀 수도 없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르반테스의 등장은 다소 과장되고 해학적인 돈키호테 이야기를 한 번 꿈꿔 봄 직한 삶으로 바꿔준다. 자신의 죄목에 대해 “이상 없이 살 용기, 내겐 없소이다”라고 말하는 세르반테스는 이상주의자다. 그뿐인가. 오직 정신만 소유하고 싶다는 세르반테스는 고지식한 외골수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왠지 이런 세르반테스가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았으면 싶다. 세르반테스의 이런 태도는 비현실적일지라도 혹은 실현할 수 없을 지라도 끝까지 지키고 싶은 우리의 희망이자 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왕 관객들의 희망을 지켜주기로 한 거, 제정신이 아닌 알론조의 말 보다는 세르반테스의 말이 훨씬 리얼한 방법 아니겠는가. 돈키호테 이야기는 지어냈지만 세르반테스는 실제로 그렇게 살았을지 모르니 말이다.

지금까지 ‘맨오브라만차’에 나타난 극중극 구조에 대해 살펴보았다. 정리하자면 위와 같은 구조는 관객들로 하여금 원작 ‘돈키호테’의 정신을 실존 인물을 통해 보다 현실성 있게 전달하고자 한 연출의도라 볼 수 있다. 자신을 돈키호테라 생각하는 알론조를 보면서 ‘나도 미치고 싶다’고 생각한다거나, 뜻을 굽히지 않고 종교재판을 향해 나가는 세르반테스를 보면서는 ‘미치지 않아도 알론조처럼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길 바라는 것이다.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고맙다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원작 ‘돈키호테’에서 알론조가 했던 말을 ‘맨오브라만차’에서 세르반테스가 해주었을 때, 허공에 떠돌던 그 말은 우리에게 와서 ‘꽃’이 되었기 때문이다.


박혜진 객원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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