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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너의 나라에 나는 갈 수 없는가, 연극 ‘어나더 컨트리’8월 16일까지 서경대학교 공연예술센터 스콘 1관
연극 <어나더컨트리> 컨셉사진_지호림-김찬호_[제공=PAGE1]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국가’를 꿈꾼다. 비록 그것이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라 할지라도. 연극 ‘어나더 컨트리’는 권위주의에 물들어 인간의 존엄을 상실한 학교 시스템 속에서, 저항하거나 순응하는 방식으로 각자 이상향을 꿈꾸는 1930년대 영국의 명문 공립학교 학생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저마다 다른 이상을 누구보다 뜨겁게 꿈꿀 자유가 있는 청춘들이 정해진 원칙만 존재하는 억압적 사회 안에 갇힌다면 어떻게 될까.

파시즘과 대공황으로 혼란스러웠던 1930년대 영국. 시대 배경을 염두에 둔다면 상류층이라는 계급적 특권을 물려받은 아이들이 놓인 상황은 아이러니하다. 국가의 통치 권력을 꿈꾸는 아이들에게 출세의 사다리인 기숙학교 시스템에 저항하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이 미래 통치자가 되기 위해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규칙에 순응’하고 ‘폭력에 길들여지는 것’이라는 현실, 같은 학생에게 가혹한 체벌을 행사하는 선도부 프리펙트의 모습은 그래서 더욱 섬뜩하게 느껴진다. 합창하듯 매질의 횟수를 카운트하는 상급생들. 프리펙트라는 절대권력의 달콤함에 취한 아이들은 쉽게 죄책감을 잊는다. 국가 통치 권력의 채찍은 그렇게 어릴 때부터 폭력의 권위를 몸소 체험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대물림적 포상인 셈이다. 

각자의 외딴 이상, 너의 나라에 나는 갈 수 없는가
토미 저드-가이 베넷-파울러

 
극을 이끄는 중심인물들은 각자의 이상으로 충돌한다. 토미 저드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이상적이라 말하지만, 가이 베넷의 이상 사회는 ‘사랑하는 하코트가 살고 있는 롱포드’일 뿐이다. 하지만 현실은 하급생 워튼이 끊임없이 “죄송합니다”를 외쳐야만 하는 곳이고,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의 차가운 시선 속에서 ‘마티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곳이다. 토미 저드는 학교 전체가 ‘모순덩어리’이며 체벌이 잘못됐다는 것은 알면서도, 여자를 사랑할 수 없는 가이 베넷의 불안과 공포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게다가 이상은 너무나 멀리 있다. ‘본능’을 믿지 말라는 토미 저드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이성적 ‘선택’과 그로 인한 ‘변혁’이지만, 정작 기숙사 체제 변혁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냉소로 일관하는 데 그친다.

기숙사 내 규칙과 기강을 강요하며 체벌에 찬동하는 파울러 역시 지극히 자유롭고 감정적인 가이 베넷과 공산주의자 토미 저드를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반듯하게 정돈된 군복을 입고 흐트러짐 없이 서열식을 하는 것에 집착하는 파울러는 1930년대 전체주의와 계급주의가 신봉했던 가치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를 두고 토미 저드가 “한 국가를 통치하는 통치자의 전형”이라고 칭하는 목소리에는 증오와 경멸이 서려있다. 하지만 결국 아이들은 크고 작은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끊임없이 충돌과 설전을 벌이며, ‘역시 너의 나라에 나는 갈 수 없구나’하는 좌절을 매번 확인할 뿐이다.

연극 <어나더 컨트리>컨셉사진_이해준-문유강_[제공=PAGE1]

보수적 상류사회 비판, ‘마티노’의 죽음에 왜 화가 나는가

작품의 초반 동성과 밀회를 즐기던 ‘마티노’가 죽음을 택하면서 기숙사의 견고했던 규칙과 질서는 새로운 위기를 맞는다. 아이들은 그의 죽음을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당황하며 분노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분노의 대부분이 기숙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자신의 미래 권력에 위협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인할 때 관객은 상류층인 아이들의 지위를 차갑게 확인할 수 있다. 작품은 한 아이의 죽음이 가져온 파문이 고작 상류층 개개인의 안위에 대한 걱정으로 번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비정한 보수 상류사회에 대한 비판의 날을 세운다.

프리펙트와 트웬티투 학생들은 모두가 규칙들로부터 보호과 혜택을 보장받고 있다고 믿지만, 결국은 ‘체벌’이라는 폭력을 스스로 용인함으로써 가해자와 피해자로 얼굴을 바꿔가며 살아갈 뿐이다. 학생들은 자기검열과 타인감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오직 자신이 매달린 사다리에서 떨어지지 않고 무사히 위로 올라가는 것만을 생각하게 된다. 애초에 왜 사다리가 존재해야 하는지, 무엇이 그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체벌’을 용인하게 만들었는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고민과 비판을 시도하는 토미 저드와 가이 베넷이 결국 아웃사이더나 변절자에 그치고 마는 현실 역시 보수적 상류층의 견고한 벽을 느끼게 한다.

자신의 주장을 큰소리로나마 외쳐볼 수 있었던 상급생들 틈바구니에서 제 목소리를 내기조차 어려웠던 하급생 워튼을 기억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상급생의 세숫물과 찻물이 식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했던 워튼은 작품의 마지막, 일생의 최후가 일일이 언급되는 상급생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후일담이 언급되지 않은 채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진다. 마치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다 사라져간 그의 존재야말로 여러 겹으로 된 “지상의 지상”에서 가장 기억해야 할 존재인지도 모른다.

"달콤쌉싸름"한 매력적 캐릭터의 향연
‘강영석-문유강-배훈-심수영-한동훈’

초연에 이어 이번 재연에도 개성 강한 캐릭터들의 향연이 관객을 강렬하게 사로잡는다. 감정이 풍부한 ‘강영석’의 가이 베넷은 차갑고 이성적인 ‘문유강’의 토미 저드와 절묘한 케미를 선보였다.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그들이 사상을 초월해 평범한 투닥거림을 보여주는 우정씬들은 다소 어렵고 진지한 극을 유쾌하게 누그러뜨리며 청춘들의 달콤쌈싸름함을 느끼게 해줬다. ‘배훈’의 멘지스나 ‘심수영’의 델러헤이는 특권층의 이중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연기를 충실히 잘 해냈고, 파울러 역을 맡은 ‘한동훈’은 표정과 자세, 목소리 등 한결같이 캐릭터에 빙의된 연기로 다소 불호일 수 있는 고압적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설득시켰다.

결국 관객들은 작은 계급 사회인 무대 위 학교를 통해 내가 속한 사회의 축소판을 엿본다. 관객들이 저마다 어떤 캐릭터에 공감하고 지지하는지는 모두 다를 것이다. 하지만 작품은 30년대 영국을 벗어나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유효한 질문을 남긴다. 그렇다면 너의 나라와 나의 나라가 만나는 지점은 어디에 있는가 하고.

모두를 충족하는 완벽한 유토피아는 ‘그 어디에도 없는 곳’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마다 ‘이상’을 꿈꾸며 서로의 나라를 확인하는 것은 충분히 유의미하다. 지금까지 조금 더 나은 세상은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져왔기에. 그런 점에서 ‘어나더 컨트리’ 속 아이들의 갈등과 좌절도 의미를 되찾는다. 사회의 발전은 언제나 허튼 망상으로 취급되던 누군가의 ‘이상’으로부터 출발했다. 파울러의 나라에 토미 저드와 가이 베넷도 갈 수 있는 날, 바클레이부터 워튼까지 모두 행복한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박세은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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