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19.5.22 수 19:16
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리뷰
[리뷰] 너를 지키기 위해 만든 거짓의 갑옷, 연극 ‘왕복서간’일본 소설 원작의 ‘감성 짙은 서스펜스’

때론 진실보다 거짓을 말하는 쪽이 힘든 선택이 된다. 진실이라고 해서 언제나 친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진실의 칼날이 자신이 사랑하는 누군가를 향한다면 거짓이 오히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갑옷이 되어주기도 한다. 연극 ‘왕복서간’은 그렇게 누군가를 위해 스스로를 거짓의 감옥에 가둬야 했던 한 남자와, 거짓의 갑옷 속에서 진실을 보지 못한 채 살아야만 했던 한 여자의 이야기다. 뭐든지 빠르게 시작되고 끝나는 속전속결의 시대에서 갑자기 먼 거리로 떨어진 오랜 연인들 간의 느린 ‘편지’는 특유의 아날로그적 감성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되어 서로를 향한 애달픈 진심을 잔잔히 객석까지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미나토 가나에 원작의 ‘감성 짙은 서스펜스’
- 소설 같은 대사, 시적인 조명과 음향

오랜 연인인 마리코와 준이치는 시작부터 서로를 보지 않은 채 나란히 앉아서 각자의 말을 시작한다. 분명 대화지만 마리코는 원하는 것을 다 묻지 못했고, 준이치는 상대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도 않은 채 2년간의 원거리 연애가 확정된다. 헤어짐은 원치 않는다면서 남태평양 외딴섬에서의 국제자원봉사를 결심한 준이치의 갑작스런 통보는 그에게 숨겨진 비밀이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둘은 먼 시간과 공간을 사이에 두고서야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고, 둘 간을 왕복하는 편지는 서로 간 내면의 거리를 좁히는 계기가 된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오랜 연인이 만들어내는 애틋한 감성과 함께 비밀스런 과거에 접근하는 서스펜스를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미나토 가나에의 동명 소설을 무대화한 작품은 잔잔하고 아름답게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감성 짙은 서스펜스를 구현한다. 소설 같은 문어체의 대사와 상징적인 조명, 영상의 연출은 일본 문학 특유의 감성을 그대로 무대화했다고 느끼게 한다. 편지이기에 어색하지 않을 수 있었던 문어체의 대사는 잔잔한 배우의 음성과 만나 마치 소설을 읽어주는 것 같은 독특한 안정감을 주었고, 파도 소리나 불타는 소리 등의 음향, 때때로 배경을 압도하는 조명과 영상은 극적인 상상력을 자극한다. 특히 무대 뒤편의 흰 벽은 남태평양의 별이 쏟아지는 하늘이나, 불길에 타오르는 편지 조각, 과거를 직시하는 현재의 얼굴 등을 비춰주며 인물의 내면을 투영하고 감성을 덧칠하는 스크린의 역할을 했다.

진실을 감추면 죄는 사라질 수 있을까
-“어떤 수에 0을 곱해버리는 일”

미나토 가나에 작가는 그간 다수의 작품들에서 인간의 범죄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결과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던 인간의 절실한 고뇌와 아픔의 내면들에 집중해왔다. 이 작품 ‘왕복서간’ 역시 초반에는 15년 전의 사건에 대한 진실 그 자체에 파고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관객이 사건의 진실을 감추고자 했던 인물의 진심과 마주하게끔 만든다. 흥미로운 것은 서사를 완성해나가는 유일한 단서가 각각 1인칭으로 기술되는 ‘편지’이기에 진실에 이르는 과정이 왜곡과 수정을 거듭하면서 서스펜스를 조성한다는 점이다. 특히 마리코가 15년 전 사건에 대한 기억 상실을 겪고 있다는 점과 되찾은 기억마저 온전한 진실이 아니었다는 점이 몇 번의 반전을 맞이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극중에서 ‘5×0=0’과 같은 수식 또한 극 전체에서 의미 있는 복선으로 긴장감을 준다. 준이치는 어떤 수도 0을 곱해버리면 0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에 의문을 가지면서도, “원래 없는 것을 아무리 모아 봐도 없다는 것”이 아니겠냐며 애써 수식의 결과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이러한 준이치의 믿음은 현실 속에서도 진실을 영원히 감추는 것이 ‘0을 곱해버리는 일’처럼 정당화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수식의 결과가 0이라고 해서 수식의 과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5×0=0’이라는 수식에서 0을 곱해버리기 전의 숫자가 분명 존재했듯이 마리코와 준이치의 죄 또한 감춘다고 없었던 것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 ‘왕복서간’은 원작자 미나토 가나에의 그간 작품 세계가 그러했듯이 우리가 흔히 결과로만 취급하는 사건 혹은 범죄에 대해 그 과정에 숨겨진 인물들의 고통과 상처를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깊은 여운을 남긴다.

담담하게 서스펜스를 쌓아가는 연기
-주연 진소연, 주민진 배우의 조합

마리코 역을 맡은 진소연 배우는 과거에 대한 기억상실 증세를 안은 채 상대에게 ‘왜’를 조심스레 물어야하는 잔잔한 연기를 섬세하게 선보인다. 편지를 쓰거나 읽는 것을 모두 독백체로 전달해야 하기에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연기를 호소력 짙은 감정을 섞어 풀어내 후반부까지 집중하게끔 만들었다. 특히 연인의 원인을 알 수 없는 갑작스런 결단을 이해하기 위해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과거의 아픔과 스스로 마주해가는 모습들은 용기 있고 정의로운 마리코 캐릭터를 잘 납득시키는 인상적인 연기였다.

남주인공 준이치는 모든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로서 서사의 핵심으로 관객을 이끌고 서사의 마지막 퍼즐을 완성하는 주역이기도 하다. 준이치 역을 연기한 주민진 배우는 꺼림칙한 무언가를 감춘 것 같은 미스테리한 연기를 시작으로 때로는 서툴고 솔직한, 때로는 의미심장하고 날카로운 모습으로 진실에 다가서는 과정을 입체적으로 연기했다. 담담하게 서스펜스를 쌓아간 ‘진소연-주민진’ 페어는 과거를 연기한 세 배우들의 등장신과 잘 어우러지면서 일본 문학 특유의 스며드는 듯한 서스펜스의 매력을 잘 이끌어낸 주역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한국 추리물 특유의 강렬함이나, 충격적인 반전을 기대한 관객에게는 다소 아쉬움을 남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본 문학 특유의 감성을 즐기는 미나토 가나에 작가의 팬이라면 작가 특유의 섬세한 문체와 죄를 저지르는 인간의 내면을 바라보는 진지한 시선이 잘 녹아 있어 매력적인 작품이라 할 만하다. 작품의 후반부 현재의 준이치는 과거의 마리코와, 현재의 마리코는 과거의 준이치와 서로 마주본다. 두 쌍의 그 비현실적인 조우는 거짓의 감옥에 갇혀 있었던 안쓰러운 두 명의 죄인을 죄책감으로부터 해방하고,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진실에의 직시’와 ‘과거와의 화해’를 전달하는 듯하다. 극중 준이치의 대사처럼 “우리의 모든 시간에 영을 곱했던 모든 (그의) 노력이 기만”에 불과한 것일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저지르는 애처로운 인간의 끊임없는 잘못들은 어쩌면 그의 소망처럼 ‘용서’를 기점으로 “새로운 1을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진제공_벨라뮤즈

박세은 기자  newstage@hanmail.net

<저작권자 © 뉴스테이지,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