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19.4.18 목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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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당신은 그저 당신일 뿐, 뮤지컬 ‘호프’자신을 잃은 현대인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

앞에 그럴듯한 수식이 붙는 말이 오히려 가짜 같을 때가 있다. 투박하고 직설적이고 짧은, 마치 한숨 같은 말들은 그래서 때때로 더욱 와 닿는다. 뮤지컬 ‘호프’는 직설적이고 명징한 메시지로 현대인이 가장 듣고 싶은, 그러나 가장 듣기 힘든 말을 들려준다. 수많은 기대와 목표, 역할과 고군분투하면서 지친 현대인들에게 ‘그저 당신은 당신 그대로 가치있다’는 당연한 메시지는 따뜻한 위로가 되어 가슴을 두드린다. 문학계 거장의 미발표 원고를 둘러싸고 30년간 끝나지 않은 재판의 현장인 무대 위. 백발로 주름진 얼굴의 78세 에바 호프와 전쟁의 상처 속에서 방황했던 젊은 에바 호프가 조우하면, 누군가의 이야기이자 모두의 이야기였던, 그러나 한 번도 읽히지 않은 한 인생의 책장이 비로소 넘겨지기 시작한다.

실화 바탕 스토리, 상상을 자극하는 연출방식
신체언어적 안무, 조명 활용도 높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이라는 부제를 가진 뮤지컬 ‘호프’는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 프란츠 카프가의 유작 반환 소송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된 작품이다. 카프카의 친구였던 브로트가 미발표 원고를 자신의 비서에게 남겼고, 비서의 딸이었던 에바 호프에게 유산으로 물려졌으나, 이스라엘 국립 고서관이 카프카 원고 반환 소송을 제기하여 에바 호프와의 재판이 시작된 것이 실제 사건의 개요다. 결국 이스라엘 대법원이 국립도서관에게 원고 소유권이 있다고 판결하고, 에바 호프의 항소에도 불구하고 결국 소유권은 국립도서관에 돌아가게 된다.

뮤지컬 ‘호프’는 실화 사건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에바 호프의 항소 이유에 관해서 전쟁의 상처와 극도의 궁핍, 고독과 소외 속에서 한 인간이 겪어야 했던 실존적 고민들을 개연성 있는 스토리로 엮어내 공감을 이끌어낸다. 전체 서사를 엮어내는 방식도 흥미롭다. 현재 노인이 된 에바 호프와 재판장의 무대가 극 전체에서 한 순간도 사라지지 않은 채 과거의 에바 호프와 그의 어머니 마리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마치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스크루지가 유령과 함께 과거, 현재, 미래의 환영을 지켜보는 것처럼, 78세의 에바 호프 역시 자신의 과거인 젊은 호프를 K(미발표 원고)와 함께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무대는 별다른 전환 없이 장면을 구성하기 위해 독특한 연출을 시도한다. 우선 장면 전환에 사용된 조명과 음악은 구체화되지 않은 이미지로 관객이 직접 장면을 상상하게끔 유도한다. 유대인 노역장의 붉은 조명이나, 기차역 선로에 들어오는 열차를 표현한 조명과 안무의 조합은 인상적이다. 특히 신체언어이자 마임과도 같은 작품의 독특한 안무들은 난해한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배경이나 소품 없이 장면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역할을 한다. ‘이 동네 미친년 호프’에서 거리와 버스 안 등 상세한 에피소드를 그릴 때의 안무는 대사 못지않게 전달력이 뛰어났고, ‘길 위의 나그네’에서 젊은 호프의 방황을 표현한 현대적 안무는 인물의 감춰진 내면을 전달하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됐다.

긴 생애, 전반부 절제된 연기-후반부 정점 달해
하나의 캐릭터 완성해낸 ‘차지연-차엘리야’

뮤지컬 ‘호프’의 독특한 점은 주역인 호프 역할을 두 명의 배우가 나눠 연기한다는 점이다. 78세 노파로 등장해 과거를 회한하며, 자신의 삶과 서서히 마주하게 되는 차지연의 호프와, 어머니 마리를 괴롭게 지켜보며 성장해 참혹한 전쟁을 겪는 차엘리야의 호프는 모두 제 역할을 잘 해내며 하나의 캐릭터를 완성해냈다. 작품의 곳곳에서 차지연(현재 호프)이 차엘리야(과거 호프)를 안타깝게 바라보거나, 서로가 거울처럼 서로를 마주하거나 하는 장면의 연출은 하나의 캐릭터를 둘이 연기하지 않았으면 구현해낼 수 없었던 애틋한 명장면들이기도 하다.

차엘리야는 자신의 어머니를 지키고 전쟁과 유대인 차별의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하는 강인하고 의지적인 모습으로 젊은 호프를 연기했다. 하지만 그 강인한 외면과 흔들림 없는 열창의 이면에는 사랑받지 못하는 외로운 내면이 감춰져 있었다. 전쟁 시절 어린 호프는 같은 유대인의 반란을 독일군에 직접 고발하거나 젊은 남자의 유혹에 빠져 원고를 경매에 팔아넘기기도 했지만, 그 죄책감으로 오랜 세월을 방황한다. 어린 소녀부터 박해받는 유대인 여성, 고독하게 무너진 한 인간의 모습까지 차엘리야는 서정적인 노래와 현대적인 안무, 다른 배역의 합까지 다양한 롤들을 빈틈없이 소화해내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차엘리야가 과거를 통해 서사를 하나하나 쌓아올렸다면 그 서사의 마지막을 완성시킨 것은 역시 현재의 호프, 차지연이었다. 차지연이 연기한 호프의 존재감은 초반에는 이해할 수 없는 미친 노인의 악다구니만큼 불편하지만 섬세한 내면 연기로 서서히 그녀의 삶을 이해시키고 객석과의 벽을 허물어낸다. 숨김없이 자신의 진솔한 내면을 토로하는 후반에 이르러서는 객석과 완벽한 공감과 일체감을 이끌어낸다. 특히, 후반부 넘버 ‘호프’는 한탄-고백-호소-열망으로 이어지는 가사의 진솔함이 차지연의 폭발하는 내면 연기와 만나, 캐릭터의 감정선이 객석까지 절절히 전해지는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아무도 관심 갖지 마. 이제와 들여다보지도 마. 나 혼자 늙고 어느새 낡아 이제 원고만 남았어 난. 잃어본 적 없는 사람은 몰라. 전부를 잃고 남은 게 하나라면 그 하나를 위해 전부를 걸어. 그게 내 유일한 세상. 그게 내 유일한 일상. 내가 쉴 곳, 내 집이니까. 누구든 손 내밀어줘. 차가운 눈 속 혼자두지 마. 살아도 된다, 잘 견뎌왔다고. - 후반부 <호프> 중에서 -

지친 ‘우리 자신’에게 들려주는 따뜻한 위로
“당신은 누구보다 당신을 잘 지켜줘야”

이 작품의 메시지는 후반부에서 비교적 명징하게 드러난다. 기나긴 재판이 끝이 나고 원고 소유권을 잃게 된 호프를 향해 “에바 호프의 인생은 에바 호프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판결문이 낭독된다. 의인화된 원고 K(조형균)는 호프를 시끄러운 노인 취급하는 사람들을 향해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하지 말고, 지금 하는 말을 들어주면 되지 않냐”고 호소했고, 그녀의 과거가 모두 드러나자 이번엔 호프를 향해 말해준다. “난 그냥 종이야. 당신이 아니야.”라고. 호프는 그제서야 원고 없이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의 의미를 납득하고 받아들인다. 꼭 들어줘야 하는 말과, 꼭 해줘야 하는 말이 만나 이뤄낸 따뜻한 결말이었다.

인간은 타인의 관심과 사랑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존재다. 하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아는 스스로가 자신을 가장 먼저 아끼고 믿어줘야 한다는 것은 쉽게 잊어버린다. 작품은 돌아갈 곳과 있어야 할 곳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어떻게 잘못된 집착과 자기 학대에 빠져 자신의 삶을 빼앗기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이 삶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신을 마주할 용기,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용서하고 현재와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작품은 말해준다. 그렇기에 마지막 판결문은 객석의 가슴 깊이 스며들 듯 와 닿는다. 우리는 누구나 타인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애쓰고, 한때의 잘못으로 자책에 시달렸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고군분투할 권리가 있고, 때때로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작품 속 호프가 긴 생애로 깨달았듯 ‘내가 돌아갈 곳은 언제나 내 자신’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진제공_알앤디웍스

박세은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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