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19.4.18 목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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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한낱 인간의 위대한 의지, 연극 ‘오이디푸스’무섭게 몰아치는 황정민의 뜨거운 몰입

운명이란 무엇인가. 운명은 이미 놓여진 길인가, 자신이 걸어감으로써 만들어지는 길인가. 연극 ‘오이디푸스’는 가혹한 숙명을 피하려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피할 수 없었던 한 사내의 비극적 삶을 통해 운명을 대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비극의 원류로 통하는 소포클레스 원작을 재해석한 무대는 상징과 은유, 코러스의 메아리치는 대사 반복과 커다란 울림으로 그리스 고전극 특유의 비장미를 분출한다. 무엇보다 연극 ‘리처드 3세’이후로 다시 연극무대로 돌아온 황정민의 아우라가 압도적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익히 알고 있는 오이디푸스의 운명이, 시대를 거스른 타인의 비극이 이토록 절절히 와 닿을 수 있었을까.

자신의 근원에 대한 끈질긴 물음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작품의 전반부는 이미 테베의 왕이 된 오이디푸스가 어떻게 자신의 숙명을 깨닫게 되는지의 과정을 추적하듯이 그려낸다. 관객에게 익히 알려진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그 운명이 어떻게 발버둥치며 운명을 벗으려 한 오이디푸스에게 철저히 드리워지게 되는지의 과정이 흥미롭게 전개된다. 감정선이 단조로운 전반부가 비교적 밋밋했다면 중반부부터 작품은 변곡점을 맞이한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이 아버지라고 믿었던 폴뤼보스의 왕이 결국 자신의 친아버지가 아님을 알게 되는 지점부터 작품은 본격적인 비극의 본색을 드러낸다. 그 때부터 오이디푸스는 한 나라의 왕, 한 가족의 아버지이자 남편이 아닌, 일개 한 인간으로서 근원적 물음에 도달한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가.

오이디푸스의 이러한 자신의 근원에 대한 천착은 주제의 핵심인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인 동시에, 관객에게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철학적 물음으로 돌아온다. 그것이 진정한 나 자신을 알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실존적 물음이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에게는 자신의 출생을 둘러싼 비극적 진실과 과감히 직시하려는 용기이자 의지로도 해석된다. 나는 누구인가. 누군가의 아들, 남편, 아버지, 왕이기 이전에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것은 현실이 참혹할수록 마주하기 힘든 물음이다. 오이디푸스의 진정한 비극은 자신을 내버렸던 부모를 스스로가 다시 살해하거나 범해야 했다는 사실을 구태여 자신이 천착하려 하는 과정에서 깨닫는다는 점에 있다. 그렇다면 그의 용기와 의지, 생존을 위한 투쟁의 일대기는 운명과의 대결에서 실패했으니 결국 무의미한 것이 되는 걸까.

운명에 맞서는 한낱 인간의 위대한 의지
-“내 운명을 멈추는 것은 바로 나”

이 작품의 백미는 후반부다. 이오카스테와 오이디푸스가 모든 것이 신탁대로 이뤄졌음을 알게 된 이후부터 작품은 절절한 비극으로 객석을 몰입시킨다. 가장 먼저 비극을 알아챈 이오카스테는 그 진실을 오이디푸스가 알지 않기를 바랐고, 진실을 숨기고 있던 양치기역시 그에게는 끝까지 말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결국 참혹한 진실이 밝혀진 후 오이디푸스의 삶의 근간은 철저히 무너진다. 자식의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에 이오카스테는 괴로움을 참지 못해 자결하고, 그녀의 죽음 앞에서 오이디푸스가 오열하며 “어머니, 엄마!”라고 부르는 장면은 운명에 희생된 오이디푸스의 절망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절망 속에서도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대신 “보아서는 안 될 것을 오랫동안 보면서도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 자신의 눈을 찌르는 것으로 비극적 운명의 종지부를 찍으려 한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수용하면서도, 자신의 길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택한다. 자신의 백성들 앞에 자신의 몰골을 모두 보게 하며, 가족을 등지고 스스로를 테베로부터 추방시키는 오이디푸스. 그는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또 다시 길 위로 나선다.

가슴을 치며, 자신의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
-황정민의 마지막 20분, 그 뜨거운 몰입

마지막 20여분의 연출은 절제된 황정민의 연기가 그야말로 무대를 장악하도록 만든다. 가슴을 네 번 치며 기어이 자신의 눈을 찌르는 황정민의 열연은 오열과 광기, 절제된 한과 다시 의지로 나아가는 오이디푸스의 뜨거운 감정선이 객석을 압도한다. 특히 극의 마지막 객석으로 천천히 걸어나오는 황정민의 뒤로 메말랐던 테베의 땅에 폭우가 내리는 장면은 슬픔의 여운에서 나아가 숙연한 감동으로 객석을 마비시킨다. ‘리처드3세’ 때 기립박수를 보냈던 관객들을 다시금 기립하게 한 황정민의 힘. ‘리처드3세’가 시종일관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으로 객석을 쥐락펴락했다면, ‘오이디푸스’에서의 황정민은 고전극의 느린 템포로 서서히 몸을 달구다가 마지막 20분에 모든 힘을 쏟듯 무섭게 몰아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방심하고 있던 객석은 후반부 그의 연기에 속수무책으로 끌려들어가 압도당한다. 역시 황정민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오이디푸스는 비극적 운명의 그 자체로 대중에게 알려졌으나, 연극 ‘오이디푸스’의 여운은 다채로운 질문을 객석에 남긴다. 맨 몸의 부은 발로 걷고 달리는 그의 힘겨운 투쟁기는 그를 운명에 대결해 처참히 쓰러진 단순한 패배자로 보이지 않게 한다. 길 위에서 시작된 서사는 다시 길 위로 오이디푸스를 내몰았으나, 그의 이러한 되풀이 되는 방랑은 단순한 운명으로부터의 회피가 아닌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의지로 읽힌다. 그렇기에 “나는 살았고 그들을 사랑했고 그래서 고통스러웠다”는 그의 마지막 대사는 부모에게 버려진 생을 구제받음과 동시에 짊어져야 했던 숙명의 무게와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자 했던 자신의 선택에 대한 뜨거운 감회라 할만하다.

전체적인 무대 연출은 단순하고 모던하면서도 극적인 장면에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영상이나 소품을 활용하는 방법을 썼다. 첫 장면의 메마른 테베와 마른 나뭇가지, 자식의 자식을 낳은 이오카스테가 자식들의 아우성 속에 순식간에 백발이 되어버리는 연출은 꽤 인상적이다. 그밖에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예언가 테레시아스의 숲과 까마귀떼의 신비롭고도 음산한 장면 연출이다. 소리꾼 정은혜가 예언가 역을 맡아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의 한계와 어리석음을 한 섞인 특유의 음색으로 전달했다. 까마귀를 표현한 개성적인 의상과 소품, 불길한 울음소리는 후반부로 이어지는 비극의 예고편처럼 분위기를 잡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사진제공_샘컴퍼니

박세은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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