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18.11.19 월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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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삶과 예술 그 고통의 협연, 뮤지컬 ‘랭보’프랑스 상징주의를 이끈 예술가들의 고뇌 담아

삶이 어차피 불행의 연속이라면, 잡을 수 없는 것을 영원히 희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고통이 아닐까.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만의 시 세계에서 치열하게 시어를 고르는 랭보의 고통과, 현실을 뒤로 한 천재를 인생의 향유자로 삼아버린 베를렌느의 고통. 여기에 선지자의 아우라에 끌려 자신의 존재 의미를 헤매고 다니게 된 들라에의 고통이 더해지면 뮤지컬 ‘랭보’는 그야말로 고통의 앙상블이다. 다만 일상인의 고통과는 다른 차원에 있는 듯한 예술가들의 고통이라 그 이입이 결코 쉽지는 않다. 하지만 그 쉽지 않은 여정에 기꺼이 다가서서 시인의 삶과 시의 본질을 곱씹어 본다면 뮤지컬 ‘랭보’는 아주 느리게 퍼지고 오랜 여운이 남는 예술의 낭만을 선물한다. 독보적인 캐릭터 ‘랭보’의 아우라와 그를 사랑했던 두 남자의 삶을 좇는 동안 ‘왜 불행의 연속인 삶을 살아내야 하는가’하는 철학적 사유와 함께, 파격과 순수를 달렸던 프랑스 상징주의 시의 매력에 오롯이 빠져들 수 있다.

‘시인의 왕’과 천재 소년, 그리고 들라에
-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듀엣과 삼중창

작품의 초반 들라에는 랭보가 죽었다는 비보를 전하지만 베를렌느는 “악마가 죽을 리 없다”는 말로 이를 일축한다. 이러한 베를렌느의 차가운 태도에 의문을 품게 하는 것을 시작으로 무대 위에는 베를렌느와 들라에가 랭보의 마지막 시를 찾는 여정과, 랭보가 들라에를 통해 베를렌느를 만나게 되는 과정이 엇갈려 흐르기 시작한다. 살아서도 죽은 후에도 두 사람의 이정표처럼 존재하는 랭보는 그들의 벗이자 우상이었고, 좀처럼 헤어나올 수 없는 삶의 소용돌이였다. 작품은 랭보 스스로를 노출하는 것 외에도 베를렌느와 들라에를 통해서 랭보의 삶과 ‘랭보’라는 존재가 그들에게 미친 강한 영향력을 객석에 피력한다. ‘시인의 왕’이라 불린 베를렌느를 사로잡아버린 열일곱 천재 시인 랭보의 독특한 아우라. 이처럼 작품은 시대의 아이콘이라 할 만한 시인 랭보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그와 함께 살아간 베를렌느와 들라에의 정서변화를 따라가며 이야기를 펼쳐낸다.

서사에서 독특한 점은 랭보가 죽기 전과 죽고 난 후의 시간이 교차하는 구조를 택했는데, 그 교차지점에서 서로 다른 시공간에 있는 두 인물을 함께 노래하게 하는 듀엣이 여러 번 등장한다는 점이다. 관객은 묘하게 엇갈려 있는 시공간을 인식하면서 두 인물의 서로 다른 감정선이 하나의 노래 속에서 배합되는 흥미로운 이중창을 경험한다. 들라에와 베를렌느, 랭보와 베를렌느의 듀엣이나, 파리로 간 랭보와 베를렌느가 고향에 홀로 남은 들라에와 함께 부르는 삼중창은 그 자체로도 듣기에 좋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강력한 유대감으로 얽혀 있는 인물들의 관계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세 인물의 서로 다른 길, ‘고통’의 협연
-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예술인의 삶

랭보가 택한 ‘투시자’로서의 삶은 미지의 세계를 방랑하는 모습이 언뜻 매혹적으로 보이지만,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이상이라는 점에서 수많은 고통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파리에서 기성 문단을 조롱하고 자신만의 시 세계로 나아가고자 했던 랭보의 시는 대중에게 쉽게 인정받지 못했고, 그의 곁에서 영감을 얻던 베를렌느조차 파산과 이혼소송이라는 현실의 벽에 가로막힌다. 고향 친구 들라에는 랭보가 가족과 고향을 버리고 떠나 유부남인 베를렌느와 동거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고향에 돌아가자고 호소한다. 그런 들라에 역시 또 다른 고통 속에 있다. 자신이 베를렌느처럼 랭보의 시 세계를 함께 하는 향유자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은 랭보처럼 확고한 삶의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데서 오는 깊은 좌절이다.
 
현실에는 태만했으나 시적 태만은 용서할 수 없었던 문학인들의 삶은 일견 눈부시다. 이들을 두고 누가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라고 쉽게 비난할 수 있을까. 랭보의 투지와 베를렌느의 고뇌는 한 걸음 떨어져서 지켜보는 관객에게는 우리가 어느새 잃어버렸던 순수하고도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관객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예술인들의 삶을 지켜보며 삶의 가치를 물질적이고 생산적인 것만으로 환산해 온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오롯이 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삶의 고통과 차라리 맞서며 고통스런 현실의 복판으로 걸어들어가는 길을 택한 랭보. 그의 결정은 비록 비참한 말로로 귀결됐지만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눈부신 여운과 의미 있는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진정한 우리의 삶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할까 하고.

무대 연출, 랭보와 베를렌느 감정선 아쉬워
- 약한 서사 보완할 매력적인 캐릭터들

창작 초연인 만큼 아쉬운 점도 더러 눈에 띈다. 서사에 크게 기대지 않는 작품인데다, 화려한 무대 장치가 없는 만큼 캐릭터들의 관계성을 좀 더 두드러지게 내세우지 못한 점이 아쉽다. 랭보가 베를렌느에게 끼친 영향력이나 둘의 서로에게 느끼는 특별한 감정을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을만한 사건이나 장면들을 좀 더 개연성 있게 배치했더라면 관객이 더 인물들에 이입하기 쉽지 않았을까. 랭보의 죽음 이후로 차가워져 있는 베를렌느의 초반 모습과 대비될 수 있도록 랭보 생전에 둘의 행복했던 시절의 감정선을 후에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줬더라면 서사가 약한 지금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름다운 시어를 살린 인상적인 넘버들이 많은 만큼, 그에 비해 단조로운 무대 연출도 아쉬움이 남는 지점이다. 조명의 색과 밝기로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좋았으나 뒷배경의 활용을 좀 더 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지그재그로 구성된 무대 동선도 등퇴장 때 일관적으로 반복되면서 제한된 무대 활용이 더욱 아쉽게 느껴졌다. 동선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는 점은 작품 후반으로 갈수록 감동을 약화시킬 수 있는 요소다. 서사에 감정선을 더욱 살리고 이에 맞게 뒷배경을 좀 더 서정적으로 활용한다면 무대제약 때문에 동선이 일관되더라도 장면의 인상이 두드러져 더 감각적인 분위기가 연출되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잠시 멈췄으면 하는 ‘랭보’만의 명장면들
- ‘랭보-베를렌느-들라에’ 다양한 조합 기대

방랑의 아이콘 랭보의 생애를 다룬 만큼 작품은 ‘랭보’만의 감성이 묻어나는 인상적인 장면들이 꽤 있다. 휘파람과 함께 짧을 담뱃대를 물고 등장하는 스타일리시한 랭보의 첫 등장신이나, 랭보와 베를렌느가 함께 바닷가에 가서 모래 위에 쓴 서로의 시에 입맞춤을 하는 낭만적인 장면은 여타의 작품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감성이 살아있다. 특히, 옷을 풀어헤친 채 바닥에 누워 잠든 랭보와 그의 곁을 지키며 책상에 앉아 ‘초록’이라는 시를 쓰는 베를렌느의 모습은 잠시 멈춰 두고 오래도록 감상하고 싶을 만큼 장면 자체가 아름다웠다. 작품 후반에 리프라이즈되기도 하는 넘버 ‘초록’은 실제 베를렌느의 시를 그대로 살려 쓴 가사가 마치 베를렌느가 살았던 당시의 랭보를 향한 그의 마음을 그대로 노래하는 듯해 객석의 심금을 울린다.

국내 초연인 뮤지컬 ‘랭보’는 다양한 개성을 가진 배우들을 대거 캐스팅해 그 다양한 조합을 비교해보는 매력도 빼놓을 수 없다. ‘랭보’역에 박영수, 정동화, 손승원, 윤소호가 무대에 올라 4명의 서로 다른 랭보를 만날 수 있고, ‘베를렌느’역에는 에녹, 김종구, 정상윤이, ‘들라에’ 역에는 이용규, 정휘, 강은일이 각각 맡아 다양한 케미를 선보인다. 공동주연이라 할 만큼 비중 있는 셋의 관계성이 핵심인 만큼 배우들이 어떤 조합이냐에 따라 작품은 서로 다른 분위기를 연출할 것으로 기대된다.

박영수의 ‘랭보’는 열일곱다운 순수한 치기와 개구진 면모를 드러내면서도 기성 문단의 시를 가감없이 비판하고 자신의 시 세계를 주장할 때는 날카롭게 자신감에 찬 얼굴을 해서 천재 시인다운 아우라를 잘 드러냈다. 정상윤의 ‘베를렌느’는 랭보와 대비되는 현실적인 고뇌를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고, 특유의 풍성한 중저음으로 호소력 있게 노래해 가장 관객이 공감하기 쉬운 현실 캐릭터를 선보였다. 강은일의 ‘들라에’는 특유의 미성과 소년미로 전반부에서는 어린 시절 추억을 더욱 아름답게 느끼게 했고, 후반부에서는 붙잡을 수 없는 친구의 곁을 맴도는 아련한 연기로 애틋함을 더해주었다.

사진 제공_라이브(주), (주)더블케이필름앤씨어터

박세은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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