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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아름답고도 잔혹한 비극의 만화경, 뮤지컬 ‘웃는 남자’화려한 무대에 배우들의 호연까지, 창작 초연 완성도 높아

마치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이렇게나 비극적인 인물의 일대기가 이렇게나 아름다운 무대로 재탄생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관객을 빨아들이는 듯한 화려한 무대가 현실과 비현실, 의뭉한 해학과 날카로운 풍자 사이에서 한 편의 잔혹한 동화를 완성한다. 격랑의 파도와 혹한의 설원, 화려한 무도회와 유랑 서커스단의 곡예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바이올린맨의 서정적인 연주가 무대의 책장을 낭만적으로 넘겨준다. 잔인한 폭력으로 웃음이 낙인처럼 새겨진 채 행복할 권리를 약탈당한 ‘웃는 남자’.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동명소설 속 가장 낮은 밑바닥에서부터 저벅저벅 그가 걸어나온다.

“넌 나의 별, 넌 나의 눈. 내 삶의 전부”
-저 밑바닥에서 기적처럼 만난 운명

작품은 첫 장면부터 매우 인상적이다. 어린 그윈플렌은 매서운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닷가에서 자신의 얼굴을 기형으로 만든 인신매매단에조차 가혹히 버려진다. 혹한의 눈보라 속에서 살기 위해 헤매던 그윈플렌은 우연히 한 여자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죽은 어머니의 품에서 그녀를 구해낸다. 아기를 안고 한 허름한 오두막집 문을 간절하게 두드린 그윈플렌. 인간혐오에 염세주의자인 우르수스와 기형의 얼굴을 가진 사내아이, 눈 먼 여자 아이라는 가혹한 운명의 세 사람이 기적처럼 가족이 되는 순간이었다. 가장 밑바닥에서 버려지고 소외된 인물들의 이 기이한 결합은 부나 권력으로 대신할 수 없는 헐벗은 자들의 진정한 인간애와 연대의식을 보여준다.

한 작은 생명체를 위해, 다른 역시 작은 생명체가 죽음과 싸워냈다. 그는, 겨울과 눈, 고독, 공포, 추위, 배고픔, 목마름, 회오리바람, 이 모든 형태의 죽음들과 싸워냈다. 그녀, 데아를 위해, 이 열 살짜리 타이탄은 밤의 거대함과 싸웠다. 그녀는 어린 아이 그윈플렌이 이것을 해냈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사내 그윈플렌은 나약한 그녀에게 힘이었고, 가난한 그녀에게 풍요로움이었고, 아픈 그녀에게는 치유였고, 눈 먼 그녀에게는 시력이었다.    - 빅토르 위고, 원작소설 <웃는 남자> 중에서 -

특히 그윈플렌과 데아의 결합은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영혼의 반쪽과도 같다. 데아에게 있어서 그윈플렌은 그녀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해준 은인이자, 대신 눈이 되어주는 안내자이자 버팀목이다. 그윈플렌 역시 아름다운 그녀에게 사랑과 찬사를 받으면서 자신이 ‘괴물’이 아니라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인간’이라는 큰 위안을 얻는다. 작품의 한 축을 이루는 둘의 사랑이야말로 가장 낮은 곳에서 보여주는 가장 숭고하고 절대-적인 인간애라 할 수 있다.

‘인신매매’와 ‘프릭쇼’로 대변되는 17세기 유럽의 비인간성
-부자들의 낙원 vs 가난한 자들의 지옥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다. 17세기 유럽 모든 권력과 부를 가진 귀족들에게 남겨진 것은 무료함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아름다움이나 화려함에 끌리지 않았다. 타인의 기형적 신체를 액세서리처럼 소비하고, 그것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인간혐오를 유흥으로 삼기에 이른다. 작품의 모티브가 된 ‘콤프라치코스’(아이를 납치해 신체를 훼손하는 인신매매단)와 ‘프릭쇼’(기형적 외모를 가진 사람을 이용한 쇼)는 “부자들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으로 세워진 것”이라는 작품의 주제를 잘 보여주는 소재다. 극 중 여공작 조시아나는 무료함 끝에 찾아낸 그윈플렌의 존재를 장난감처럼 소유하려 하고, 그윈플렌은 행복할 권리를 얻고 싶은 마음에 그녀에게 이끌린다. 하지만 부자들의 낙원에 있는 것은 ‘사랑’과 ‘교감’이 아니라 ‘억압’과 ‘유희’였고, 그 안에 진정한 행복은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난한 자들의 지옥에는 ‘사랑’과 ‘교감’이 있었다. 날마다 프릭쇼로 생계를 이어가는 광대들은 쇼가 끝나면 분장을 지우고 강가에서 춤을 추며 “눈물은 강물에 흘려보내”라고 서로를 위로한다. 그윈플렌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상처받을 데아를 위해 복화술로 그윈플렌의 존재를 만들어내는 극중극의 장면 또한 기괴한 그들을 한 가족처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귀족들의 정원에서 가진 자들은 서로를 멸시하고 기만하기에 바쁘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앤 여왕의 드레스 끝자락을 잡고 그녀의 움직임대로 뱅글뱅글 도는 익명의 하인이다. 극은 오로지 귀족을 위해 존재해야하는 하인의 얼굴을 마스크로 가림으로써 마치 무대의 소도구인 것처럼 활용했다. 마치 작품 속 어느 곳이 진정한 천국이고 지옥인지를 묻는 듯하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상위 1%’ 상원의원 vs ‘웃는 남자’ 그윈플렌

이 작품의 백미는 역시 2막 후반부의 상원의회 씬이다. 무대 곳곳에서 활용된 찢어진 반원의 입모양이 상원의회의 붉은 좌석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시선을 사로잡는다. 화려하게 치장한 거만한 귀족들이 자신이 ‘상위 1%’임을 강조하며 자신들만을 위한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자, 그윈플렌은 이들에 맞서 법안 반대를 외친다. 그윈플렌의 현실을 꿰뚫는 듯한 직언은 꼭대기에 앉은 앤 여왕을 향해 잘 벼린 칼처럼 내리꽂힌다. 원작소설에서 빅토르 위고는 이 장면에 열 페이지 가량을 할애할 만큼 그윈플렌의 연설에 힘을 쏟았다. 갑자기 영웅처럼 돌변해 사회 정의를 열변하는 그의 모습이 자칫 무겁게 흐를 수 있는 이 장면을 작품 전체의 백미로 바꿔낸 것은 박효신의 열창과 호연 덕분이었다. 해학과 연민이 따뜻하게 흐르던 1막의 분위기를 날카롭게 바꾸는 그의 유려한 연기에 객석의 찬사가 쏟아졌다.

새벽은 옵니다. 새벽은 그 안에 저항할 수 없는 햇살을 담고 있습니다. 과연 누가 하늘에 태양을 던지는 이 투석기를 막겠습니까? 태양은 권리입니다. 여러분은 특권계급입니다. 두려워하십시오. 진정한 집 주인이 문을 두드릴 것입니다. (생략)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왕입니다. 누가 나를 먹여주고 치료해주었을까요? 기아로 허덕이는 사람입니다. 나는 클랑 샤를리, 그러나 그윈플렌으로 남습니다. 나는 즐기는 자들 사이에 있으나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있습니다. 이 사회는 거짓입니다. 그 사회가 진실이 될 날이 올 것입니다.      - 빅토르 위고, 원작소설 <웃는 남자> 중에서

문학에 상징과 은유라는 시적인 언어가 있다면, 무대에는 음악과 조명, 연출이라는 무대만의 언어가 있다. 뮤지컬 ‘웃는 남자’는 빅토르 위고 스스로가 자신의 최고 걸작이라 칭했던 동명의 원작 소설을 노래와 연기, 조명과 소품이라는 무대의 언어를 활용해 대중적으로 풀어냈다. 특히, 무대 연출은 화려한 동시에 서정적이고 시적이었다. 원작에 흐르는 상징과 해학, 날카로운 풍자가 무대 연출의 곳곳에서 묻어나고 있었다. 그 독특하고도 감각적인 무대는 한국 창작 뮤지컬에서는 그간 볼 수 없었던 완성도와 개성을 함께 보여줘 깊은 인상을 남겼다.

주연 배우들의 호연, 배우 ‘박효신’의 재발견
-그윈플렌과 데아의 관계 표현은 아쉬워

뮤지컬 ‘웃는 남자’는 주연들 중에서도 박효신의 섬세한 연기력과 신영숙의 아우라가 압도하는 작품이었다. 박효신은 2막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상원의회 씬에서 넘버 ‘그 눈을 떠’와 ‘웃는 남자’를 이어부르며 폭발하는 듯한 가창력과 광기어린 연기로 객석의 찬사를 이끌어냈다. 특히 그윈플렌의 분노와 절규, 자조와 조소를 오가는 섬세한 연기는 창작 뮤지컬 초연이라는 게 믿기 어려울 만큼 높은 완성도로 극의 정점을 찍었다. 박효신의 가창력은 익히 입증된 것이지만 대극장 무대에서 손끝 떨림까지도 객석의 시선을 잡아끄는 몰입도 높은 호연은 그를 연기파 배우로서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신영숙은 역시 그녀의 명성답게 조시아나 여공작의 강렬하고도 입체적인 개성을 자신의 아우라로 객석에 각인시켰다. 특히 1막 ‘가든 파티’에서 ‘내 안의 괴물’로, 2막의 ‘아무 말도’로 이어져 ‘내 삶을 살아가’로 완성되는 넘버의 흐름이 고전극에서 보기 드문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여성캐릭터의 고뇌와 각성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이 밖에도 양준모, 이수빈의 안정적인 연기와 김나윤, 이상준의 개성적인 감초 캐릭터 연기가 객석의 눈물과 웃음을 뽑아내는 데 한몫을 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원작의 장편서사를 각색하는 과정에서 주연 그윈플렌과 데아의 고뇌와 갈등에 깊게 몰입하게 하는 단계적 장치를 충분히 심어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원작을 읽지 않은 관객은 중반부에서 급선회하는 서사 전개를 의미 있는 반전으로 수용하기가 쉽지 않고, 그윈플렌과 데아의 관계성을 깊이 있게 공감하기 어렵다. 그윈플렌과 데아의 사랑을 평범한 남녀의 사랑으로만 본다면 조시아나에게 흔들리는 그윈플렌이나 그의 마지막 선택이 쉽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그윈플렌과 데아는 서로가 유일무이한 존재이기에 사랑에 오히려 불안을 느낀다. 그윈플렌은 데아가 자신의 기형적 외모를 보지 못한 채 사랑하고 있다는 죄의식과 불안을 느끼며, 데아는 자신의 유일한 세계이자 통로였던 그윈플렌이 언젠가 또 다른 세계로 날아갈 것이라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그리고 귀족 조시아나에게 결국 버림받고 나서야 그윈플렌은 자신을 잃고 삶의 빛을 잃게 된 데아의 곁에서 비로소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둘의 특별한 관계성이 좀 더 섬세하게 드러나도록 보완한다면 이 작품의 한 축을 이루는 휴머니즘을 더욱 깊이 와닿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문득 작품을 보면서 인간에게 실험체로 붙잡혀 온 괴생명체와 말을 하지 못하는 여자의 사랑을 그린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 떠올랐다. 하지만 뮤지컬 ‘웃는 남자’에는 영화처럼 누구도 죽거나 헤어지지 않고 어딘가의 이상세계로 함께 돌아간 것과 같은 해피엔딩은 없다. 영화는 판타지였고, 빅토르 위고가 택한 결말은 현실이자 비극으로 완성되는 또 다른 사랑의 완성이었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비록 비극이었으나, 극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기도 했다. 가장 높은 곳에서 태어나 가장 낮은 곳에서 길러졌고, 허위와 가식으로 채워진 부와 권력 대신 진실한 믿음으로 가득한 사랑의 세계를 선택한 그윈플렌의 마지막 뒷모습이 여한 없이 웃는 것처럼 보였다.

사진 출처_EMK뮤지컬컴퍼니

박세은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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