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18.7.19 목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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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되돌릴 수 없는 것들과 손을 잡다, 연극 ‘킬롤로지’현대사회 비극의 뿌리를 찾아가는 3인의 독백

거미줄 같다. 치밀한 텍스트가 보이지 않는 씨줄과 날줄이 되어 서서히 어떤 하나의 지점으로 나아간다. 정신을 차려보면 옴짝달싹할 수 없는 거미줄에 붙잡혀 있고, 사로잡힌 지점에서 깨닫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이 사회의 현실이다. 연극 ‘킬롤로지’는 무대 위 뒤집어진 의자처럼 무책임하게 ‘방치’된 세 인물의 삶을 통해 기울어진 전신거울처럼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세 사람은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하지만 끝내 실패하고,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다.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가 격렬한 감정 속에 무수히 전복되다 마비에 이르게 되는 교차점. 그렇게 연극 ‘킬롤로지’는 아주 촘촘하고 치밀한 방식으로 비극을 잣는다.

관객의 상상력으로 완성한 3인의 모놀로그
-불연속적 서사가 만들어낸 ‘비장미’

한 인간에게 일어난 비극과 그 고통을 논리적인 서사로 조리 있게 기술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작품은 인물들의 독백에 의해 분절적으로 소환되는 과거의 어떤 특정한 순간들을 관객의 상상력으로 완성시키는 방식을 택한다. 세 인물이 선택적으로 재생하는 과거의 기억들은 불연속적으로 접합되지만 막대한 양의 텍스트로 저마다의 이야기를 견고하게 쌓아올린다. 세 인물은 과거에 대해 어딘가 불길하고 우울한 블랙유머를 섞어 기술함으로써 독특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특히 데이비의 자조적인 욕설, 폴의 서사와 맞지 않는 무감각한 쾌활함이나, 알란의 무기력한 어법은 각 캐릭터에 맞는 온도로 서사에 몰입시킨다. 지나치게 덤덤한 척, 대수롭지 않은 척, 쾌활한 척하는 인물들의 제스처는 그와 상반된 심각하고 무거운 대사에 관객이 짓눌리지 않게 돕는 한편 인물에 대한 깊은 연민을 불러오게 한다.

작품의 후반부, 부서졌던 서사는 서서히 그 조각을 맞춰간다. 관객과 배우 모두 몰입도 높게 이어온 각각의 서사들이 서로 교차되는 순간, 논리적 마찰음을 빚으면서 작품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관객의 상상력이 숨겨진 이야기의 진정한 비극성을 깨닫는 지점에서 작품의 비장미는 조용히 폭발한다. 그제야 관객들은 무대 위를 흘러넘쳤던 그간의 무수한 텍스트들 중에서 유의미한 대사들을 다시금 발견해낸다. 지나치게 디테일하게 느껴졌던 사소한 텍스트들이 존재의 이유를 되찾는 순간이다. 전반부가 서사를 생생하고 견고하게 쌓는데 공들인 만큼 후반부에서 서사를 다시 부수는 경험은 꽤 묵직한 충격으로 돌아온다.

문제의 본질,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은 무엇인가
- 게임의 폭력성, 그 이전의 문제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은 잔인한 살인 게임, 킬롤로지. 그 게임과 똑같은 방법으로 ‘데이비’가 살해되었고, 더 이상 아들과 같은 피해자가 생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데이비의 아버지 ‘알란’이 킬롤로지 게임의 개발자 ‘폴’을 찾아간다.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은 무엇일까. 이 작품은 단순히 보면 폭력적인 게임의 위험성을 문제 제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 인물들이 털어놓는 과거 이야기에는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이 다른 곳에 있음을 암시한다.

극작가 게리 오웬은 한 인터뷰를 통해 “아버지가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데이비는 ‘아빠라고 부른 적이 없다’고 고백할 정도의 결핍을 경험하고 있으며, 엄마에게 ‘날 잡아줘’라고 속으로만 외칠 뿐 정작 도움을 구하지 못하는 소통의 부재 속에서 폭력에 무방비하게 방치되고 만다. 데이비의 고통은 학교 또한 해결해주지 못하며 억눌린 분노는 교사에 대한 폭언과 폭력으로 분출되기에 이른다.

여기서 문제 제기는 그치지 않는다. 알란은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던 살인에 대한 혐오감을 잃게 만드는 게임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과정에서 ‘예술로 포장된 쓰레기’를 만들어 판매하는 상업주의를 간접 비판한다. 또, 폴은 ‘노동자들의 인권’을 주장하면서 실리를 챙기고, 늘 높은 기준으로 아들에게 칭찬대신 질책을 하는 아버지를 통해 자본주의 기업가들의 위선과 부모의 이중성을 동시에 폭로한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정제 없이 드러내는 폭력의 사실적 묘사, 생생한 구어체의 어법으로 구축된 날선 장면들은 이 작품이 문제의 본질과 마주하려는 진정성의 강도를 잘 보여준다.

폭력과 게임의 상관성, 사회 곳곳에 그림자로 방치된 불온한 사각지대와 위험성, 그에 비해 지나치게 순진하고 무관심한 교사와 부모들, 자본주의 산업화가 낳은 물신주의와 인간성 상실의 문제까지. 작품은 세 인물의 성격을 완성해가는 과거의 궤적 속에 다양한 사회 문제들을 녹여내며 그 심각성을 돌아보게 한다. 객석에 던져지는 질문은 무수하다. 좋은 부모란 무엇이며, 올바른 학교 교육이란 무엇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가르쳐야 할 가치는 무엇이며, 위험한 것으로부터 아이들을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가.

이석준-이율-장율, 세 배우가 몰입을 이끄는 방식
- 퇴장 없는 배우들, 치밀한 대본

막이 내릴 때까지 작품은 세 배우들 중 어느 누구도 퇴장시키지 않는다. 무대의 암전 속에서 대사 없이 존재해야 하는 시간을 배우들은 묵묵히 감내한다. 게다가 불친절하고 불연속적으로 접붙여지는 셋의 독백은 서로 다른 감정선마저 과감하게 접붙인다. 하지만 어느 배우도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감정선을 지켜가는 놀라운 몰입도를 보여준다. 관객은 인물 간 시시각각 변하는 뜨겁고 차가운 온도차에서 묘한 긴장감을 느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느슨해지지 않는 대본의 치밀함에 감탄하게 된다.

세 배우가 몰입을 이끄는 방식도 저마다 다르다. 이석준 배우는 마치 느리게 끓어오르는 무쇠솥처럼 자신의 몸을 서서히 달궜다. 감정의 과잉이 전혀 없이 후반부의 폭발적인 감정으로 나아가는 집중력이 객석을 단번에 몰입시켰다. 이율 배우의 폴은 과장된 몸짓과 경쾌한 음색으로 일관하는 감정선이 흥미로웠다. 특히 어린시절의 폴과 아버지의 목소리를 오가며 회상하는 장면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어둡고 잔혹한 대사와 대비를 이루며 발랄함을 통해 내면에 광기가 어린 자신만의 ‘어둠’을 만들어냈다. 장율 배우는 장기간에 걸쳐 폭력에 노출되는 데이비를 통해 가장 다양한 감정선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결핍으로 인한 상처와 불안, 폭력에의 두려움부터 그로 인한 분노와 폭력의 재생산까지, 피해자와 가해자의 얼굴을 동시에 오가며 어느 쪽의 설득력도 놓치지 않았다.

더 이상 같은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
-“내가 손을 잡아 줬더라면 될 수도 있었던 모습”

연극 ‘킬롤로지’는 결코 어느 한 인물이나 사건에 단순히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 동시에, 절망이나 폭력으로 섣불리 회귀하지도 않는다. 폭력에 아들을 잃은 폴은 “한 번 망가지면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쳐주고, 무관심에 방치된 데이비는 “난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며 절망을 토로한다. 그렇게 이 사회의 폭력과 위선, 결핍과 소외에 무감해진 우리 자신을 직시하게 한 후, 작품은 한 발 더 나아가는 대안을 제시하는 듯하다. 알란은 자신의 상상 속에서 잃어버린 아들의 성장을 지켜본다. 그것은 “내가 손을 잡아 줬더라면 될 수도 있었던 모습”이었다. 되돌릴 수 없는 것에 손을 내미는 그의 모습은 좌절이 아닌 또 다른 희망으로 읽힌다. 마지막 장면, 끝까지 “미친 듯이 별을 향해 페달을 밟는” 데이비를 통해 작품은 우리가 끝까지 놓지 않고 좇아야 할 그 ‘무엇’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 ‘알란’이 재판장에서 호소했듯 우리는 “더 이상 같은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막아야”할 의무가 있다. 지켜주지 못한 것들, 이미 잃어버린 것들이 우리는 너무 많다.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도 여전히 중요하다. 우리 사회에 아직 남아 있는 소중한 것들을 지켜가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되돌릴 수 없었던 것’들과 지나면 ‘되돌릴 수 없을 것’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폭력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던 세 명의 독백은 우리 사회 비극의 뿌리를 치열하게 더듬으려는 가치 있는 작업이다. 생생한 이 시대의 고통의 증언이라는 점에서 ‘킬롤로지’의 쉴 새 없이 쏟아지던 텍스트, 그 속의 욕설과 비아냥, 자조와 울음조차 그 무엇 하나 버릴 것이 없었다.

사진제공_연극열전

박세은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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