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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음지에 서서 양지를 빛내는 사람”, 한국큐레이터협회 박천남 부회장

 

사내의 눈가에 작은 이슬이 잠시 스치고 지나갔다. “이 고달픈 인생살이를 누구한테 호소하겠습니까. 어머님 산소에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 큐레이터라는 우아한 명함 속에 눈물처럼 번져있는 직업적 비의를 애써 감추려는 듯 그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래도 18년 동안이나 버텨온 이유를 묻자 “팔자죠, 팔자”라고 대뜸 대답하는 이 남자, 한국큐레이터협회 박천남 부회장이다.

성곡미술관의 학예연구실장 자리에 있는 박천남 부회장은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기자를 맞았다. “오늘은 특별히 작가분 미팅이 있어 이렇게 입은 거예요. 평소엔 청바지에 티셔츠 입고 다닙니다.” 사내 나이 올해로 마흔 아홉인데, 30대 여성들이 주를 이루는 큐레이터 동네에서 그는 중견 중의 중견이다. 1992년 지금의 삼성미술관 리움인 삼성문화재단을 시작으로 호암아트홀, 부산시립미술관 등을 거쳐 2009년 5월 성곡미술관으로 왔다.

“큐레이터들이 때때로 언론에 출몰하여 전위적인 공간에서 화려한 포즈로 찍히곤 하지만, 알고 보면 수면 밑에서 하염없이 발버둥치는 백조나 마찬가집니다.” 같은 미술사학과에 들어갔지만 19세기 조선회화 공부한 친구들은 박물관에서 우아하게 연구하고 논문도 내지만, 20세기 현대회화 공부한 우리네 큐레이터들은 박봉도 서러운데 공부할 시간은커녕 때로는 환쟁이 취급까지 받는다는 것이다. “기획전시 한 번 하려면 낮에는 회의하고, 밤에는 작가 만나고, 트럭 타고 작품들 옮겼다가, 포스터를 붙였다, 찢었다, 싸웠다가.” 일 년에 이 짓을 12번 넘게 하고나면, 하도 악다구니를 물고 참아대서 턱관절이 다 튀어나온단다.

오프닝 행사 마치고 저녁에 작가들과 술 한 잔 기울이는 것도 큐레이터의 몫이다. 저녁 7시부터 눈이 말똥말똥해지는 야행성 작가들과 독대하다보면 어느덧 새벽 3시. 녹아내릴 듯 피곤하지만 서너 시간 자고 일어나 새벽같이 미술관으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가장 미안한 사람들은 가족들이죠.” 엿새 내내 미술관에 처박힌 ‘못난’ 아버지의 존재를 어떻게든 증명하고자, 일요일이면 아침부터 아이 손목을 잡아채고 악착같이 놀러 다녔다.
“요즘 젊은 큐레이터들 중에는 도록에 자기 이름 하나 더 올리고, 부지런히 카메라 쫓아다니는 애들 많습니다.” 젊은 날엔 그도 마찬가지였다. 열심히 기고글 쓰며 ‘큐레이터 박천남’이란 세 글자를 세상에 알리려 부단히도 노력했다. 하지만 땀 흘려 키운 어린 작가들이 페라리 끌고 다니고, 강남에 건물 올리기까지 그는 월급쟁이 그 자리 그대로였다. 그는 깨달았다. “큐레이터는 스타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그리고 성실하게 작가들을 빛내주어야죠.”

박래경, 장동광 선생과 2년 전에 만든 한국큐레이터협회의 후배들에게 그가 항상 채근하는 말이 있다. ‘항상 음지에 서서 양지를 지향해라. 큐레이터란 그런 사람이다.’ 그는 유독 인터뷰 내내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마음을 반복하며 언급했는데, 큐레이터란 명함을 무기삼아 권력을 탐하고, 학연과 지연에 얽매여 윤리성을 배반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사립미술관에 있건, 국공립미술관에 있건 항상 시민들을 향하는, 진정으로 열린 미술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1년 간 근무하다 쫓겨난 부산에선 가족과 떨어져서 끼니도 거르고, 저녁밥으로 흐물흐물 녹아버린 싸구려 인절미나 씹으면서 버티고 또 버텼다. ‘이 시대의 국력은 문화력이다. 그리고 큐레이터는 그 중심에 선 첨병(尖兵)이다.’ 이 지독히도 고집스런 사명감에 사내는 18년을 견뎠고, ‘큐레이터’란 완장을 차고 그 정직한 발걸음을 다시 한 번 꾹꾹 눌러 밟는다.


윤미로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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