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20.11.24 화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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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우리는 모두 라만차의 기사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상처입은 현대인에게 꿈을 일깨우는 치유의 무대

무대 시작 전. 오케스트라의 반주가 울려 퍼지는 것만으로 가슴이 뛴다. 그리고 드디어 돈키호테가 ‘The impossible dream’의 첫 소절을 부르는 순간, 눈시울은 뜨거워진다. 메마르고 상처받았던 일상의 가슴에 그대로 스미는 듯한 가사들. 해맑고 당당하게 치켜뜬 돈키호테의 팔과 구부정한 등. 그리고 햇살처럼 내리쬐는 조명.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는 그렇게 수 년 동안 객석과 함께 하며 관객들을 ‘라만차의 기사’로 만들어왔다. 뜨겁고도 정직한, 잊고 살았던 그 무엇을 새삼 깨닫게 하는 치유와 회복의 무대.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가 다시 돌아왔다.

‘세르반테스’의 극중극, 불가능한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배경은 스페인의 한 지하감옥이다. 우리가 잘 아는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를 데일 와써맨이 뮤지컬로 각색했다. 데일 와써맨이 “그 자신이 곧 돈키호테였던 세르반테스에 존경을 표하는 작품”이라고 말한 바 있듯, ‘맨 오브 라만차’는 작가인 세르반테스를 화자로 등장시킴과 동시에 소설 속 캐릭터인 ‘돈키호테’로 분하게 해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와의 합일과정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세르반테스와 감옥 안의 죄수들이 각각의 캐릭터로 분하는 과정, 즉 배역을 나누고 분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는 등의 과정을 객석에게 모두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내화인 ‘돈키호테 이야기’는 더욱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거리에서 출발하게 되고, 객석과 무대의 이러한 거리두기는 관객의 흥미를 유발하는 동시에 더욱 적극적으로 극을 바라보게 하는 참여의식을 높이게 된다.

이 작품에서 극중극 형식이 흥미로운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극중극의 주인공인 ‘돈키호테’ 역시 그 안에서 또 다른 극을 펼치고 있는 ‘가짜’ 캐릭터에 불과하며, 실상은 기사 이야기를 너무 많이 읽고 스스로를 기사라 착각하는 힘없는 노인 ‘알론조’라는 점이다. 이러한 극 속의 또 다른 거짓환상은 극의 후반에서 스스로의 초라한 실체를 직시하게 하는 ‘거울의 기사’에 의해 무참히 깨지게 되는데, 여기서부터 극중극의 역설적인 힘이 발휘된다. 

관객은 후반부에 이르러 ‘돈키호테’ 캐릭터에 공감과 이입이 극에 달한 시점에서 캐릭터와 마찬가지로 거울의 눈부신 빛에 직면한다. 거울은 객석 여기저기에도 날카로운 빛을 흩뿌리고, 관객 역시 알론조와 마찬가지로 환상에서 빠져나온다. 그리고 쓰러졌던 알론조가 산초와 알돈자의 도움으로 스스로 다시 꿈의 세계인 ‘돈키호테’의 모습을 되찾는 순간, 관객은 깨닫는 것이다. 비현실적이며 홀대받았던 우리의 꿈과 환상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인가를. 마치 꿈인 줄 알아도 ‘돈키호테’의 모습을 택하며 분연히 떨쳐 일어나는 알론조처럼.

캐릭터와 배우의 재발견
주체적인 여성 ‘알돈자’, 발끝까지 사랑스러운 산초 ‘이훈진’

수많은 뮤지컬 속의 여성 캐릭터 중에서도 ‘맨 오브 라만차’의 ‘알돈자’는 특별하다. 가장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가장 다양한 배역을 연기하며, 가장 극적인 변화를 이뤄낸다는 점이 그렇다. 가장 낮고 미천한 존재였던 여성이 스스로의 주체성을 깨닫고 삶을 바꿔나가는 과정이 지극히 현실적이면서 의지적으로 그려져 객석의 깊은 공감을 이끌어낸다. 

알돈자는 감옥 안 이름 없는 죄수에서 출발해 허름한 여관의 창녀가 되고, 돈키호테에 의해 고귀한 아가씨로 다시 태어난다. 이 세상을 ‘똥구덩이’로, 자신을 거기서 꿈틀대는 ‘구더기’로 여겼던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둘시네아’로 칭하는 순간 그녀는 꿈을 가진 주체적 존재로 거듭난다. 이미 앞선 공연에서 알돈자를 연기한 바 있는 윤공주는 알돈자의 변화 과정을 깊은 감정연기와 날카로운 대사와 목소리의 절절한 울림으로 전달했다. 특히, 2막 후반부에서 알돈자가 부르는 ‘둘시네아’는 극장을 쾅쾅 울리는 열창이 아니어도 관객을 충분히 울릴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또 이 극에서 빼놓을 수 없는 캐릭터는 ‘산초’다. 특히 2013년 이후 5년 만에 산초로 돌아온 이훈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대체 불가능한 산초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준다. 산초의 전매특허인 유쾌하고도 사랑스러운 연기가 1막의 ‘서한’에서 ‘좋으니까’로 이어지며 극대화된다. 특히 넘버 ‘좋으니까’는 돈키호테의 말과 행동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그가 “이유 없이 그냥 좋아서” 따른다는 산초 특유의 직설화법이 매력적인 곡이다. 그의 무조건적인 애정은 그대로 관객의 마음에도 전이된다. 맹렬하게 꿈을 좇는 순수한 정의의 기사에게 이끌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이훈진 배우의 손끝과 발끝까지 실려 있는 능청스러움과 귀여움이 현실의 냉혹함과 환상의 허무맹랑함을 유쾌하게 얼버무려 주는 중요한 매개가 된다.

노래 한 곡의 위대한 힘, ‘The impossible dream’
-불가능해 보이는 꿈은 모두 유효하다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싸움 이길 수 없어도, 슬픔 견딜 수 없다 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힘껏 발을 뻗으리라. 이게 나의 가는 길이오. 희망조차 없고 또 멀지라도 멈추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따르리라.”        -‘The impossible dream’ 중에서-

어두운 현실의 한줄기 빛과 같이 내리쬐는 핀 조명. 그리고 무대에서 객석으로 점차 흘러넘치는 넘버 ‘The impossible dream’. 이 작품에서 이 넘버는 주제이자 상징이며, 세르반테스가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이자, “왜 헛된 꿈을 꾸는가?” 또는 “현실이 우리를 좌절하게 만들 때조차 왜 꿈을 놓지 말아야 하는가?”의 질문에 대한 돈키호테식의 답변이기도 하다. 곡의 가사는 나이와 시대를 초월해서 이 작품을 영원히 생생하게 살아 있게 하는 힘이다. 이 노래를 부르고 들을 때마다 가사의 의미는 배우와 관객에게 매번 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다르게 해석된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늘 따뜻한 위로가 된다는 점이다. 방황했던 지점으로부터 출발했던 지점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 이 곡에는 숨어 있다.

이 지극히 치열한 약육강식의 현대사회에서 ‘정의’와 ‘이상’을 꿈꾸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가. 그러나 승패만 따지는 삶에서 게임이 끝나면 우리에게 남겨지는 것이 무엇인가. 결국 우리가 이룰 수 없고, 불가능한 꿈이라 비웃었던 것들이 그 길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사람들에 의해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닐까. 마치 ‘The impossible dream’을 미처 다 부르지 못하고 죽는 돈키호테의 뒤를 이어 살아남은 알돈자와 산초, 그리고 죄수들이 목을 높여 노래를 이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는 늘 녹록치 않았고, 미래 또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래는 다시 주어지고, 그 미래는 다시 현재가 되며 과거가 된다. 그렇다면 반대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언젠가 반드시 현재가 된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불가능한 우리들의 꿈은 모두 유효하다. 우리는 모두 라만차의 기사들이다.

사진 출처_오디컴퍼니

박세은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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