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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아름다움은 어떻게 군림하는가, 연극 ‘타지마할의 근위병’10월 15일까지 대명문화공장 2관 라이프웨이홀 공연

서사는 잔혹하며 연출은 강렬하다. 대사는 시적이면서 날카롭고 의미심장하다. 무대가 막을 내린 후에도 이 개성 강한 작품은 명징한 피의 이미지와 함께 한동안 관객의 마음을 무수한 질문으로 붙잡는다. 1648년 인도, 그리고 타지마할. 시간과 공간이 객석의 현실과 동떨어진 이국의 과거임에도, 서사는 절묘하게 오늘날 현실을 투영해 관객의 가슴을 서늘하게 찔러온다. 이것이 부당한 권력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일까. 권력이 자기 보존을 위해 얼마나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는가를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다. 황제의 명으로 2만 명의 두 손을 자른다는 매우 비현실적인 사건의 잔혹성은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작품 전체의 개연성과 활기를 불어넣는데 성공한다.

“내가 아름다움을 죽였어”
- 권력이 독점한 아름다움, 그 폭력과 굴종에 대한 서사

처음부터 근위병 휴마윤은 무대에 홀로 서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궁극의 아름다움 타지마할 곁에 남은 것도 죄책감의 고통이 표정을 앗아간 휴마윤의 굳은 얼굴뿐이다. 아름다움은 권력이 탐하는 불멸의 특권을 먹고 자라 괴물처럼 군림하는 성채가 되었고, 그것을 끝까지 지키려던 휴마윤은 결국 저항하는 바불과의 갈등 끝에 자신의 아름다운 시절을 상실한다. 이것은 부당하게 권력을 탐하는 자의 무자비한 폭력과 그에 굴종하거나 저항하는 약자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문제적 대상, 영원히 존속해야 할 아름다움 ‘타지마할’이 놓여 있다.

아름다움을 독점하기 위해 황제는 ‘타지마할’ 건축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손을 자를 것을 명한다. 역사상 아름다운 것은 그것을 소유하고픈 인간의 욕망과 맞닿아 권력이 자신의 힘을 존속하거나 강화하는 데 유효한 도구로 전락하곤 했다. 문제는 여기서 더 나아가 권력이 스스로 악을 ‘행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권력은 언제나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자신의 대리인을 만들어 대신 악을 ‘행하게’ 함으로써 추종자를 늘려간다. 대리인이 된 근위병 바불과 휴마윤. 바불은 결국 자신이 아름다움을 만들 손을 ‘자르는 행위’를 함으로써 ‘아름다움을 죽였노라’고 괴로워하고, 이에 휴마윤은 단지 우리는 ‘임무를 수행한 것뿐’이라고 반박한다. 둘이 어렸을 때부터 돈독한 ‘바이(친구 관계)’인 동시에, 폭력에 대해서는 죄책감(저항)과 수용(굴종)의 상반된 태도로 충돌하는 관계라는 점에서 작품은 긴장과 이완을 반복한다.

2인극으로 만들어낸 거대한 서사
- 약자의 고통에 초점, 집중과 생략의 연출 돋보여

작품의 형식은 2인극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2인의 근위병 외에는 목소리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대 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캐릭터가 2인의 눈과 입을 빌어 존재감을 드러내고 거대한 서사를 완성한다. 신보다 우위에 군림하는 오만한 황제, 손이 잘린 2만 명의 인부들, 뛰어난 재능의 천재 설계자 우스타드, 그리고 휴마윤의 권위적인 아버지까지.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이들이 보이지 않는 무대 밖에서 사건을 이끄는 것을 느끼면서, 관객이 보게 되는 것은 엉겁결에 사건에 휩쓸려버린 두 주변인의 표정이다.

작품은 사건의 중심인물(황제, 우스타드)이 아닌 주변인물(근위병들)을 일부러 서사의 주인공으로 설정함으로써 강자 중심의 전형적인 사건 전개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권력 그 자체가 아닌 그 폭력성에 초점을 두고 이에 가담한 약자의 고통을 섬세하게 드려내는 데 성공한다. 강자의 그림자는 약자의 몸 위에서 가장 짙게 드리워지는 법. 작가 라지프 조셉은 강자의 폭력이 약자에 의해 기술될 때 가장 큰 공감과 설득력을 얻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2만 명의 손을 자르는 장면을 일부러 생략한 의도적인 연출도 눈에 띈다. 이를 통해 약자인 근위병들이 폭력의 직접적인 행위자인 것처럼 비춰지는 것을 막고, 지나치게 자극적인 장면으로 전체 주제의식을 흐리게 할 여지를 적절히 차단했다. ‘그 사건’ 직후 오직 그들의 피범벅된 지친 얼굴, 그리고 그 위에 나타나는 죄책감과 공포, 두려움의 표정에만 집중함으로써 관객은 사건의 참상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게 된다. 때로는 보여주지 않는 것이 보여주는 것보다 더 강렬한 잔상을 남긴다.

2인의 동화적 상상, 그들의 ‘아름다운’ 세계
- 발명품, 새소리, 원시림 속 ‘자유’

황제의 권력과 폭력으로 점철되는 잔혹한 세계와 대비를 이루는 또 하나의 세계는 근위병 2인의 동화적 상상에 의한 환상 세계이자, 과거 추억으로 되살아나는 원시림의 순수한 세계다. 그 둘은 사건과는 무관한 상상의 ‘발명품’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하늘을 나는 거대한 가마새,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운송용 구멍 등이 억압하는 권력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게 한다. 여기에 단순한 조명 변화에 색을 더하는 새 울음소리나 날갯짓치는 소리가 탐욕과 폭력의 상징이 돼버린 타지마할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자유로운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이렇듯 그들의 상상에는 규율이 없고, 아름다움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자유롭게 주어진다.

이러한 환상적인 상상(또는 회상)과 2인극의 끈끈한 관계성은 잔혹한 사건성, 고어한 연출과 좋은 대비를 이루면서 극의 후반 따뜻한 감정선을 더한다. ‘그 사건’이 있은 직후 핏빛 가득한 처형장에서 두 사람은 블랙코미디에 가까운 몸동작을 보이다가 발명품에 대한 상상으로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이 대목의 상황과 대사 간 기이한 모순이 의미심장하다. 핏물이 가득한 잔혹성의 정점에서 둘이 펼쳐내는 비현실적인 환상이야말로 거대한 권력의 하수인에 불과한 약자가 부당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저항의 모색이다. 폭력으로도 짓밟혀지지 않는 두 사람의 추억과 소망은 곧 황제를 살해하고 아름다움을 되찾으려는 바불의 변혁적 의지로 발전한다.

서사를 다루는 제작진의 균형감각
- ‘확대’와 ‘생략’, 강렬한 장면 연출

연극 ‘타지마할의 근위병’은 주제가 가지는 문제의식으로 관객을 지나치게 몰아붙이지 않으면서도 의미 있게 비어 둔 서사가 막이 내린 후에도 관객의 몫을 충분히 남기는 작품이다. 2인을 최대한 활용해 서사의 가지를 세심하게 확대하는 동시에 과감한 생략을 적절히 끼워 넣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연극의 마법을 능숙하게 시연한다. 아름다운 동화 같은 포스터 뒤에 피바다를 짐작할 관객이 얼마나 있을까. 잔혹한 사건을 일일이 ‘보여주기’보다는 ‘말하기’로 생략해 표현하면서도, 단순하고도 강렬한 장면 연출은 놓치지 않는 좋은 균형감각으로 작품의 개성을 살렸다.

‘조성윤(휴마윤)-김종구(바불)’ 페어는 안정적인 호흡을 보여줬다. 특히 죄책감에 시달리는 바불을 연기하는 김종구의 섬세한 표정, 그런 바불을 다독이기 위해 얼굴과 몸을 닦아주고 옷을 입혀주는 조성윤의 동작 연기는 대사가 다 하지 못하는 둘의 내면과 관계성을 잘 보여줬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풍경을, 매우 극단적인 상황에 놓인 격한 감정선임에도 과장 없이 마치 그림 그리듯 묵묵히 채워 넣은 것이 인상적이다. 또한 배우들은 애드립이 전혀 없이 오직 극본에 충실한 연기로 대사의 은유와 함의를 있는 그대로 객석에 전달하려 했다. 드물게 몇 번의 대사 실수가 있긴 했지만 잘 짜여진 극본에 충실한 연기가 때로는 객석을 편안하게 몰입시킨다는 것을 충분히 실감케 하는 무대였다.

사진 제공_달 컴퍼니

박세은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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