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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재의 힙합론 5] 힙합의 질적 사회화

 

힙합 예술가들이 사회적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는 중세, 성 밖에서 태동한 부르주아지에서 부터 19세기에 이르는 부르주아지가 지니는 사회적 영향력을 본받아야 한다. 그래야지만 사회적 위치를 체계적으로 인식하여 현실에 반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부르주아지의 발전 요소와 장점 요소를 힙합 예술가들이 본받아야 할 점과 결부시켜 보겠다.

부르주아지의 발전적 요소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쓴 『공산당 선언』에서 중세의 농노로부터 초기 도시의 성 밖 시민으로부터 부르주아지의 최초의 요소가 발전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성 밖 시민이란 중세 독일의 도시의 경계 밖에 거주하며 대부분 수공업에 종사하는 소규모 자유농민으로, 그 도시의 시민권을 부여받고 있었다. 한편 독일어로는 ‘창을 가진 시민’이라는 뜻인데, 도시 방위를 위해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힙합 인들은 부르주아지의 최초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성 밖 시민에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영향은 무한도로 많으며, 사회적으로 그 영향력을 실천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의 말을 기억하자. ‘보다 많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힘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임을…’ 성 밖 시민이라는 것은 제도권(대학), 사회적으로 인식되는 인정된 직업, 예술로서의 진정한 가치인정 등이 이것인데, 힙합 인들은 이러한 점에서 현실적으로는 벗어났지만 점점 그 안의 힘들을 압도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은 ‘창’이 된다.

또한 그 창이 도시의 방위를 뜻 한다는 것은 한국의 힙합이 세계의 최고로써 한국의 위상을 지켜 준다는 것이다(힙합은 외국 춤이지만 한국인의 긍지와 의지로서의 노력으로 세계 최고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고, 세계대회에서도 매년 우승하고 있다). 수공업은 물론 힙합 인들에게 있어 춤에 해당 될 것이고, 자유농민의 비교로서는 힙합 인들이 틀에 박히지 않은 사상과 어떤 위치적 인물들에게 구속되지 않고, 자신이 향해 나아가는 자유로운 춤적 사유가 이것이다.

시민권을부여 받았다는 것은, 힙합 인들에게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시민권을 갖춰있다는 것이며, 시민인 동시에 예술인으로서 모든 재능과 능력을 사회에 부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된 요지는 제도권 진입과 사회적 직업의 인정, 예술적 가치의 획득인데, 아직까지 사회에서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외관적 구어로서만 가식적인 인정성의 발언을 하고 있다. 겉으로는 모든 것을 갖춰가고 있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저급하고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듯한 뉘앙스와 업신여김이 심연 얕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위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지만, 심연의 어두운 생각들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힙합 인이 성 밖 시민으로서 부르주아지에 이르게 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기 따름 이지만, 위 목표를 조금이나마 상기한다면, 그 어려움은 덜하게 되며 이른 시일 안에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힙합 인들이 현실에서 위 조건들에서 벗어날 지라도 춤의 창을 소유하고 지속적으로 고군분투하여 노력에 노력을 거듭한다면, 성 밖 시민이 부르주아지의 요소가 된 것처럼 조건들을 이루어 내면서 그들의 사회적 가치를 획득하고 인정받게 될 것이다. 힙합 인들에게 중요한 점은, 자신의 춤에 사회적인 지식과 지혜를 습득하여야지만,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게 간사하게 이용당한 것처럼, 이용당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부르주아지의 간사함은, 사업가나 투자자등이 춤을 이용하여 돈을 벌기위해 요구하는 자들이다.

힙합 인들은 자신들의 ‘창’을 소유하여 지식과 지혜를 쌓아가며, 인정받는 사회적 위치의 상황들을 획득해가면서 부르주아지적 위치의 가치적인 면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힙합 인들이 이러한 조건들을 이뤄내지 못한 다면 영원한 노동자인 프롤레타리아트로 남게 될 것이다).

엥겔스가 1888년 영어판에서 말하는 부르주아지는 사회적 생산 수단의 소유자이며, 임금 노동을 착취하는 근대의 자본가 계급을 말하는데, 여기서 ‘착취’라는 단어에서 착취 그 자체의 단어보다는 힙합 인들이 일한 대가를 올바르게 받을 수 있으며, 올바른 대가를 챙겨 줄 수 있는 보상의 측면으로 재해석하여, 사회적 생산 수단의 소유자는 힙합 인이 그 공연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힙합 인들의 단체, 즉 무용단은, 힙합 인의 소유여야지 투자자나 사업가의 소유가 되면 그릇된 결과를 가져올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연 사업가는 우리에게 돈만을 원하지만, 우리는 춤으로 표현하는 예술의 성취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럼 부르주아지의 사회적 현실 속에서 영향 받을 만 한 점을 찾아보도록 하자. 부르주아지의 시대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의 견해적 차이로 대립하지만, 필자인 나로서는 부정성이나 긍정성을 따지기 보다는 그들의 사회적 영향력의 본받아야 할 점등을 실존적으로, 현 시대적이며 미래지향적인 면에서 새로이 재해석하여 분석할 것이다.
부르주아지적인 면은 중산계급이 사회적 지위 권을 획득하여 고위층(귀족)과 저위 층까지도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확보하고 있는 사회 계급층이었다.

중산 계급에는 프롤레타리아(노동자)와 부르주아지의 두 계급을 형성하게 되는데, 부르주아지는 중산 계급 속에서도 귀족과 대등한 대우를 받으며 노동자 계급을 이해하는, 반면 그들 약점을 역이용해 실존적 이득을 보게 된다. 물론 착취라는 단어로써 그들의 행동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면에서 본다면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긍정적인 면이란, 바로 실존적인 면을 얘기 하는 것이다. 그들은 착취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노동력을 최대로 사용한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노동자 계급서 올라온 부류도 비일비재하다. 그들은 글을 알고 지식을 습득하여 사회 구조와 전반을 이해할 줄 아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에서 머물지 않고 부르주아지로 올라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실존적으로 그들의 착취적 행동을 ‘사용’이라는 행동으로 표현한 점은 이러하다.

노동자 계급은 대부분이 무지하며, 생각보다는 주로 몸으로 만 행동하는 노동자이다. 그들은 일하고 돈을 받는 것만을 원하지, 더 이상의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즉 먹고 살기를 원하지, 다른 사회적 기반을 이해하려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지식이 있었다면, 돈이 없으면 머리라도 잘 써서 몸을 덜 피곤하게하고 더 큰 돈을 버는 법을 알았을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처세법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 ‘공사장의 인부는 무조건 적으로 벽돌을 나르지 그 건물이 어떻게 지어지는지는 전반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얘기했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의 ‘오디세우스’도 지혜와 현명함이 없었더라면 걸인이 되어 페아시아에 갔을 때, ‘나우시카 공주‘와 ‘알시노우스 왕’에게 심한 천대를 받고 추방당했거나 적으로 오인되어 죽었을 것이다. 그런 그도 돈과 물질적인 것이 없었어도, 지식과 지혜로 인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대우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노동자들은 이러한 지식과 지혜가 모자라기에 그 힘든 상황에서도 돈만을 바라고, 생각 없이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 결국은 인생을 한탄하게 되는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그런 무지를 이용해 그들의 육체의 노동을 사용한 것이다. 즉 그들이 무지하지 않다면 당연 그들에게 착취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배고픔은 현실적으로 안타깝지만, 힘든 상황 속에서도 사유의 폭을 넓히지 않았기에 그렇게 사용되었던 것이다. 힙합 인들이 여기서 본받을 면은, 노동자(프롤레타리아트)들처럼 생각 없이 일만하고 돈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처럼, 춤만 추고 춤춘 대가로 돈만 받으면 현실이 배불러진다는 생각만을 하고 있을 것인지, 부르주아지처럼 지식과 지혜의 폭을 넓혀, 노동자라도 지배계층으로 상승하여, 무지한 자를 사용할 것인지는 생각이 있는 자라면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 이의분별이 설 것이다.

본인이 너무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 되겠지만, 니체의 권력의 의지를 이해한다면 본인을 이해 할 것이다. 아주 쉽게 말해 인간의 본능은 전적으로 모든 면에서 남보다 힘과 권력을 갖기를 원한다는 내용이다. 실존적으로 말이다.

이런 모든 것들은 결국 사회의 일원으로서 인정을 받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누구나 인정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왜 힙합 인이 현실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이지만, 미래 지향적으로 부르주아지를 본받아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대학(제도권)획득, 예술성 가치 회득, 사회의 직업으로서의 인정을 꾀하는 이유는 이러하다. 사회의 대부분의 기반들은, 대학이 미치는 힘이 크기 때문이다. 아니 전부라 해도 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현실 사회 속에서 명문 대학에 들어갔다고 하면 성공했다고 호언장담하니 말이다.

첫째로 힙합 춤이 대학 학과의 가치성을 인정받게 되면, 당연 사회의 인식적인 면에서도 긍정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둘째로는 힙합 춤이 대학 학과의 가치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예술성이라는 고급스런 가치성의 명분을 가져야 한다(만약 운동이나 스포츠로써 인정받는 다면 장래성은 희박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조건들이 조화를 이룬다면, 당연 직업성을 인정받게 되며, 사회적 지위가 회득되며 가치성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힙합 인들이여 뭐가 두렵겠는가, 자신들에게 강인한 ‘창’을 소유하고 있거늘…. 그러나 힙합 인들은 이러한 조건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다면, 영원히 춤만 추고, 그저 돈 조금 받을 수 있는, 옛 유렵의 프롤레타리아트로 머물게 될 것이다.

자-! 힙합 인들이여 긍정적 미래를 위해 부르주아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자!




글_이우재 up_rockp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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