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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정녕 갈 수 없는 나라인가, 뮤지컬 ‘곤 투모로우’오태석 원작 ‘도라지’ 각색한 역사느와르 뮤지컬

 

쪽을 진 여인들과 하얀 조선옷을 입은 사내들이 옷자락을 휘날리면 한 서린 춤은 빛이 되고 음악이 된다. 때로는 폭풍처럼 때로는 흐느끼는 듯 한바탕 춤사위가 무대를 휩쓸고 지나가면, 남는 것은 어둠뿐이다. 암흑 속에 점멸하는 듯한 희미한 등불이 하나둘 켜지고, 풍전등화의 조선 말 용상에 앉은 고종과 그 앞에 앉은 자 김옥균이 보인다. 한쪽 다리를 꿇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김옥균. 천하대세를 논하는 그의 음성이 청정하게 무대를 뚫는다.

뮤지컬 ‘곤 투모로우’는 한국 연극계의 거장 오태석의 희곡 ‘도라지’를 이지나 연출이 뮤지컬로 각색해 무대화한 작품이다. 지난해 창작산실 최우수 대본상을 받으며 더욱 초연에 대한 기대가 모아졌다. 작품은 조선 말 격동기를 배경으로 역사적 사건을 고증하기보다는, 고종과 김옥균, 홍종우를 중심으로 시대를 바라보는 인물의 고뇌와 갈등을 그리는 데 초점을 둔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나라를 위해서, 저마다 꿈꾸는 ‘그곳’을 향한 지식인들의 투지가 시대의 풍랑을 타고 거칠게 휘몰아친다.

역사느와르, 어두운 시대 짙게 표현한 무대와 안무

작품은 역사느와르라는 장르에 걸맞게 혁명과 암살, 망명과 추격 등을 중심축으로 작품 전반에 어두운 분위기를 형성한다. 작품의 세부 장면은 일상과 사건을 각기 다르게 연출해 긴장과 이완을 조절했다. 조선과 일본에서의 일상적 장면은 현실적인 설정의 배경과 소도구들로 일상성을 드러내는 데 반해, 혁명이나 사건이 발발하는 극적인 장면에서는 일상적 소품을 배제하고 속도감 넘치는 안무와 화려한 액션으로 극적인 긴박함을 살렸다. 시대의 주요 사건을 자막으로 처리해 불필요한 서사를 줄이고 속도감을 높이기도 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에 망명한 혁명가 김옥균에게 프랑스 유학파 홍종우가 고종의 암살 밀명을 받고 의도적으로 접근한다는 설정 또한 흥미롭다. 역사상 실제 김옥균을 암살했던 인물인 홍종우가 어떻게 암살에 이르게 됐는지를 허구적인 설정을 더해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사내 대 사내의 대결이라 할 수 있는 홍종우의 두 차례에 걸친 암살 시도 장면은 느와르 장르 특유의 색을 가장 짙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1막에서 김옥균의 거처를 야습한 홍종우에게 김옥균이 흔들림 없이 질문을 던지는 대목은 작품의 백미다. 옥균은 종우에게 묻는다. “프랑스어로 ‘희망’은 무엇인가? 또 ‘혁명’은 무엇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묻는다. “그렇다면 ‘동지’는 무엇인가?”

홍종우의 이상과 고뇌, 좀 더 부각되었더라면

김옥균은 암살된 이후로도 그를 그리워하는 인물들에 의해 몇 번이고 되살아나 시대의 리더로서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대한민국 최초의 혁명가, 외세 침략에 정면 돌파하려 했던 근대적 지도자로서의 그의 면모는 오늘날 대중에게도 강하게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이에 비해 홍종우의 존재감과 설득력이 다소 약한 것이 아쉽다. 그가 자신의 족보를 팔아 유학길에 오른다거나 프랑스에서 어떤 생활을 하는지를 보여주기보다는, 김옥균의 갑신정변을 바라보는 홍종우만의 시각이나 외세와 개화를 둘러싼 자신의 입지 등을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냈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홍종우의 이상과 고뇌가 김옥균이라는 독보적인 존재감에 묻혀 약화된 듯해 아쉬움이 남는다.

왕의 밀명인데다, 대가가 확실한 청탁이라고 해도, 홍종우가 고종의 명령을 쉽게 받아들이는 이유 또한 설득력이 부족하다. 원작 ‘도라지’에는 일본을 개화시킨 힘이 프랑스 선교사들에 있음을 알고, 프랑스에 갔던 홍종우가 이렇게 말한다. “내 인제 조선을 개혁하러 가야돼. 축하해 다오. 인제 조선도 일본처럼 개화할 것이다”,  “(프랑스) 그들은 우리 선조가 세운 정부형태에 우리가 집착하는 것을 탓하지 않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중략) 우리는 우리 정부 형태를 그대로 지켜나가면서 이번에는 우리가 유럽문명을 이용하고자 한다. 이 일에 있어 우리를 돕고자 하는 자에게 우리의 존경심과 사랑을 바칠 것을 미리 약속한다.”

이후 고종이 김옥균을 불러 “김옥균을 처치하고 오면 외아문독판을 지내도록 하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외아문독판이 당시 통리교섭 통상사무 관장이었음을 고려할 때 홍종우에게는 이후 더 큰 목표가 있었음을 원작의 대사를 통해 더욱 잘 유추할 수 있다. 그는 소수 지식인들에 의한 개혁이 아닌, 적극적으로 일본보다 앞선 서구의 문명을 이용하여 조선의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원작의 이 부분을 좀 더 힘주어 섬세하게 살려냈다면, 실패한 김옥균의 혁명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더하는 캐릭터로 홍종우를 더욱 부각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고종 역 조순창, 광기어린 연기와 유려한 춤사위

강필석 배우의 김옥균이 강직함과 깊은 사상적 감화로 관객을 끌어들인다면, 전혀 다른 매력으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인물이 있다. 바로 조순창 배우가 열연한 고종이다. 실존인물은 아니지만 작품에서 외세에 기대 권력을 장악하려는 인물, 이완 총리에 의해 고종은 꼭두각시 왕으로 전락한다. 고종은 한때 개화파인 김옥균에게서 국운을 살릴 희망을 보았으나, 갑신정변 과정에서 자신을 버리고 도피한 그에게서 배신감을 느끼고 강한 증오를 품게 된다.

고종의 나라와 민족을 향한, 권력을 향한, 그리고 김옥균에 대한 이중적인 애증의 감정은 시대의 불운을 타고난 그의 뒤틀린 생에서 비롯된 필연적 감정이다. 조순창은 의지를 거세당한 자로서 고종이 가지는 불안과 두려움,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한 자가 느끼는 절망과 복수심을 광기어린 표정과 목소리로 서늘하게 표현했다. 특히 그의 무용은 대사 못지않게 고종을 열연하는 중요한 요소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숨겨진 한을 흥으로 드러낸 듯한 그의 정적이면서도 유려한 춤은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조선의 마지막 왕이 품었을 쓸쓸한 그 망국의 한은, 폭발하지 않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그 무엇’이 있었다.

도라지 도라지 아, 백도라지

뮤지컬 ‘곤 투모로우’는 단지 지난 역사에 대한 회한과 반추를 담은 작품이 아니다. 작품은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세 인물들의 고뇌를 통해 현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결국 역사를 이끄는 시대정신이란 무엇인가. 국민이 우선인 나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나라는 정녕 갈 수 없는 나라인가. 비록 자신은 실패한 혁명가일지라도 자신의 피와 살이 삼천리에 도라지처럼 피어나, 또 다른 누군가는 언젠가 ‘그곳’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김옥균. 그의 뒤를 이은 후손으로서 과연 그가 꿈꾸는 나라를 만들어왔는가에 대한 뜨거운 반성이 객석의 여운으로 무겁게 남겨진다. 

극의 후반 사지가 처참히 흩어진 김옥균이 우리의 옛 전설을 담담히 읊는다. “옛날 한 어부가 물개를 잡아먹고 그 뼈를 해변에 버렸는데, 이튿날 물개 새끼 여덟 마리가 그 어미 뼈에 주둥이를 박고 젖 빨고 있더라네. 내 수급을 해변에 버려주게. 그러면 내 사지가 다시 날 찾아올 것이 아닌가.” 현재 우리는 김옥균처럼 후일을 기약하며 투혼을 바치고 떠난, 수많은 이들의 목숨에 접붙여 살고 있다. 무대 위 울려퍼지는 민요 도라지와 조선의 춤사위에 뜨거워지는 가슴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전히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객석의 우리 모두가 김옥균의 영혼이 다시 전설처럼, 이 시대의 현신으로 되살아나길 바라기 때문이다.

뮤지컬 ‘곤 투모로우’는 10월 23일까지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공연된다.

(기사에 처음 인용한 원작 도라지의 대본이 공연일시가 불분명했던 관계로, 1994년 연극 도라지의 초연 당시 대본을 인용하는 것으로 내용을 수정하였습니다.)

사진 출처_아시아브릿지컨텐츠 

박세은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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