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19.10.18 금 17:53
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리뷰
[리뷰] 타락마저 아름다운 악의 꽃이여,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창작 초연 무대, 10월 29일까지 성남아트센터에서 공연

 

이 세상에 모든 도덕과 가치, 종교와 규범이 사라진다면, 사람들은 무엇을 원하며 살아갈까. 철학자 니체는 그 순간 인간의 자유의지와 본능이 발현되는 새로운 창조가 일어날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는 소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을 통해 어떤 도덕적 규범도 초월하는 절대적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는 그러한 원작을 바탕으로 19세기 후반, 종교가 무너진 자리에 도덕 대신 피어난 쾌락주의와 악의 꽃으로 타락해가는 ‘도리안 그레이’의 생애를 처절하게 그려낸다.

19세기 말, 도덕에 대한 환멸과 욕망의 틈입

작품은 도리안 그레이의 타락 과정을 그리는 것 외에도 상당 부분 시대적 분위기를 전하는 데 할애한다. 귀족들이 모인 살롱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신이 없고’, ‘인간이 하늘을 날며’, ‘노예가 해방’되고, ‘여성이 참정권을 가지는’ 지금 인간이 못 할 것은 없어졌다고 말한다. 앨런 캠벨은 입버릇처럼 “늙고 추해지다 죄지으면 죽는 것”이라 말하며 한 번 뿐인 삶을 즐기라고 소리친다. 작품은 이처럼 도리안 그레이의 타락이 단순히 개인적 타락이 아닌 종교와 규범이 무너지고 쾌락주의에 빠져들던 시대적 타락임을 짐작케 한다.

도리안 그레이를 두고 대척점에 서서 설전을 벌이는 두 남자, 배질과 헨리는 각각 당대 유럽에 남아 있던 보수적 도덕주의와 새롭게 등장한 쾌락주의를 대변한다. 특히 헨리는 인간의 본성마저 실험대 위에 올려놓으며, 도덕을 초월한 쾌락의 추구야말로 완벽한 인간성을 완성할 것으로 믿는다. 헨리는 넘버 ‘찬란한 아름다움’을 통해 인간의 삶을 ‘알 수 없는 삶’, ‘모순의 삶’, ‘헛된 삶’, ‘오직 단 한 번의 삶’으로 규정한다. 이는 종교가 힘을 잃고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해 생겨난 세기말적 불안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대적 분위기만으로 1막에서 도리안이 헨리에게 동조하고 쾌락적 삶을 선택하게 되는 직접적인 개연성을 설명하는 데는 부족해 보인다. 1막에서 타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는 사건성이 부족하다 보니, 쾌락과 고통이라는 추상적 관념만이 떠돌아 인물들의 감정에 이입하기 어렵다. 다행히 2막에서 도리안의 타락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건들(간음, 마약, 살인 등)이 차례로 발발하면서 인물의 심리 변화에 공감하고 몰입도를 높일 수 있었다.

도리안 그레이, 시각적으로 창조해낸 ‘미(美)의 화신’

작품에서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진 청년 도리안은 모든 비극의 씨앗이 되는 중요한 요소다. 작품은 서정적인 쇼팽의 녹턴, 순백의 피아노와 역시 순백의 옷차림, 그리고 신비롭고 우아한 현대무용으로 미의 화신인 도리안을 형상화한다. 특히 도리안의 의상은 타락해 감과 함께 더욱 색감이 화려해지고 무절제한 형태로 바뀌는데 변질된 아름다움이라는 퇴폐미를 시각적으로 표현해 인상적이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김준수의 밀도 높은 연기다. 예전에 맡은 배역들이 죽음이나 어둠, 괴짜와 같은 특정한 성격을 극대화한 평면적 캐릭터였다면, 이번 도리안은 성격의 변화와 감정의 변화가 섬세하게 요구되는 입체적인 배역이다. 도리안 역을 맡은 김준수는 1막에서 쾌락을 알기 전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와 부드러운 음색으로 표현했다. 2막에서는 쾌락에 물든 악마적 아름다움을 유혹적인 목소리와 낮고 내지르는 듯한 강한 음색을 오가며 연기했다. 표정이나 자세, 말투나 동작에서 예전보다 훨씬 섬세해진 연기력을 느끼게 했다.

우아하고 서정적인, 마치 영화 같은 무대 연출

무엇보다 작품에서 새로운 시도로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매우 입체적으로 촬영된 고화질 영상을 전면에 활용한 감각적인 무대 연출이다. 극적인 장면에서 주로 활용된 영상들은 사건의 비극성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인물의 감정을 더욱 서정적으로 끌어올렸다. 특히, 도리안이 타락한 영혼을 깨달으며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은 오래된 성터에서 촬영한 역동적인 흑백영상(넘버 ‘또 다른 나’)으로 대체되며 눈길을 사로잡았다.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과거의 세 남자를 영상으로 반추하는 장면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서정성을 극대화했다. 

이지나 연출 특유의 심플하면서도 세련된 무대 연출은 철학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작품의 주제와 매우 잘 맞았다. 특히, 붉은색, 보라색, 흰색, 검은색 등의 단순하지만 강렬한 색채를 조명과 의상 등으로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추상적인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전달했고, 같은 조형물에 영상이나 조명을 미묘하게 바꾸는 것으로 계절감이나 분위기의 변화를 잘 표현했다.

아이돌 ‘김준수’를 내세운 나르시시즘의 형상화

“아름답다고 말해. 내가 아름답다고 말해.” 작품의 후반 도리안은 자신을 떠나려는 배질을 붙잡으며 찬사를 요구한다. 도리안 그레이가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빠져 죄악마저 용서했던 나르시시즘에 균열과 자각이 일어나는 장면이다. 이지나 연출이 김준수를 믿고 다양한 안무와 연출을 시도했다고 밝혔듯이, 거대 팬덤을 가진 아이돌 출신이라는 김준수의 정체성은 작품에도 중요한 영향을 주고 있다. 호불호가 갈릴 부분이지만, 아이돌을 전면에 내세워 나르시시즘을 형상화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탁월한 선택이다. 아름다움이란 결국 다른 사람의 찬미로부터 생명력을 얻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팬 서비스로 비칠 수도 있는, 무대 위에 과도하게 노출되는 도리안의 이미지들은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도리안 자신의 내면이자,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들의 끈질긴 욕망의 시선으로 읽힌다. 무대 위의 남자를 타락한 미의 화신 도리안으로 보든, 동경의 대상인 아이돌 김준수로 보든 무대 위에는 여전히 찬미의 대상이 남는다. 특히, 1막의 마지막 ‘Against Nature’는 마치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처럼 고난이도의 칼군무를 역동적으로 펼침으로써 아이돌로서의 김준수의 역량과 카리스마를 십분 활용한다.

오스카 와일드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표어를 내세우며 유미주의를 주창했다. 그야말로 예술의 자율성을 누구보다 사랑한 스타일리스트인 셈이다. 그의 원작 소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 가진 현학적이고도 상징적인 표현을 대중적 장르인 뮤지컬의 언어로 풀어내는 과정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과정에서 흔한 여타의 뮤지컬처럼 말초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포장으로 단순화하지 않고, 관념적이고 연극적인 대사를 그대로 남기고 밀도 높은 연기로 작품의 본질과 치열하게 마주하려 한 점이 인상적이다. 또한, 이로써 멀어질 수 있는 객석의 몰입도를 다시금 붙잡는 장치로 영상을 전면에 투사해 활용한 점도 파격적이고 흥미롭다. ‘도리안 그레이’는 분명 뮤지컬이지만 관객은 그 안에서 연극과, 뮤직비디오와, 영화적 감성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오스카 와일드가 말한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사진출처_씨제스컬쳐 

박세은 기자  newstage@hanmail.net

<저작권자 © 뉴스테이지,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박세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