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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 그들에게도 삶은 있다, 연극 ‘뉴욕 안티고네’

                    

 

공원벤치에 드러누워 보드카 생각만 간절한 ‘사샤’에게도, 인생 최고의 발작을 즐기는 ‘벼룩’에게도, 저주받은 캐시미어가 못내 마음에 걸리는 ‘아니타’에게도, 심지어 그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만 보는 관객에게도. 우리는 각자 자기만의 문제를 지니고 있고 그럼에도 힘을 내 살아가고 있다.

출중한 연출과 뛰어난 연기로 입소문이 대단한 극단 백수광부의 연극 ‘뉴욕 안티고네’. 장장 2시간 20분의 긴 호흡에도 불구하고 극은 초지일관 설득력 있고 흥미진진하게 이어졌다. 뉴욕의 노숙자들을 보며 이내 서울역의 노숙자들을 떠올려본다. 추위가 올 때쯤 자신의 온전치 못한 몸 하나 뉠 곳을 찾아 박스를 뒤집어쓰는 ‘사샤’처럼, 그들만의 조직 속에서도 불신과 극도의 경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벼룩’처럼 과거 우리의 그곳, 서울역의 많은 노숙자들은 자기들만의 세상을 살아왔으리라.

멜팅 팟(meltingpot)이라고 흔히 불리는 미국, 그 중에서도 맨해튼은 집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한데 모여 아옹다옹 살아가는 ‘인종의 도가니’인 셈이다. 한때 러시아의 유망한 교수였던 지식인 대표 ‘사샤’, 폴란드출신의 간악한 사기꾼 대표 ‘벼룩’, 푸에르토리코출신의 순수한 마음을 지닌 비정상인 대표 ‘아니타’. 그들의 삶은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비록 지붕 없이 살며 이 겨울을 날 수 있을지 확신조차 없는 그들이지만, 이름만 아는 노숙자 ‘존’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고 싶어 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까끌까끌한 모래 같지만 사실은 마음 따뜻한 ‘사샤’와 어수룩해 보이지만 사실은 무서운 ‘벼룩’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상이다.

덜그럭거리는 쇼핑카트를 끌고 다니는 ‘아니타’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집시풍의 여인이다. ‘푸에르토리코’라는 이름조차 낯선 곳에서 온 그녀의 전 재산은 19달러 50센트와 헌 스키부츠. 그것은 자신을 유일하게 사랑해준 ‘존’을 향한 마지막 성의였다. 정체모를 남자 ‘존’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은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정신이 나가 헛소리를 지껄이고 이상한 주문을 외는 미친 여자이지만 순수한 사랑에 설렘을 가지는 그녀는 그저 ‘여자’였다.

‘존’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 있으랴. 수많은 이방인 노숙자들 가운데 ‘존’으로 착각해 데려온 시체의 등장은 엽기적이다. 시퍼렇게 변한 몸, 허옇게 드러난 흰자위, 오싹하기 그지없는 시체 그 자체인 ‘가짜 존’은 상처받은 ‘아니타’의 장례의식을 통해 ‘진짜 존’으로 존재를 부여받는다. 마음만 의지할 수 있다면, 자신을 사랑해준다면 그의 존재가 누구든 상관은 없다. 극중에서 ‘아니타’는 극도로 외롭고 소외된 자들만이 느끼는 마음의 공허함을 보여준다. ‘벼룩’의 계략으로 그녀의 희망이 또 한 번 무너지는 순간, 그 절망의 앞에서 우리는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다.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극 중간 중간 등장해 관객을 바르게 맞이하는 ‘뉴욕 경찰’은 상당히 거북스러운 존재다. 자신이 굉장한 ‘인간환경 미화원’이라도 되는 듯, 껄껄껄 허세를 부리며 손사래 치는 그에게서는 매캐한 거드름 냄새가 풍겨진다. 지독하게 이 사람이 싫어진다. 그만큼 배우들의 연기가 매우 출중하다. 이미 관객은 배우를 그가 맡은 배역 자체로 인식하고 호감형과 비호감형을 구분한다.

또 빠른 무대 소품 전환이 깔끔하다. 한정된 공간 속에서 짧은 암전의 기회를 틈타 전혀 다른 분위기의 공간을 연출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관객에게 암전의 지루함을 느낄 틈조차 주지 않는다. 게다가 음악은 서정적이며 이국적 향취를 자극한다. 낡은 녹음기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러시아 미술가 보쉬의 작품인 ‘음악적 지옥’의 등장은 수면 위에 떠오르지 않으면서 잔잔한 여운을 주는 장치이다. 장소는 한 곳뿐이되, 정서는 각각이다.

소포클레스의 희곡 ‘안티고네’에서 온갖 착취와 권력의 우위를 선점한 ‘크레온’을 대변하는 뉴욕경찰과, 그 권력에 힘없이 주저앉아 버리는 ‘안티고네’를 대변하는 노숙자들의 결말은 씁쓸하기만 하다. 원작의 배경 테베에서 그러했듯, 우리의 안티고네 ‘아니타’는 공원 바리케이트를 생의 마지막 정점으로 선택하고 만다. 강제노동, KJB의 고문소리, 지독한 가난을 피해 찾아왔던 유토피아 ‘뉴욕’의 거리는 인권을 보장하는 경찰들로 인해 처참히 무너지는 허상에 불과했다. 그들에게도 삶은 있다. 그러나 ‘행복한 삶’은 없다는 것인가.


홍애령 객원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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