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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 연극 ‘그남자 그여자’

 

달달한 벚꽃빛. 이 연극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을 때의 이미지다. ‘서로 다른 언어로 사랑을 말하다.’라는 홍보문구에, 꽃망울처럼 울음이라도 톡 터뜨릴 것 같은 뒷모습을 담은 포스터를 보며 지금까지 보아왔던 수많은 로맨틱 공연들이 떠올랐다. 경험상 포스터 속 연인이 1시간 반쯤 뒤에는 손을 꼭 잡고 있을 것이라는 결말마저 예측 가능했다. ‘식상하긴 한데 에이 뭐, 머리 좀 식히고 편하게 한번 볼까’하는 마음으로 소극장 문을 열었다.

유치한 대본. 그러나 ‘사랑’이기에 용서하노라.
웬걸. 핫 핑크다. 뻔하고 유치해서 닭살이 돋는 꽃무늬 핫 핑크. 벚꽃 빛의 단아한 고상함은 없고 웃기고 가볍다. 요즘 애들답게 상큼한 연애를 하는 ‘영민’과 ‘지원’ 커플, 서투르나 진중한 ‘영훈’, ‘선애’ 커플의 이야기. 전자의 젊은 커플은 ‘지원’의 첫사랑인 복학생 선배로 인한 오해로 헤어질 뻔하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화해한다. 후자의 사내커플은 결혼 시기에 대한 의견 차이와 성격차이로 아옹다옹하다 ‘선애’의 미국 지사 근무 신청을 계기로 결혼에 성공한다. 시작도 결말도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들. 지갑을 잃어버리고 찾아주며 친구가 되는 과정이나, 사랑을 의심하며 남자친구가 군대를 간다는 스토리는 식상하다. 또 커피를 숭늉처럼 마시는 남자가 싫다고 말하는 ‘선애’의 소녀 같은 발언은 공감을 얻기조차 힘들다. 아버지의 위독함같이 이제는 양보해도 될법한 상황에도 결혼에 대한 견해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영훈’의 모습은 개연성의 부족을 의심케 한다. 그래도 이 연극, 어떻게 될지 뻔히 아는데 끝까지 보고 싶긴 하다. 어쨌든 관객들도 열심히 박수를 친다. ‘사랑은 인간생활의 최후의 진리이며 최후의 본질’이라고 했던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부터, 최근 인기인 로맨틱 코메디 뮤지컬까지 ‘사랑’이라는 소재는 그 자체로 관객들에게 톡톡히 다져진 신뢰가 있다. ‘그남자 그여자’ 역시 헬륨풍선같은 가벼운 내용을 인간의 본능이라는 토큰으로 묶어 날아가지 않게 한 작품이다.

캐릭터로 웃음을 채색하다.
이 연극은 웃기다. 스토리 자체는 가볍지만 잘 짜인 캐릭터와, 배우들의 성실한 캐릭터 구축은 웃음을 불러온다. ‘지원’과 ‘선애’의 이중적인 연기는 꾀나 능청스러워 그것 자체로도 장관이다. 트레이닝 차림에 침 질질 흘리다 전화를 받고, 이빨을 열심히 쑤시거나, 머리 안 감았다고 향수를 뿌리고 온다. 이런 행동들은 마냥 예쁘고 귀여워서 밋밋해지기 좋은 여자 캐릭터에 생기를 부여한다. 두 남자 배우도 쪼잔하거나 무력하고 수줍은 모습을 잘 표현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캐릭터는 ‘멀티맨’이다. 이 배우는 폭넓게 변신할 수 있는 자신의 기량을 잘 발휘한다. 회사 상사와 식당의 욕쟁이 할머니, 패밀리 레스토랑의 소심한 서버, ‘선애’의 수다스러운 여자 친구를 모두 넘나드는 이 배우는 등장할 때마다 독특한 행동의 반복으로 기필코 한번은 웃음을 터뜨리고 간다. 이처럼 캐릭터들에 의해 극에 색깔이 입혀졌다. 어렵게 머리 쓰지 않고 그저 웃으러 나들이 나온 관객들에게 선물하는 풍선이 드디어 화려하게 장식된 것이다.

연극은 관객들� 배우들의 약속. 이 공간은 바로 ‘극장’이니.
그러나 이 작품의 경쟁력은 따로 있다. 공연 여기저기에서 보이는 연극적 장치는 이 극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준다. 세트 변화 한 번 없는 무대에서 회사, 공원, 레스토랑 등 배경을 전환시키기 위해 부분 조명을 적절히 사용했다. 또 자기만의 속마음을 말하기 위해 배우들은 방백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데, 이 때 다른 배우들은 정지된 채 뒤에서 밝은 조명이 역광으로 쏟아진다. 혼자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고백하는 느낌이 잘 살아 있어 집중력을 높인다. 전화하는 장면에서 두 남녀가 옆으로 나란히 앉아 이야기 하는 모습은 한 컷의 따뜻한 이미지로 각인될 만하다. 게다가 한 배우가 벽의 일부와 고무장갑 낀 손을 사용하여 두 사람을 연기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이렇게 흉내 내기를 진짜로 받아들이고, 있는 걸 없다고 암묵적으로 인식하는 ‘연극의 약속’이란 참 재미있다. 때로는 실제로 만들어 놓은 것보다 더하다. 이 연극은 소자본 공연이라면 이 약속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함을 잘 알고 있다. 내용을 조금 더 참신하고 개연성 있게 정리한다면 장기공연 신화에 부끄럽지 않은 공연으로 빚어질 것이다.


백수향 객원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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