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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노래한다, 무용 ‘올리브(all live)나무’

                   

 

‘라쿠카라차 라쿠카라차 달이 떠올라 오면/ 라쿠카라차 라쿠카라차 그립다 그 얼굴’ 이 노래를 기억하는가? 유년 시절, 한 마을의 평화롭고 아름다운 이야기인줄만 알았던 이 노래가 혼란과 고통, 절망의 노래가 되어 우리의 귓가를 파고든다.

사실 ‘라쿠카라차’는 1910년 멕시코 혁명 때, 독재 정부에 대항하여 총을 들 수밖에 없었던 멕시코 농민들의 투쟁과 희생의 한(恨)을 담은 노래이다. ‘라쿠카라차’는 스페인어� ‘바퀴벌레’라는 뜻이다. 이 노래는 힘의 논리에 지배당한 멕시코 농민들이 가진 것을 모두 잃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들의 현실을 ‘바퀴벌레’에 비유하며 죽어갔던 그들의 뜨거운 외침이다.

트러스트 무용단의 ‘올리브나무’는 성서의 ‘십계’를 주제로 한 ‘춤으로 다시 보는 십계’ 연작의 3번째 작품이다. 연작의 마지막 편인 ‘올리브나무’는 본래의 표기와는 달리 ‘모두 함께 산다’라는 의미의 ‘all live’로 표기함으로써 주제를 형상화했다. 또한 이 작품은 ‘네 이웃의 소유를 탐하지 말라’의 계명이 오늘날에 전하는 진실에 관한 해석을 담고 있다.

- 철창안에 갇힌 고통과 절망의 노래
‘올리브나무’의 모든 공연은 철창에서 시작되어 철창으로 끝난다. 공연의 첫 시작부터 무용수들은 철창 안에서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인간의 형상을 보여준다. 철창에 갇힌 그들의 얼굴은 온통 두려움에 휩싸여있다. 이러한 모습은 관객들로 하여금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해준다. 죄를 저지른 채 철창 속에 갇혀 절망에 빠진 죄수의 모습 같기도 하고 정신병원에 갇힌 정신병자들 같기도 하다. 때론 문명의 희생양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인간의 이기심이 저지른 전쟁의 피해자 같기도 하다.

- 괴물같은 인형, 뚱뚱한 여인, 어린 소녀, 그들은 바로 우리의 모습
극의 프롤로그에 등장했던 괴물 같은 인형이 후반부에 또 등장한다. 여자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보기만 해도 혐오스러운 모습이다. 인형은 식탁에서 쓰레기 같은 음식들을 주워 먹기도 하고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기도 한다. 하지만 그 흉물스러운 인형의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극의 후반부에 달할수록 우리는 끔찍스러운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된다. 괴물 같은 인형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말이다. 정말 괴물스럽고 정말 무서운 것은, 문명의 이기심과 각박한 현대 사회 속에서 인간적인 정과 따뜻함을 잊어버린 지극히 이기적인 우리들의 모습이다.

‘올리브나무’는 현대무용은 난해하고 어려울 것이라는 편견을 깨트린다. 거기에는 극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뚱뚱한 여인’이 일조하는 바가 크다. ‘뚱뚱한 여인’은 터질 듯한 몸집을 더 부각시키듯 딱 붙은 옷을 입고 공연장 여기저기를 누빈다. 그녀는 코믹스런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웃긴 춤을 추기도 한다. 또 공연장 한 구석에서 괴물같은 인형과 함께 고무장갑 따위의 쓰레기를 입 속에 넣기도 한다. 과연 ‘뚱뚱한 여인’의 존재적 의미는 무엇일까? 물질만능주의 혹은 외모지상주의에 찌든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의미는 아닐까? ‘뚱뚱한 여인’이 나오면 관객들은 먼저 웃음을 터뜨린다. ‘뚱뚱한 여인’의 과도한 몸짓과 그의 혐오스러운 몸집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실소를 터뜨리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그 웃음은 비웃음이 섞여있는 실소이다. 아니 조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관객들은 어느 순간 불현듯 깨닫게 된다. 그녀의 조금은 안타까운 몸짓들이 전혀 우리와 상관없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뚱뚱한 여인’의 비대한 몸집과 과도한 몸짓은 곧 허영과 이기심에 휩싸여있는 현대인들의 초상이다.

‘올리브나무’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어린 소녀’는 내내 무대를 뛰어다닌다. 불안한 발걸음으로 빠르게 그리고 조금의 떨림을 안고 연신 끙끙거리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소녀를 받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오히려 소녀를 윽박지르고 소녀의 자유를 탈취한다. 그리고는 저마다 쓰러진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고통의 몸부림 속에서 절망해간다.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괴로워해도 일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은 모두가 죽어간다. 저마다 고요하게, 절망의 그림자들을 남기고 말이다.

- 우리들의 일그러진 현대인의 초상
현대의 초상이란 어떠한가? 너무나도 차가운 모습이다. 모든 게 편리화 되는 시대에 인간다운 그야말로 사람다운 모습은 없어진지 오래이다. 저마다 자기 자신과 관련되지 않은 일에는 무관심하다. 세상에 오직 자기 자신만이 존재하는 듯, 사람들의 눈은 서로를 쳐다보지 않는다. 더 이상 그들은 주변을 돌아보지 못한 채 자기 자신만 보이도록 고정되어 있는 이기적인 안경을 쓰고 산다. 언제 자신에게 씌어졌는지도 모른 채,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안경을 쓴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물질은 점점 풍요로워지고 세상을 점점 살기 좋아진다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가진 자에 한한 것이다. ‘all live’, 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는 어디로 갔는가! 과연 이 시대에 ‘함께’산다는 의미가 존재하기는 한 것인가? 극의 후반부에 달할수록 관객들의 얼굴은 점차 고통에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무용수들의 고통의 몸부림 속에 관객들의 마음에도 불안의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한다. ‘라쿠카라차’를 부르는 소녀의 목소리가 떨린다. 우리의 마음도 그에 따라 점차 사그라진다.

-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노래한다!
하지만 무용수들은 극의 후반부에 다시 ‘라 쿠카라차’를 노래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승리의 하얀 깃발을 높이 들고 출정하는 병사들처럼 당당하고 신나는 발걸음으로 공연장을 누빈다. ‘희망’의 노래가 여기저기 울려 퍼지는 순간이다. 결국 ‘사람’이다. 절망도 사람이고, 희망도 사람이다. 우리를 쓰러뜨리게 하는 것도 사람이요, 우리를 일어나게 하는 것도 사람이다. ‘라 쿠카라차’를 부르며 한껏 웃음을 짓는 무용수들처럼 우리 모두가 서로를 잡은 손을 놓지 않고 함께 나아간다면 차가운 현대 사회 속에 뜨거운 불길이 용솟음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all live', 함께 산다면 말이다. 자, 함께 ‘라쿠카라차’를 부르자.

‘병정들이 전진한다 이 마을 저 마을 지나 / 소꿉놀이 어린이들 뛰어와서 쳐다보며 / 싱글벙글 웃는 얼굴 병정들도 싱글벙글 / 빨래터의 아낙네도 우물가의 처녀도 / 라쿠카라차 라쿠카라차 아름다운 그 얼굴 / 라쿠카라차 라쿠카라차 희한하다 그 모습 / 라쿠카라차 라쿠카라차 달이 떠올라 오면 / 라쿠카라차 라쿠카라차 그립다 그 얼굴’

이종미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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