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리허설 장면_(주)악어컴퍼니 제공

미워한다는 건, 사랑받고 싶다는 말이다.

얼마 전 파리에서 일어난 최악의 테러로 유럽 뿐 만 아니라 전 세계가 들썩인다. 이 때문에 유럽 각국의 대표들은 연쇄적으로 일어날 테러의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 테러의 원인을 밝히고자 혈안이 된 요즘이다. 테러의 중심에 선 IS에 대한 응징, 소탕, 그들의 행보와 역사를 분석하는 일이 이 사건을 해결하는 방안이라 믿으며 유럽은 지금 굉장히 초조하다.

타인에 대한 혐오, 그리고 테러

몇 달 전 한국의 19살 소년 김군이 시리아에 밀입국한 일을 두고 우리나라에서도 IS에 대한 인지도가 생겼고, 김군의 행태를 모방하는 이들이 생겨날 것을 대비한 우려를 했던 것도 사실이다. 통상적인 사고의 회로를 가지지 않은 소수의 개인에 의해 나라 전체가 테러의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면서 정부가 IS에 관심 갖는 이들에 대한 소탕 작전까지 벌여야 한다는 여론도 나왔었다. 하지만 이념이나 사고의 충돌로 인해 대두된 저항 단체가 일으키는 범죄는 실제적인 물자지원이나 영토의 획득 등의 경제적 이익보다는 그들의 뇌리 깊은 곳에 깃든 증오를 해소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경우가 많아 그 양상이 날로 잔인해져 간다.

단적인 사례로 파리에서 일어난 무차별 테러의 과정과 김군이 IS에 가입하게 된 계기만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국적과 종교를 묻고, 대답을 듣고 나서 자신들과 대립하는 국적과 이념을 가진 이들은 모두 사살해버렸다. 소속집단과 다른 사고를 가진 이들을 전부 ‘혐오적 타인’으로 간주한데서 나온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소극적인 소년이었던 김군의 경우도 비슷한 양상을 읽어낼 수 있다. 어린 시절 동안 김군에게 가해진 여성들의 무관심은 김군이 여성을 혐오하게 된 결정적이 계기가 되었고, 이는 세상에 대한 혐오로 번져 자신의 존재감을 어떻게든 피력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만큼의 증오가 쌓이게 된 것이 김군의 IS 가입 동기이기 때문이다.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리허설 장면_(주)악어컴퍼니 제공

인류가 공생하기 위한 최대의 발명품, 사랑

좁고 어두운 방 안에 언제부터 놓여있었는지 세월조차 가늠하기 어렵게 만드는 누더기 같은 이불을 덮고 매일 같은 시간에 잠을 청하는 저항 청년 ‘발렌틴’ 역시 김군과 다를 바 없는 인물이다. 정치범으로 잡혀 들어온 ‘발렌틴’은 외부의 빛이라곤 한 줄기도 없는 갑갑한 감옥에서 조차 자신의 이념이 다른 사상과 만나 희석될 것을 두려워하며 스스로를 다그친다. 하지만 ‘발렌틴’은 이념도, 국적도 잊게 하는 흥미진진한 영화이야기를 해서 사람의 혼을 빼놓는 룸메이트 ‘몰리나’를 통해 진짜 ‘자기감정’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상부에서 자신에게 약을 먹여 정신이 혼미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약조차 먹지 않는 단호한 ‘발렌틴’은 ‘몰리나’가 보여주는 진솔함에 빠져든 것이다.

‘몰리나’는 성문란 죄로 수감된 게이 남성이지만 완벽한 남자와의 완벽한 삶을 꿈꾸는 ‘보통 여자’의 삶을 원한다. 겉으로 보면 단정적인 성향의 ‘발렌틴’과 여성적인 성향의 ‘몰리나’가 서로에게 끌리게 되는 것은 당연한 양상일지 모른다. 게다가 결국 ‘발렌틴’과 ‘몰리나’는 육체적 사랑을 통해 절대 고독에 의해 절제되었던 욕망을 해소하였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그렇고 그런 동성애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을 소지가 많다. 하지만 이 둘이 나눈 것이 정말 성욕에 눈이 먼 두 남자의 육체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까?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리허설 장면_(주)악어컴퍼니 제공

서로를 바꾸려 하지 마라, 닮아가는게 사랑이니까

연극을 통해 관객 앞에 나타난 ‘발렌틴’과 ‘몰리나’의 사랑은 소설에서보다 흥미진진하지는 못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인물과 특별한 동선이나 변화 없이 극을 진행해가야 하는 연출이 주는 지루함을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 원작에 충실한 이 연극이 해야만 했던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본다. 게다가 이러한 기복 없는 연출은 원작이 가진 담담함에 숨겨진 두 남자의 심리 변화와 위태로움을 소설보다 섬세하게 드러내는데 충분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발렌틴’의 경우 남성적이고 의지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인물로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몰리나’가 떠난다는 말을 듣고 나서는 사랑의 감성 휩싸여 판단력이 흐려진 여린 여성의 정서를 그대로 드러내듯 사춘기 소년처럼 떼를 쓴다. 반면에 머리에 두건을 쓴다던지, ‘발렌틴’에게 요리를 해준다던지, 여성적인 말투와 태도를 보여주며 여성성을 강조하는 인물로 일관되었던 ‘몰리나’는 정치범인 ‘발렌틴’의 행적을 알아내라는 상부의 지령 사이에서 ‘발렌틴’을 보호하려고 스스로의 감정을 철저히 숨기는 단호한 태도를 보인다. 이런 모습은 ‘발렌틴’보다도 남성적인 모습이다.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리허설 장면_(주)악어컴퍼니 제공

관찰형 힐링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여느 관객들은 ‘발렌틴’과 ‘몰리나’가 폐쇄된 공간에서 계속 같은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나누나가 끝나버린 지루한 작품이라 평할 수도 있겠다. 인물의 정서를 대변하는 장치로 쓰인 것은 시간의 흐름과 이야기의 호흡을 끊거나 연결하기 위해 쓰인 조명이 전부이고 이외의 스펙터클은 없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두 남자의 일상 속에서 둘이 서로를 이해하며 변화하는 모습을 읽어내게 될 때 관객은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에 대해 감정이입하게 된다.

이 작품은 상처받은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반복 학습시키는 거창한 힐링 드라마가 아니다. 그러나 서로를 이해하며 스스로 변화를 겪는 두 남자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타인을 배척이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인지하는 색다른 ‘힐링’을 경험하게 하는 작품이다. 그러므로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는 세상을 혐오하고 세상에게 버려졌다고 생각되는 이들에게 한번쯤 ‘경험’해보시라 권하고 싶은 작품이다.

나여랑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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