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오페라 발레단에 버금가는 오랜 전통을 지닌 덴마크 왕립발레단 (Royal Danish Ballet)에는 1829년부터 1877년까지 예술감독을 지내며 러시아의 <백조의 호수>나 <후두까기 인형> 보다 앞선 명작 <라 실피드>와 <나폴리>등을 안무한 오귀스트 부르농빌(August Bournonville 1805~1879)이 있었다. 수 많은 버전을 가지고 있는 <백조의 호수>,<잠자는 숲속의 미녀>등과 달리 부르농빌의 작품은 17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 치의 변형 없이 원전 그대로 공연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무보, 영상녹화 등의 방법이 있지만 무엇보다 작품을 재연하는 가장 완전한 방법은 사람의 ‘몸’과 ‘기억’이다. 21세기가 된 지금 대를 이어 부르농빌의 작품을 재연하고 있는 무용가 아니 전수자는 누구일까? 그는  1971년 덴마크 왕립 발레단에 입단한 프랭크 앤더슨이(Frank Andersen) 이다. 덴마크 왕립 발레단의 프린시펄로 구성된 ‘부르농빌 그룹’의 원년 멤버인 그는 무용수 은퇴 후 덴마크 왕립 발레단에서 예술감독으로 활동하며 유럽 전역은 물론 러시아, 중국, 일본 등 여러 발레단에서 ‘걸어다니는 무보’라고 할 정도로 부르농빌의 안무를 완벽하게 재연하고 있다. 

2008년 서울국제무용콩클을 심사하기위해 내한한 그를 만나기 위해 필자는 23년간 간직하고 있던 <나폴리> 한국공연의 팜플렛을 찾아내었다. 팜플랫을 보고 적잖게 놀란 그는 ‘부르농빌 그룹’의 순회공연 마지막 해에 방문한 곳이 한국이었다며 잠시 감회에 젖는다. 덴마크 내에서 그의 지위와 경력은 한국에서라면 무형문화재로 지정 받았을 법하지만, 좀 더 많은 곳에 부르농빌의 작품을 전하고 싶다며 1개월 전 프리랜서를 선언한 그는 단출한 여행가방 만큼이나 캐주얼하고 소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작품에 임할 때만큼은 누구보다 완고하고 엄격한 무용가라는 필자는 알고 있다.

(다음 글은 월간 춤과 사람들 2008년 5월호에 실린 글의 일부이다.)

1985년 한국 공연에서 뵌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나폴리>에 출연 하셨죠?
- 예 1976년부터 1985년 까지 ‘로열 데니쉬의 주역그룹(Soloists of the Royal Danish Ballet)’을 결성해서 25명의 무용수들이 세계 투어를 했었는데 마지막 해에는 한국도 방문했었죠. 오래전 일을 기억하는 분을 만나니 반갑습니다. 사실 첫 한국 방문은 1982년 동아일보사의 초청으로 60여명의 단원 전체가 유니버설 아트센터에서 공연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계속 한국 발레와 인연이 있으셨죠?
- 1995년 광주 발레콩클에 심사위원으로 초청되었고, 서울국제무용콩클이 시작되던 2004에도 심사를 위해 한국을 방문 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서울국제무용콩클의 심사를 위해 4년 만에 다시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어요. 특별히 이번 파이널 심사에서 부르농빌의 작품을 만나게 되어서 기뻤습니다.

한국의 무용수에 대한 인상은 어땠나요?
- 일일이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많은 무용수들을 보았습니다. 1995년부터 광주를 두 차례 방문하며 그들의 발전을 가까이에서 보았고, 서울 국제콩클의 첫해와 올해를 비교해 보아도 많은 발전을 했다는 것을 느낍니다. 한국무용수들의 발전을 보게 되니 기쁩니다. 제가 몸담았던 로열 데니쉬 발레단이 260년 되었다는 점을 보면 한국에서 발레라는 것은 분명 생소한 예술이었을 텐데 짧은 역사 속에서 놀라운 발전을 했다고 봅니다.

그러한 발전의 원인을 무엇으로 보시나요?
- 13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와 비교해서 많은 발레단이 생겼더군요. 예술을 향한 투자와 헌신이 많아졌다는 증거입니다. 한국 정부가 예술 분야에 많은 투자를 한 것 같은데 그 것은 정부의 결정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발레에 대한 열정을 가진 실무자들의 노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제가 본 사람들 가운데 김혜식, 허영일, 문훈숙 씨가 열정적으로 일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젊은 무용수들에게 조언을 하신다면?
- 오늘날 세계는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바빠졌고 인터넷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빨라졌습니다. 고난도의 발레테크닉을 보고 싶다면 극장을 찾을 필요 없이 인터넷을 뒤지면 되는 세상이 되었어요. 발레가 매력적인 예술로 남아있으려면 누레예프나 바리시이코프가 춤추었던 70-80년대처럼 무용수가 감동을 주는 무대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이제는 관객과의 상호작용도 빨라져야 하기 때문에 자신만의 개성과 열정이 없는 무용수는 관객들이 금방 알아차리고 외면하게 됩니다. 이는 나아가 발레가 미래에 예술에서 큰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 살아남지 못할 것인지 까지도 좌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덴마크태생 이죠? 처음 어떻게 발레를 시작하셨나요?
-덴마크에서 태어났고 무용수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발레를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1946년 에릭 브룸의 데뷔 무대에 파트너로 섰던 분입니다. 1960년, 6살 때 로열 데니쉬 발레스쿨의 오디션을 통해 입학했고 1977년 주역무용수가 되었습니다. 1985년부터 예술감독이 되어 10년간 발레단을 이끌었습니다. 무용수와 스텝 등 150여명의 인원을 이끈 다는 것은 큰일이지요. 1995년부터 5년간 스웨덴 왕립발레단에 있었고 2002년 나의 고향 같은 로열 데니쉬 발레단으로 돌아와 다시 예술감독을 맡았다가 지난달 그만두었습니다. 이제는 프리랜서 안무가이자 그 누구 보다 부르농빌의 작품을 정확히 재연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31살 젊은 나이에 왕실발레단을 이끌었다니 놀랍군요.
- 글쎄요. 드문 일이기도 하지만 부르농빌은 25살에 왕실발레를 안무했으니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어요. 31살이 젊은 나이이긴 했지만 제가 워낙 많은 레퍼토리를 알고 있었고, 이미 22살부터 제 이름의 발레단을 만들어 순회공연을 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별문제는 없었습니다. 다만 예술감독이 될 당시 워낙 부르농빌의 작품에서 춤추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2년간 무용수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 병행했던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무용수와 예술감독 중 어느 것이 최종 목표였나요?
- 원래는 무용수가 꿈이었어요. 내 이름을 건 무용단을 만들어보니 예술적으로 지휘를 하는 것에 매력을 느꼈고 무용수로 한참 활동하던 시기에 스스로 로열 데니쉬 발레단 감독직에 지원 했습니다. 다행이 당시 예술감독이던 토리 랜더가 나를 인정해주었어요. 그 후로 서서히 무용수 프랭크 앤더슨은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꿈을 이뤘다거나 성공했다는 생각 보다 제가 가장 좋아하고 가장 중요한 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발레단을 위한 이상적인 예술감독은 어떤 사람일까요?
- 감독직을 맡은 사람은 야망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그가 맡고 있는 동안 발레단이 한걸음이라도 발전해야하고 변화되어야 한다는 생각 말입니다. 무용수들에게 예술적 기회와 도전, 발전을 위해 많은 것을 제시해야 합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행복한 무용수들이 춤을 잘 춥니다. 무용수들이 때로는 지치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이 예술감독이라고 생각해요.

당신이 생각하는 August Bournonville 안무의 특징은 무엇 입니까?
-브루농빌의 대표작 <라 실피드>나 <나폴리> 같은 작품들은 역사적으로 프티파의 <백조의 호수>나 <잠자는 숲속의 공주>보다 앞선 150-170년 전 작품들입니다. 데니쉬 발레단에서만 800회가 넘게 공연되고 있는데, 이렇게 반복적으로 공연되는 작품이 없던 시절 고정 레퍼토리의 개념을 확립시킨 것이죠. 내용적으로는 공주, 왕자, 마법 같은 판타지적 러시아 발레와 달리 인간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안무했어요. 인위적인 것 보다는 관객과 가깝게 소통하기를 의도했다고 봅니다.

춤동작에는 어떤 특징이 있나요?
- 우선 스텝이 무척 어렵다고 할 수 있어요. 그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냈는데 팔을 고정시킨 채로 정교하고 어려운 발동작을 반복하는 것이 특징이죠. 여기서 괄목할 점은 다른 안무가의 작품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버전이 생겨난데 반해 부르농빌의 작품은 1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확한 순서가 고집된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요령을 부릴 수 없이 고전 그대로를 추어야 하기 때문에 부르농빌의 작품이 콩클에 나오면 정확한 평가를 할 수 있어요. 마임에 있어서는 과장되지 않고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과장은 진실 되지 못하기 때문에 관객에게 신뢰를 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 입니다. 이 모든 특징들 때문에 다른 발레단에게 부르농빌의 작품을 전할 때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한국에서는 바가노바 방식이 발레의 정답처럼 인식됩니다. 다른 나라는 어떤가요?
- 교육의 기반이 춤의 차이를 가져온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 때문에 세계적으로 다양한 스타일의 발레가 존재하고 있지만 정답은 없습니다. 러시아는 여전히 바가노바의 교육을 기초로 하고 있고, 러시아 출신 교사들을 영입한 여러 나라에서도 바가노바 교육을 통해 무용수들을 양성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판도는 좀 다르다고 봅니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죠. 몇 년 전 러시아의 스타니 슬랍스키(Stanislavskii)극장에서 <나폴리>를 안무했었는데 바가노바 스타일을 고집할 줄 알았던 무용수들이 새로운 스타일을 받아들이는데 갈급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러시아에서 조차 발레의 발생지, 본고장, 원조를 따지기보다 다양한 스타일을 존중하고 경험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더군요. 또 다른 예로 과거에 바가노바를 고집하던 중국 발레는 이미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문호 개방 이후 견문을 넓히며 여러 스타일을 영입하여 크게 변했더군요.

세계적인 춤의 추세를 어떻게 읽고 있나요?
-유럽을 중심으로 보면 1990년대에는 오페라가 상승세를 탄 반면 무용은 저조했어요. 그러나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무용이 다시 상승세를 타고 있다고 봅니다. 물론 상업적이고 자극적인 공연들과 발레 같은 순수한 춤이 함께 가고 있다는 점은 90년대와 좀 다른 점이죠. 미래를 예측하자면 현대적인 각색이나 쇼킹한 무대미술로 90년대 오페라가 인기를 끌었지만 현재 관객들이 다시 원작 그대로의 무대를 향수하듯, 무용도 다시 순수한 춤을 갈망하는 관객들이 많아지리라고 생각 합니다.

특별히 한국방문에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 한국 발레가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으며 상상이상으로 유명해져 있다는 것에 한국정부 특히 문화부에 축하의 메시지를 남기고 싶습니다. 지금의 한국 발레가 있기까지 해왔던 모든 일들에 대해 자부심을 갖길 바랍니다. 충분한 지원은 아니었을지라도 문화정책이 무용수들을 고무시키고 신뢰했기 때문에 한국발레가 이만큼 발전한 것입니다. 이 모든 지원은 장기적으로 지속되어야 하며 더욱 폭넓게 증가되길 바랍니다. 덧붙이자면 법률 또한 예술을 위해 변화되어야 하며 그것이  문화선진국으로 가는데 필요한  필수 과정이라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 저는 춤을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본인이 사랑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축복이고 나아가 어떤 특권을 누린다고까지 생각됩니다. 이 직업에 평생을 바쳤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현재 덴마크와 중국의 무용위원회에 소속되어있고 미국도 계획 중인데 앞으로 최대한 많은 나라와 인연을 맺고 싶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을 만나서 의견을 나누고 지원하는일은 춤이라는 공통언어로 나누는 매력적인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소망이 있다면 가족을 위한 것인데 아내와 아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모든 분들께 드리는 질문입니다. 춤이란 당신에게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 철학적으로 거창한 말보다는 솔직한 마음 그대로를 말하고 싶습니다. 춤은 내 인생 전부입니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복잡하고 심각한 얘기들이 많아서 일일이 말하기 힘들지만, 크게 보면 춤은 한마디로 인생 그 자체입니다.

글_김예림 무용평론가 yelim1108@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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