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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죽음 같은 사랑,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섬세한 영상미로 되살아난 대 문호 톨스토이의 명작

눈보라치는 러시아의 기차역.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황홀경에 빠진 안나는 눈을 맞으며 “피할 수 없고 도망칠 수도 없는” 운명을 노래한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평범한 귀족 여인의 삶을 한 번에 뒤바꿀 가혹한 이 운명에 대한 원망이나 두려움은 없다. 눈 장난을 하며 상기된 그녀의 표정은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열정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사랑을 모른 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던 안나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 처음으로 오롯이 자신의 행복을 꿈꾸는 기쁨을 맛본다. 잃어버린 나와 자신의 행복을 찾아 스스로 견고한 규칙과 위선의 틀로부터 탈출을 시도했던 안나 카레니나. 엄격한 러시아 귀족 사회에서 파란과도 같았던 그녀의 파격적인 사랑 이야기가 당대 러시아의 아름다운 도시와 농촌 곳곳을 배경으로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톨스토이의 역작, 섬세한 영상미로 다시 태어나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는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의 역작인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러시아 프로덕션 ‘모스크바 오페레타 씨어터’에 의해 2016년 뮤지컬로 재탄생된 공연이다. 러시아 공연계를 이끄는 작곡가 ‘로만 이그나티예프’와 연출가 ‘알리나 체비크’가 의기투합해 러시아뿐만 아니라 유럽 공연계에서도 주목을 받았고, 국내에서는 지난 2018년 첫 라이선스 공연으로 무대에 올랐다.

무대에서 단연코 인상적인 것은 4개의 이동식 타워에 장착된 대형 LED패널이 구현해내는 영상미와 드라마틱한 분위기 연출이다. 그동안 국내 뮤지컬에서 영상이 활용되는 경우는 많았지만 그것이 일부 장면에 그치거나 무대 장치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동원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안나 카레니나’의 영상 활용법은 구현된 영상이 실물 무대 장치를 뛰어넘는 수준인데다가 관객이 그 배경에 빨려 들어가듯 몰입하게 하는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특히 1막 오프닝의 기차역이나 눈 내리는 간이역 장면, 경마 장면과 2막 ‘풀베기’ 장면에서의 너른 황금빛 들판 등은 영상의 전면적인 사용이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데 탁월하게 작용한 명장면들이다. 영상을 활용한 장면 전환이 여백이나 끊김 없이 매우 자연스러운 점도 인상적이었다.

 
불륜극 아닌, 주체적 개인의 ‘행복 추구’에 관한 이야기

주인공 안나는 남편과 아이가 있음에도 새로운 남자와 사랑에 빠져 가정을 떠나갔다는 점에서 윤리적인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안나를 중심으로 새롭게 그려낸 뮤지컬의 서사는 단순히 불륜극이나 치정극으로 작품을 그리지 않는다. 욕망에 솔직한 안나를 통해 당대 규칙에 얽매여 위선적인 삶을 살았던 러시아 귀족들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개인의 ‘행복 추구’라는 본질적인 삶의 문제를 여성의 입을 통해 이야기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1막에서 안나가 부르는 솔로곡 ‘눈보라’는 주체적으로 행복을 꿈꾸는 욕망의 감정을 처음 느끼는 대목이며, 1막 후반 안나가 남편에게서의 독립을 결심하는 넘버 ‘자유와 행복’은 강렬한 의지의 선전포고로도 해석된다.

“절대 돌아보지 않겠어. 높이 날아갈래, 난. 자유로운 하늘로 이 모든 걸 다 잊을래. 잊어 그들의 눈빛 따위. 잊어 그들의 잣대. 악몽에서 벗어나 문을 열고 날아갈래. 저 푸른 하늘 향해 자유와 행복 향해 내 모든 삶과 사랑 향해. 사랑 그리고 삶.“  - 안나, ‘자유와 행복’ 중에서 -

안나의 선택이 결국 그녀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작품은 비극적 결말을 통해 또 다른 메시지를 남기는 듯하다. 안나의 선택으로 약혼자를 뺏긴 키티가 오히려 방황 끝에 진정한 사랑인 레빈과 행복한 결실을 맺는 모습은 안나의 무모한 선택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사회의 관습이나 원칙을 무시하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추구하려한 욕망의 결실은 결국 행복이 아닌 또 다른 허망함을 안겨줄 뿐이다. 그러나 마지막 과감히 기차로 뛰어들며 양팔을 벌려 보이는 안나의 제스처는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주체적인 삶의 연장선으로 보이게 만든다. 극단적이고 비극적인 결말임에도 후회보다는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이유다.

윤공주-김우형-민영기, 강렬한 패티 강혜정

국내 두 번째 공연에서 주역이 된 윤공주(안나)와 김우형(브론스키)의 조합은 애절하면서도 도발적이었다. 특히 ‘눈보라’에서 처음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이나, 2막 초반 둘만의 사랑을 확신하는 ‘그대 뜻대로, 나의 여왕이여’에서 둘의 케미는 불륜이라는 잣대를 넘어 공감대를 이끌어내기 충분했다. 여기에 중요한 삼각구도의 축이 되는 카레닌 역할을 맡은 민영기의 활약은 짧지만 강렬하게 존재감을 남겼다. 2막 어린 아들을 잊지 못하고 몰래 찾아온 안나에게 분노와 원망을 쏟아내는 ‘은혜를 모르는 것’에서 민영기는 특유의 힘 있고 깊은 음색으로 감정을 폭발하며, 보수적인 남편 캐릭터의 인상을 확실히 남겼다.

오직 단 한 번의 등장만으로 인물들과 객석의 관객을 모두 홀리게 만드는 빛나는 조역도 있었다. 바로 2막 후반부에 화려하게 등장하는 오페라 가수 패티다. 패티 역을 맡은 소프라노 강혜정은 극중에서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등장해 오페라 아리아 ‘오 나의 사랑하는 이여’를 불렀고, 특히 고음 부분에서 객석 전체를 압도하는 특별한 순간을 만들어냈다. 객석을 숨죽이게 한 그녀의 아름다운 노래는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 안나에게 자신이 꿈꿔온 행복이 환상이었음을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고, 괴롭게 무너지는 안나의 표정이 더해지면서 객석의 긴장감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죽음 같은 사랑. 타들어가는 이 갈증. 생기를 잃은 내 마음. 그대 내 곁에 다가와서 날 안아주오! (중략) 후회 없는 사랑 날 쓰러뜨리네. 내 사랑 그대여 죽음 같은 사랑.“ - 패티, ‘오 나의 사랑하는 이여’ 중에서 -

편집된 서사 속 약화된 캐릭터, 직설적 가사는 아쉬워

원작소설을 사랑한 독자라면 소설 속 배경이 아름다운 영상미로 되살아나고 인물들이 화려한 의상과 노래로 시대와 정서를 표현하는 것에 감격할 만하다. 그러나 원작에 비한다면 아쉬움도 크다. 톨스토이의 장편 소설을 2시간 남짓의 뮤지컬로 압축하다 보니 편집된 서사 탓에 캐릭터가 삭제되거나 약화되기도 하고, 주인공인 안나와 브론스키의 초반 격정적인 사랑과 후반 식어가는 감정에 쉽게 공감하기 힘들다. 그것을 보완하는 넘버들은 아름답지만 몇몇의 곡들을 제외하곤 큰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점도 아쉽다. 일부 넘버들에서는 직설적인 가사나 단순하고 반복적인 가사가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극중 ‘다리를 모두 태워버렸네’와 같은 가사처럼 시적이고 함축적인 가사가 좀 더 쓰였다면 복잡미묘한 인물들의 감정에 더 젖어들 수 있지 않았을까.

원작의 또 다른 주인공인 레빈의 서사가 뮤지컬에서는 크게 축소되다 보니 1막 초반에는 꽤 강렬한 인상을 줬던 그의 캐릭터가 2막에서는 큰 인상을 남기지 못하고 불필요한 인물처럼 느껴지는 것 또한 안타까웠다. 레빈과 키티가 맺어지는 장면도 개연성 없이 급박하고 코믹하게 다뤄지는 데 그치고, 그의 가치관을 잘 보여 주는 농촌 장면 역시 아름다운 영상과 농민들이 추는 독특한 군무가 충분히 인상적이었음에도 전체 서사의 결과 맞지 않아 볼거리 이상의 감동을 주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명작은 흔히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재해석된다. 욕망의 화신이라 할 만큼 솔직하고 당당한 안나는 오늘날 관객에게 양가적 감정을 안겨준다. 관습과 제약을 초월해 자신의 욕망에 충실히 살고자 했던 그녀의 삶을 응원하고 싶으면서도, 그녀의 비극적인 말로에 어딘가 안도하는 감정이 드는 것이다. 인간의 관습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은 여전히 보편적인 삶의 문제다. 또, 안나의 곁에 있었던 두 남자 카레닌과 브론스키가 끝까지 안나의 마음을 붙잡지 못한 데 비해, 우연히 안나를 만나러 온 키티가 안나에 공감하며 그녀를 용서하고 위로해주는 대목은 오늘날 새로운 의미로 와 닿기도 한다. 안나는 남성에게 의존해 얻으려 행복이 결국 환상일 뿐임을 깨달았고, 그로 인한 상처를 같은 여성인 키티에게서 치유받으며 교감을 경험한다. 이는 오늘날 관객에게는 남성중심 사회에서 살아가는 약자 여성들의 의미 있는 연대로 해석될 수도 있겠다.

마지막 커튼콜로 ‘행복’이 리프라이즈되는 무대는 마치 어디로 향하는지 모른 채 바쁘게 달려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직설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듯하다. 톨스토이의 말처럼, “행복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지만 불행은 모두 제각각의 모습”이기에, 우리는 잃어버렸던 행복의 모습을 안나에게서 발견하는 동시에, 그녀의 불행에 자신의 불행을 대조해보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이 아닐까.

사진제공_마스트엔터테인먼트

박세은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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