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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더욱 짙어진 죽음의 그림자, 뮤지컬 ‘엘리자벳’뮤지컬의 미덕 잘 보여주는 웰메이드작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태. 하지만 동시에 어둡고 짙은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 황후. 역사적 배경을 가진 실존 인물의 비극적 일대기를 이렇게까지 몰입감 높게 전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2012년 초연을 시작으로 더욱 완성도를 높여 온 뮤지컬 ‘엘리자벳’이 명배우들과 무대를 새롭게 단장해 다시 돌아왔다. 기존의 드라마틱한 서사와 강렬하고 서정적인 넘버는 여전하고, 무대는 더욱 화려해졌으며, 초연멤버였던 옥주현과 김준수의 만남이 다시 성사돼 화제를 모았다. 다시 만난 옥주현은 10대 소녀부터 중년의 나이까지 엘리자벳으로 울고 웃는 배역 그 자체였고, 전역 후 더욱 아우라가 깊어진 김준수의 죽음은 등장과 동시에 오싹해질 만큼 무대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빨려 들어가는 이 공연의 매력은 주역들의 명연기뿐만 아니라 섬세한 연출로 이뤄낸 각각의 요소들에 숨어 있었다.

속도감 있는 일대기 연출, ‘루케니’의 날선 풍자
- 서술자의 위트, 압축과 묘사로 완급 조절

뮤지컬 ‘엘리자벳’은 한 인물의 일대기와 시대적 분위기를 적절한 압축과 묘사로 흥미롭게 전달해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이러한 탁월한 완급 조절에는 서술자인 ‘루케니’가 큰 역할을 한다. 작품의 첫 장면에서 ‘루케니’는 재판장에서 엘리자벳을 암살한 것에 대해 추궁받고 그 배후를 ‘죽음’이라고 지적하며 엘리자벳을 둘러싼 비극의 서막을 알린다. 첫 시작 뿐만 아니라 작품 도중에 인물과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해석과 평가가 덧붙여진 ‘루케니’의 대사는 작품의 독특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한 몫 한다.

“이곳 비엔나. 지금 거대하지만 몰락해가는 이 도시는 젊은 황제 프란츠 요제프의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그 기반을 살펴보자면 그저 서 있는 게 일의 전부인 군인들,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는 관료들, 무릎 꿇고 기도만 하는 사제들, 아주 추잡한 냄새나 핥고 다니는 고발자들로 이뤄져 있군요. 그리고 마지막 황제의 어머니 대공비 소피, 사람들 말로는 그녀만이 왕궁의 유일한 남자라고 합니다”  - ‘신이시여 지키소서 우리 젊은 황제’ 중 루케니의 대사-

2막의 시작을 알리는 넘버, ‘키치’는 루케니의 익살스러운 진행이 특히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빠르고 경쾌한 멜로디에 엘리자벳과 그의 가족을 따라다니는 파파라치 컷을 재치 있게 묘사한다. 게다가 그 역사적 장면들을 싸구려 기념품으로 만들어 뿌리는 그의 행동은 저물어가는 오스트리아의 전제정치와 강력하게 발전해가는 대중의 힘을 교묘히 대비시킨다. 루케니의 이런 진행방식은 자칫 과하게 자세한 묘사로 지루해질 수 있는 일대기의 전달을 속도감을 잃지 않게 하면서 객석에 흥미롭게 와 닿도록 만든다.

인간적 공감 불러일으키는 각 캐릭터의 ‘극적 드라마’

무엇보다 초연 이후로 배우들의 캐릭터 해석이 더욱 깊어지고 전달이 분명해졌다는 점이 눈에 띈다. 우선 초연 멤버 옥주현-김준수 페어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명불허전의 호흡과 기량을 선보인다. 옥주현은 대공비 소피와의 갈등을 그리는 ‘황후는 빛나야 해’에서 ‘나는 나만의 것’으로 이어지는 대목에서 마치 소녀가 한 명의 여인으로 성장하며 날개를 펴는 듯한 강렬한 연기와 탁월한 가창력으로 객석을 압도했다. 2막의 후반 재결합을 설득하는 남편 요제프에게 부르는 ‘행복은 너무도 멀리에’도 그녀의 진가를 느낄 수 있는 넘버다. 중년이 된 엘리자벳의 후회가 짙게 밴 슬픈 목소리가 서정적인 멜로디, 호숫가에 띄우는 조각배 연출과 만나 관객의 가슴을 오래도록 젖어들게 한다.

김준수는 죽음 그 자체를 캐릭터화한 독특한 배역으로 초연부터 주목을 받았다. 전역 후 첫 무대라는 점에서 기대감이 높았지만 이번 무대에서 그는 예전보다 훨씬 강렬해진 아우라를 선보여 대체불가능한 자신의 독특한 매력을 충분히 입증했다. 특유의 쇳소리에 예전보다 더욱 짙고 풍부해진 저음부가 더해져 노래하는 순간 관객을 집중시키는 특별함이 있었다. 초연 때보다 무대 전체에 죽음의 그림자가 강하게 드리워지는 듯한 강렬한 장악력이 인상적이다. 특히, 엘리자벳과 부르는 ‘내가 춤추고 싶을 때’, 루돌프 황태자와 함께 하는 ‘그림자는 길어지고’는 다른 배우들과의 절묘한 호흡을 통해 극중 인물들의 삶과 감정선에 치명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죽음이라는 캐릭터를 탁월하게 표현했다.

화려한 의상과 독특한 안무, 3D영상 더해진 입체적 무대 연출

뮤지컬 ‘엘리자벳’은 실베스터 르베이가 작곡한 드라마틱한 넘버들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지만, 화려한 의상과 독특한 안무에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엘리자벳과 요제프의 결혼식 장면에서 하객들의 화려한 의상과 1막 마지막을 눈부시게 장식하는 엘리자벳의 순백색 드레스는 인물의 생애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채색한다. 여기에 이번 공연에 새롭게 더해진 3D영상은 화려한 궁정이나, 헝가리 시민들의 투쟁과 같은 동적인 분위기를 객석에 생생하게 전달하는 데 한몫을 했다.

초연부터 ‘엘리자벳’을 관람했던 관객이라면 독특한 특유의 안무와 연출을 곱씹어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앙상블들은 초중반 마치 실에 매달려 조종받는 마리오네트와 같은 독특한 안무를 통해 시선을 끌고, ‘행복한 종말’, ‘밀크’ 등에서는 주역이 등장하지 않는 무대를 앙상블의 노래와 안무가 가득 채우며 유쾌하면서도 절도 있는 앙상블 특유의 매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게 한다.

주연과 앙상블 외에도 눈에 띄는 배역들에 명배우들이 캐스팅돼 인상적인 몇몇의 장면을 남겼다. 대공비 소피 역의 이소유는 그 박력 넘치는 저음과 특유의 카리스마가 엘리자벳이나 요제프와의 갈등 국면을 더욱 긴장감 넘치게 만들었고, 루돌프 역의 최우혁은 아버지와 맞서는 황태자이자 어머니의 애정에 굶주려하는 어린 아들의 모습을 순수하고도 애절하게 표현했다.

‘음악-서사-무대’ 3박자, 뮤지컬의 미덕 보여주는 웰메이드작

뮤지컬 ‘엘리자벳’은 ‘음악, 서사, 무대’라는 기본 요소들을 전문가들의 합작으로 완성도 높게 만들어낸 데다가, 회전무대나 3D영상과 같은 무대 연출로 볼거리를 더해 뮤지컬 초심자들부터 공연마니아들까지 두루 충족시키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매력적인 점은 ‘엘리자벳’은 물론이고 주변 인물까지도 각각의 드라마가 살아 있다는 점이다. 주인공이 아닌 황제 요제프, 대공비 소피, 황태자 루돌프까지도 모두 각자 저마다의 공감할 수 있는 서사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주된 엘리자벳의 드라마가 풍부해지도록 만든다.

높게 평가할 부분은 역사적 인물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은 다소 지루하다는 그간의 편견을 깨뜨리고, 대중적 흥미를 잃지 않으면서 감동을 전달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뻔한 캐릭터가 아닌 ‘죽음’이라는 매력적인 설정이나, ‘암살자’를 서술자로 택한 부분은 역사에 독특한 상상력을 가미하는 탁월한 스토리텔링의 변주를 보여준다. 뮤지컬의 생명력이라 할 만한 드라마와 음악을 모두 놓치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개성을 캐릭터로 드러낼 줄 아는 이 작품이야말로 뮤지컬의 미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사진제공_EMK뮤지컬컴퍼니

박세은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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